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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우개연필 Aug 08. 2015

입추 立秋

사진 한 장 없는 바삭한 일상

오늘도 뜨겁다.

백로도 그늘을 골라 발을 디디는 8월의 오후 3시. 좁은 마을길 왼편으로 흐르는 작은 개울에서 방학이라 할머니 집을 찾은 도시 아이 서넛이 어설프게 물고기를 잡는다. 오른편으로 이어지는 논 도랑으로는 맑은 논물이 졸졸 흐른다. 비록 인생의 대부분은 도시에서 살았지만, 농촌에서 태어나 농사꾼의 맏손녀로 살아온 때문일까. 논물이 한가득 흐르는 것을 보면 마음이 그렇게 놓일 수가 없다.  올봄 유독 심했던 가뭄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내 논이 아니어도 논물 흐르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참 좋다.  


8월의 해 아래 달걀도 익고 벼도 익는다.

며칠째 계속된 폭염으로 대구의 아스팔트에서는 달걀 반숙을 할 수 있다는데, 그 뜨거운 태양이 꼭 필요한 이유를 벼가 답해줄 수 있지 않을까. 벼 이삭에 살이 오르고 있다. 가뭄이다 병충해다 시끄러웠지만 벼는 제 할 일을 묵묵히 해냈다. 가문 땅에 뿌리를 박고 뜨거운 태양을 버티며 봄을 지났고, 태풍 몰아치며 천둥번개 요란한 밤이 무서워도 소리 한 번 지르지 않았다. 살이 올라 익어가는 벼 이삭을 발견하고 나는 흠칫 놀랐다. 아, 오늘 입추구나.


세상은 시끄럽다.

신문을 펼치면 비극적인 소식과 쌈질하는 얘기, 누가 거짓말쟁이인지 도둑놈인지 하는 말로 분분하다. 그렇게 큰 일 난 것처럼 굴다가도 내일이면 싹 잊고, 또 다른 나쁜 놈 얘기로 잡음만 가득한 외국 라디오 방송처럼 시끄러울 것이다. 사람 사는 것은 이렇게 시끄러운데, 사람 살리는 벼는 이렇게 말이 없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를 가뭄을 겪으면서도 벼는 신음 소리 한번 낸 적이 없다. 퍽퍽한 땅에 있는 힘껏 뿌리를 박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속으로 기도만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빗방울이 떨어져도 벼는 호들갑 떨지 않았다. 기쁨에 겨워 축제라도 벌일 법도 한데 벼는 통통 튀는 빗방울에 입사귀를 흔들 뿐이었다. 해만 쨍쨍한 날에도,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에도, 살갗이 익을 듯이 뜨거운 날에도 벼는 다만 제 할 일을 묵묵히 할 따름이다.  일희일비하지 않는 삶을, 벼는 살아내고 있다. 


벼는 무엇을 했나.

그 시간을 견뎌 벼가 온통 집중하고 있는 일은 이삭을 키워내는 일이다. 녹록지 않은 상황에 쉽게 절망하지 않고 개 짓고 닭 우는 소리에 한눈 팔지도 않고 벼는 이삭을 키우는 일에 정진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이 작은 쌀알을 키워낼 수 있다고 누가 알려주었을까. 지나가는 일에 흔들리지 말고 네 할 일을 하라고, 벼는 어느 책에서 읽었던 것일까. 8월의 첫 주를 막 지난 오늘. 아직은 폭염이 기세 등등하고 날마다 긴급재난문자가 날아들지만 벼는 알고 있다. 이 뜨거움을 제 안에 가득 채워야 배고픈 이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 내어줄 수 있음을.  


지나갈 것이다. 이 여름도. 

아직 뜨겁지만 지나갈  뜨거움이라고 달력에 씌여 있는 자그마한 두 글자가 일러주고 있다. 지나간다. 완연한 가을이 되어 저 벼가 누렇게 물결치고 어느새 알알히 단단한 쌀알을 우수수 쏟아낼 때가 온다. 나는 무엇을 내놓을 수 있을까. 두 손에 무엇을 가득 담고 "보라, 이것이 내 묵묵한 인내와 우직한 집중의 결과다." 하고 내 보일 수 있을까. 아직은 퍼런 벼 이삭이 지나가는 나를 힐끗 쳐다보며 묻는 것 같다.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넌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밥 한 그릇.

배고픈 누군가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숟가락도 꽂기 전에 벌써 따뜻해 금세 눈물이 핑 도는 그런 밥 한 그릇. 오늘 나는 가뭄을 버티고 뜨거움을 견디며 살고 있는가. 엄살로 요란하고 반복되는 핑계와 변명으로 시끄럽지는 않은가. 부끄러움을 잠시 볼에 발그레 떠올리고 다시 주먹을 꼭 쥐어본다. 입추의 오후, 나는 오늘 벼에게 삶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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