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한 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해오던.
지난주 가기로 했던 자원봉사를 사정이 생겨 이번 주로 미루면서, 봉사 가는 것을 귀찮아하는 마음이 슬쩍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핑계만 있으면 언제고 그만두려고 시도했을 텐데, 그 적당한 핑계가 나타나지 않아 계속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건 아마도 지난번 갔을 때, 정확한 혈압측정을 위해 외투를 벗어달라고 요청했다가 그냥 대충하지 뭘 그렇게 깐깐하게 구냐며 쌍욕을 듣고 난 후부터였던 것 같다. 이름은 자원봉사지만 '자원'은 어느새 쏙 들어가 버리고 그만둘 핑계만 찾고 있는 딱딱한 마음을 안고 집에서 나와 운전해 달려온지 40분. 이런 마음으로 오늘의 봉사활동을 시작하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일지 스스로에게 반문하면서 오전 10시, 복지관에 도착했다.
이미 식당 앞 로비에는 어르신들께서 나란히 줄을 맞춰 앉아 계신다. 담당 사회복지사 선생님께서 밝게 웃으며 어서 오시라고 인사하며 맞아주시고, 내 자리를 찾아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모든 어르신들이 눈만 마주치면 어떻게든 아는 척을 하시며 반갑다고 인사를 하신다. 내가 이곳에서 하는 일은 '청춘 식당'에 오신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배식 전 기다리는 시간 동안 희망자에 한해 혈압과 혈당을 측정해드리는 일이다. 한 달에 한 번은 보건소에서 나오고, 보건소에서 나오지 않는 나머지 주간에 내가 오는데 대게 한 달에 두 번 정도 오게 된다. 서둘러 혈압계와 혈당측정기를 준비해놓고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는다. 손을 씻으러 들어간 화장실에서조차 들어오시는 분, 나가시는 분 모두 나를 보며 오래만이라고 인사를 건네신다. 나는 복지관에서 어느새 유명인이 되어 있다.
자리에 앉자마자 쉬지 않고 계속 혈압과 혈당을 측정해도 줄은 줄어들지 않는다. 청춘 식당에서 식사하시는 어르신만 해도 200명이 넘으니 2시간 동안 열심히 하면 겨우 마지막까지 줄을 서신 분들까지는 해 드릴 수 있다. 하도 반복해서 하다 보니 내가 어르신들께 말하는 문장은 고객센터 응대멘트처럼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김 누구누구."
"회원번호는요?"
"회원번호? 나는 없는데?..."
"여기 식사하러 오실 때 쓰는 번호요, 식권 번호."
"아, 식권 번호... 가만있어봐라. 그게, 사백 오십 아니 사백 이십구 번. 사이구"
"네, 사백이십구 번이요. 혈당 먼저 재 볼게요, 이쪽 손 주세요."
"혈당은 118 나오셨구요, 정상이세요."
"정상? 아이구, 고마우셔라."
"이제 혈압 재 드릴게요. 이팔에 힘주지 마시구요, 다 끝날 때까지 말씀하지 마시고 움직이지 마세요."
"혈압은 178에 101 나오셨어요. 지금 혈압이 많이 높으신데요. 혈압약 드시고 계시죠?"
"혈압약 원래 날마당 먹는데 오늘 아침에 깜빡했네. 아침에 영감이 하도 귀찮게 굴어서 내가 혈압약 먹는 걸 잊어버렸어. 아이고, 그래서 이렇게 높은가?"
"네, 그러신가 보네요. 혈압약 꼭 잘 챙겨 드시구요, 오늘은 힘쓰는 일 많이 하지 마시구요. 다 끝나셨어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이렇게 한 명이 끝나면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음 어르신이 자리에 와 앉으신다. 줄은 아직 길고 시간도 한 시간쯤 더 남았다. 다음 어르신의 혈당을 재고 팔에 커프를 둘러 혈압계에 시작 버튼을 눌러놓고는 그 사이 시간을 아끼기 위해 혈당 측정하는 란셋을 갈아 끼우고 있는데 아까 혈압 높으셨던 할머니께서 다시 오셨다.
"저기, 선상님. 혈압이 높으믄 약을 점슴 먹고 가서 먹으까 어쩌까."
"혈압약이요? 아침마다 드시는 거잖아요. 내일 아침에 드세요."
"그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고마워."
