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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우개연필 Jul 30. 2015

100일을 센다

백일홍 : 쌍떡잎식물. 초롱꽃목 국화과의 한해살이풀.

억지로 백일홍 꽃길을 만들었다.

누가 백일홍 모종을 한 가득 가져다 심어주기까지 하셔서 강제로 갖게 된 백일홍 꽃길이다. 처음에 작은 모종을 심을 때는 이게 뭐 얼마나 예쁘겠나 싶었다. 심고 나서 계속된 가뭄 때문에 크지도 않은 물조리를 몇 번씩 채워가며 계속 물을 주어야 했을 때는 살짝 귀찮았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게, 이제 나는 내년에는 모종을 나눠주지 않으시면 어쩌나 걱정이다. 내가 귀찮아하면서 준 물을 잘 먹고 또 이후에 내려준 단비도 잘 먹고 백일홍 이렇게나 예쁘게 피었다. 꽃길이 만들어져 집에 들어올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백일홍 축제 같은걸 열어도 될 만큼이다. 마당에 있는 평상을 길 한가운데로 옮겨두고 백일홍이 바람에 한들거리는 것을 보면서 글을 쓰고 싶다. 옆에 가서 노래라도 불러주고 싶다. 귀찮아하며 물 준 것을 사과하는 마음으로.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집에 이런 꽃을 잔뜩 기른다.

집집마다 화단이 없는 집이 없다. 첫 해에는 그저 무심히 넘겼는데 가만 보니 꽃을 기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씨를 받아야 한다. 어느 집에 어떤 꽃이 예쁘다는 소문이 나면 그 집에 찾아가 그 꽃에 대한 찬사를 한껏 늘어놓은 뒤 나중에 이 꽃씨를 받게 되면 좀 나누어 달라고 청탁을 한다. 그렇게 꽃씨를 얻는다. 꽃씨는 겨우내 찬장 어디에다 보물처럼 잘 보관해 두었다가 봄이 되어 각종 채소와 옥수수 모종을 키울 때 꽃씨도 함께 심어 모종을 기른다. 꽃은 먹을 수도 없고 내다 팔 수도 없지만 각종 곡식들과 같이 귀한 대접을 받으면서 길러진다. 그리고 옥수수 심고 감자 심고 모내기도 해야 하는 그 바쁜 철에 집 앞 화단을 정리하고 거기 꽃모종을 귀하게 심는다. 그리고 들며 나며 물도 주고 비 오는 날에는 비료도 준다. 


집집마다 주 종목이 있다.

어느 집은 해바라기가 한창이고 어느 집은 백일홍이 예쁘다. 봄에는 작약도 한껏 피었고 나로서는 이름도 모를 수 많은 꽃들이 피고 졌다.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아니, 해가 지고 나서도 들에 나가 일을 하시는 어르신들의 문화생활은 TV와 이 꽃들이다. 말하자면 취미인데 취미도 본업과 마찬가지로 흙 만지는 일인 셈이다. 똑같이 흙을 만지는 일이어도 곡식 심는 일은 일이라 힘들지만 꽃 돌보는 일은 취미라 힘을 얻는다.


백일홍을 보면서 설렌다.

꽃을 처음 본 사람처럼. 백일을 피어있는다고 해서 백일홍이라는데 정말 석 달 가까이나 이렇게 예쁜 모습을 보여준다는 말인가 하여 신기하기도 하고 정말 그런지 100일을 세어봐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얗고 노랗고 분홍색에 빠알간 갖가지 꽃을 보며 한껏 치장한 꽃다발을 보면서는 잘 몰랐던 살아있음 자체의 아름다움을 본다. 리본 장식도 없고 망사나 유산지로 둘러주지 않았어도 그저 그 자체로 싱그럽고 당당해 보이는 그런 아름다움을 말이다. 이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또 있다. 사람에게 있어 아름다움에 대한 필요 혹은 욕구는 먹고 사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여서 이 바쁜 산골에서도 어르신들은 이렇게도 열심히 꽃을 기르시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한해도 빠짐없이 곡식을 심듯이 한해도 빠짐없이 꽃을 심는 것이 아닐까.


나도 아름답고 싶다.

아름다움을 가진 삶을 살고 싶다. 화려하게 장식되고 꾸며지지 못하더라도 살아있음 자체로 빛을 발할 수 있는 삶. 저 연약해 보이는 꽃 한송이에서도 느낄 수 있는 단단하며 당당한 생명이 느껴지는 삶. 나는 오늘 백일홍을 보며 삶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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