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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우개연필 Jul 27. 2015

비상용 여행 계획

개미리카노와 함께

개미가 입 안으로 딸려 들어온다. 

5분 전에 타 놓은 커피인데. 오늘 아침은 개미토핑이 올려진 인스턴트 블랙커피다. 개미리카노. 버리고 다시 타서 먹을 것인가 하는 고민은 없다. 입 속에 있는 개미만  뱉어내고 마신다.  온몸이 부어있는 아침. 요즘 아침에 몸이 잘 붓고 다리가 아프다. 왼쪽 다리가. 확실히 20대 때의 몸이 아니다.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고 대충의 해결책은 알겠는데 수행이 쉽지 않다. 운동을 해야 한다. 이왕이면 살도 빼고. 덮어두고 일단 하면 되는 것인데 그 '그냥'이 잘 안 된다. 집 앞에 한강공원만 있었어도 매일 아침 저녁으로 운동을 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거짓말이다. 3년 전 한강공원 앞에 살았을 때도 일주일에  한두 번 갔다. 지금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자연휴양림 같은 곳에 사는데, 등산은 작년 겨울이 가장 최근이다. 게으름과 핑계를 이겨낼 다짐은 없다. 어떤 다짐에  한두 번 핑계가 따라붙고 게으름이 묻어나기 시작하면 새로운 다짐이 필요한 때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3일마다 한 번씩 새로 마음을 먹으라고 '作心三日(작심삼일)'이란 말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맛이 나쁘지 않다.



계획이 틀어졌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나는 지금 영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이동진의 빨간책방 팟캐스트를 듣고 있거나 아니면, 덜덜 떨며 운전대를 잡고 중앙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어야 한다.  지난주에 친구와 여행을 가려고 준비를 했는데 계획이 무산되었다. 그래도 여행 준비는 한다. 짐을 싸는 준비가 아니라 계획을 싸는 준비를. 여행 준비는 여행을 가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 여행만큼 재미있는 것이다. 물론 실제 가려고 했던 목적지에 도착해서 몸으로 겪는 것에 비할 바 되지 못한다. 당연하다. 그렇다고 여행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하면서 상상으로 여행을 떠나는 재미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는 상상여행이다. 계획이 무산되기 전에 대출한 3권의 여행지 관련 도서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틈이 날 때마다 이리저리 뒤적거리며 상상 속에서 여행을 한다. 설거지하고 나서 땀을 식힐 때나 오후에 차 한 잔을 들고 앉아서 졸음을 쫓아가며 읽는다. 상식이 쌓여간다. 부석사와 한국의 서원제도, 건축양식에 관한 상식. 그러다가 언젠가 문득 시간이 주어질 때, 바로 떠날 수 있다. 비상식량같이 여행을 비상용으로 쌓아두고 사는 셈이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도 비상용 여행 계획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스페인을 그렇게 갑자기 갈 수 있었던 것은 비상용으로 잘 쌓아두었기 때문이었다. 


못 떠나서 불행한가.

당장 짐 싸서 여행을 떠나야만 행복한 것이 아니다. 떠나지 못할 때가 더 많다. 그렇다면 그 순간에는 당연히 불행할 것인가. 계획대로 가면 신나고 못 가면 우울한 것이 당연한가. 스스로를 환경과 상황에 불쌍하게 끌려 다니는 존재로 추락시키지 말자고 개미리카노를 마시며 다짐한다. 오늘은 좀 더 자세하게 여행 계획을 세워봐야겠다. 비상용 여행 계획. 여행사에서 단체여행을 가면 출발 전에 나누어주는 엄청 있어 보이는 일정표처럼 해 볼 요량으로. 커피가 더 필요하다. 이번엔 토핑 없이 드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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