연신 미소를 지어 보이며 할머니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셨다. 나는 생각을 해 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약은 내일 아침에나 드시라고 말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카톡으로 의사인 친구에게 문의를 하니 지금이라도 혈압약을 먹어야 한다고 답이 온다. 이를 어쩌나. 나는 저 할머니 이름도 생각나지 않고 어느 자리에 앉으셨는지도 모른다. 200명도 넘는 어르신들 틈에서 그 할머니를 찾을 수 있을까 고민이 된다. 이 걱정을 하며 지금 재고 있는 할아버지의 혈압까지 다 끝내고 나서 다음분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양해를 구한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식당 안에서는 노래교실이 한창이다. 노래교실 강사와 할아버지 한분이 함께 '내 나이가 어때서'를 열창하고 계신다. 매주 노래교실에서 빠지지 않는 곡이다. 가사를 보여주는 프로젝터를 가로질러 그 할머니 얼굴을 계속 찾다가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자리로 얼른 뛰어가 할머니 무릎 앞에 앉아 얼굴을 가까이 대고 이야기를 한다.
"어르신, 혈압약 있잖아요, 지금 있으세요? 아니면 집에 있으세요?
"혈압약? 지금은 없지. 집에 있어."
"그러면 여기서 식사하시고 나서 집에 가시면 혈압약 챙겨 드세요. 제가 의사한테 물어봤는데 지금 드시는 게 좋데요."
"아이구, 그거 얘기해 줄라고 계속 나를 찾은 거여? 아이구 고마우셔라. 고마워."
"네, 제가 잘못 말씀드려서요. 집에 가시면 꼭 챙겨 드세요."
"알았어. 고맙습니다, 선상님. 고마워."
다시 자리로 돌아와 그동안 기다리고 계셨던 다른 어르신들을 차례차례 재 드리고 있는데 그 할머니께서 다시 오신다.
"암만 생각해도 너무 고마워서. 나한테 그거 얘기해 줄라고 그렇게 서서 나를 찾은 거 아녀. 너무 고마워."
"아이고, 아니에요. 별것도 아닌데요. 약 잘 챙겨 드시라고 말씀드린 거예요."
"하여튼 고마워. 내가 앉아서 생각하니까 참 고마워서 다시 온 거야."
그렇게 할머니는 고맙다는 인사를 연거푸 몇 번을 하시고, 식당으로 들어가시면서도 업무를 보고 있는 담당 사회복지사에게 또 나의 고마움에 대해 계속 이야기를 하셨다. 의사한테 물어보기까지 했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친절하냐고 한참을 이야기하시고는 들어가셨다.
나는 내가 한 행동이 그렇게 연신 고마움을 표현하실 만큼 친절하고 칭찬받을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대답한 애초의 경솔함과 아무리 현업을 떠난 간호사라지만 간단한 건강상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내가 부끄러울 뿐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내가 굳이 자기를 찾아 잘못 알려준 내용을 정정해 준 것이,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를 찾느라고 한참을 서 있었던 것이 그렇게 고마우셨던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작은 친절에 대해 얼마나 고마워하며 살고 있나 생각해본다. 나를 생각해준 그 시간이 고마워 상대방에게 그렇게 연신 고마움을 표현한 적이 얼마나 있었나? 돌아보니 나는 한 번의 감사 인사면 족하다고, 늘 생각해왔던 것 같다. 나는 할머니처럼 단지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아픈 무릎을 펴서 발걸음을 옮겨 찾아오는 것과 같은 열정을 가지지 못했다.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고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늘 적정선에서, 해야 할 만큼의 표현을 해 왔던 것 같다. 아니, 지금 생각하니 어쩌면 늘상 마음보다 더 적은 표현만 해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넘치고 넘치는 감사인사를 해 본 게 언제이던가. 감사 인사에 인색하고 소극적이었던 내가 참 부끄럽고, 나의 작은 행동에 이렇게까지 고마워하시는 이 어르신들을 돌보는 일을 귀찮게 여겼던 오늘 아침을 후회한다.
감사의 달 5월을 하루 앞두고 할머니의 고마운 마음 가득 담긴 눈빛을 떠올린다. 고마운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동안 참 많이 잊고 살았구나 반성한다. 바쁘다는 이유와 멀리 있다는 핑계로, 혹은 이도 저도 아닌 이유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살아온 내가 참 부끄럽다. 딱딱한 마음 틈새에 핀 노란 민들레 같은 할머니의 감사 인사. 상쾌한 바람에 홀씨 날리듯, 나도 올봄에는 고맙다는 말을 더 많이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