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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우개연필 Apr 05. 2016

갱지와 루이 암스트롱

딱 한 순간 돌아가고 싶은 

갱지라고 부르던 질이 낮은 종이가 있었다. 요즘은 보기 힘들지만 내가 한창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니던 시절만 해도 어렵지 않게 갱지를 만날 수 있었다. 집에 갱지가 한 꾸러미씩 생길 때가 있었다. 시멘트 색깔의 거칠고 어두컴컴한 그 종이에는 덜 귀중한 것들이 어울렸다. 낙서나 끄적거림, 의미 없는 선들의 조합, 전화를 받으며 한 메모 같은 것 말이다. 갱지가 생기면 나는 낙서처럼 끄적이는 것을 좋아했다. 의미 없는 단어들,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것, 싫은 감정, 어제 본 드라마 이야기. 그런 것들을 늘어놓고 누가 볼까 두려워 얼른 쓰레기통에 구겨 넣곤 했다. 반면에 그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내 기억으로 그림의 대부분은 미로였다. 그가 갱지 한 가득 미로를 그려놓으면 나는 연필을 쥐고 조심스레 그 미로를 풀곤 했다. 가끔은 잘 풀 수 없었다. 미로 한 가운데서 길을 잃고 멍하니 있으면 그가 와서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알려주기도 했다. 어떻게 그런 그림을 그리는지 나는 한 번도 궁금해한 적이 없다. 그건 내가 어떻게 끊임없이 낙서를 하는지 그가 궁금해한 적이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내가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집을 떠날 때까지 우린 한 방을 썼다. 방이 2개인 집에 주로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린 굳이 떨어져 있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밤에 자는 시간이 되면 그는 내 이불까지 깔아놓곤 했다. 엄마가 숙제 다 했으면 얼른 씻고 자라고 하실 때까지 우린 함께 무언가를 하다가 잠도 함께 잤다. 그와 나는 잠자기 전 [좋은씨앗], [한국인이 사랑하는 올드팝송], [한국인이 사랑하는 클래식] 중 하나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G. 선상의 아리아'와 '아침 안개 눈앞 가리듯', 'What a wonderful world' 그리고 Carpenters의 노래들을 좋아했다. 지금 나는 그가 초등학생, 나는 중학생이었을 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잘 알아듣지도 못했던 영어 가사들을 들리는 대로 따라 부르기도 하고 오케스트라 지휘를 하듯이 손을 허공에 휘젓기도 하다 보면 이내 잠이 왔다. 그렇게 잠이 오기 시작하면 서로에게 꼭 기도하고 자라고 단속을 하고 잠에 빠져들곤 했다. 


나는 내 인생의 찬란한 순간, 짜릿하고 즐거웠던 일이 참 많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멋진 일들을 떠올려도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거나 그때가 지금보다 나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편이다. 그보다는 늘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고 오늘이 가장 멋진 날이라고 믿기를 더 좋아한다. 이런 내가 딱 한 순간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는데, 그건 바로 그와 이불 두 개를 나란히 깔고 누워서 Louis Armstrong의 목소리를 듣던 순간이다. 그 때로는 언제든지, 몇 번이고 다시 돌아가고 싶고 그 노래를 다 듣고 나면 그에게 '난 먼저 잔다. 기도하고 자.'하고 말하고 싶다.


가끔 나는 눈물이 날만큼 그가 그립고, 팔 한쪽이 저리도록 허전하다. 하지만 그의 끊임없는 도전에 내 가슴이 덩달아 뛰고, 객지에서 홀로 있는 이 시간들을 통해 그가 한 뼘 더 자랄 것을 기대하며 나의 그리움을 삼킨다. 우리는 오늘도 한 시간이 넘도록 농담과 응원을 버무려 통화를 했다. 그리고 그가 보내온 그림들, 예전에 갱지에 그리던 것들과는 많이 다르지만 가끔 미로 그림이 섞여있기도 한 그 그림들을 보면서 그의 생각과 그가 보내고 있는 시간들을 짐작해 본다. 


이제 곧 끝날 줄 알았던 그의 객지(유학) 생활은 더 길어질지도 모른다. 나도 마음을 더욱 다잡고 언제 다시 만나도 부끄럽지 않은 누나로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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