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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우개연필 Apr 26. 2016

밭을 갈다

호미 하나로 충분한 밭 갈기와 모종심기

밭은 아직 황무지와 같다. 남의 밭은 정갈하고 풋풋했지만 나의 밭은 아직 딱딱하고 죽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밭을 간다는 것은 새로운 한 해 농사의 시작을 의미한다. 밭을 간다는 것은 어제의 묵은 생명을 거름으로 돌려보내고 오늘의 새로운 생명을 품기 위한 거대한 순환의 시작이다. 거창하게 밭을 가는 일에 대해 의미를 부여해본다. 지금 하고 있는 호미질에 버거워하는 내 손을 달래는 의미로 말이다. 보통은 호미로 밭을 갈지 않는다. 밭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어느 정도의 크기가 있지만 나의 밭은 그 '어느 정도의 크기'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아주 아담하고 살짝 민망하기까지 한 밭이다. 그러니 이 동네에서 가장 작은 밭을 가진 나로서는, 다섯 걸음쯤 걸어가면 끝이 나는 밭을 가진 나로서는 호미로 밭을 갈아도 전혀 무리가 없는 것이다. 


마을 어르신들이 밭을 간다고 말할 때는 트랙터가 등장한다. 모든 집에 트랙터가 구비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서 트랙터를 가진 사람은 일철이 시작되는 이 맘 때에는 무척 바쁘다. 자기 집 밭을 갈아야 함은 물론이고 다른 집에서도 여러 군데에서 요청이 오기 때문이다. 봄철에 트랙터를 가진 사람은 그 일당만 제대로 다 받아도 짭짤하다. 하지만 혼자 사는 노인이 밭을 정리하고 있으면 지나가다가 그냥 갈아주기도 하고 일당을 받기 애매할 정도로 작은 밭은 남는 시간에 와서 잠깐 갈아주기도 한다. 어떤 신세를 진 것을 갚느라 밭을 갈아주기도 하고 그러면서 탁주 한 사발 대접받으며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나의 밭은 트랙터가 들어오지도 못할 만큼 작은 밭이라 그런 부탁을 할 필요도 없다. 다만 이 작은 밭이 아니라 올해 새로 맡게 될, 정말 트랙터가 와서 갈아주어야 하는 커다란 밭이 하나 더 있어 그것이 걱정이다. 아, 그 밭에 심을 옥수수 모종에 참외, 쑥갓까지 한 판 이미 얻어놓았다. 하지만 오늘은 이 호미질로도 충분한 작은 밭, 이 밭일만 할 것이다. 한 날의 걱정은 그날에 족하니, 오늘은 이 밭에만 매진하기로 하자.

   

작년 밭고랑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내 텃밭. 그 너머에 아직 갈지 않은 큰 밭.


이 밭자리로 말할 것 같으면 3년 전 수해가 났을 때 쓸려내려 간 창고가 있던 자리다. 그 창고는 196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써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옛날 집의 면모를 모두 갖추고 있는 집이었다. 나무 기둥에 흙벽인 그 집엔 거미줄도 많고 불도 들어오지 않아 어두 컴컴했다. 지어질 당시에는 사람이 사는 집으로 지어졌지만 시간이 흘러 빈 집이 되어 창고로 쓰이다가 이제는 창고로 쓰기에도 여러모로 부족한 집이었다. 우리는 몇 년 전 겨울에 이곳에 이사와 저 창고를 좀 어떻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한동안 사로잡혀 있었지만, 용기도 없고 돈도 없어 그대로 두고 농기구 정도 보관하는 창고로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사 와서 첫 번째 맞는 여름에 큰 수해가 나서 산사태가 발생했다. 뒷산이 무너져 집을 덮쳐서 살고 있던 집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지만 다행히 집은 무사했고, 그 와중에 창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철거비도 주지 않았는데 산이 창고를 처리해준 것이다. 이후에 우리는 컨테이너 박스를 하나 가져다 놓고 창고로 쓰고 있다. 그리고 창고가 있던 자리가 오늘 등장하는 이 밭이 된 것이다. 살다 보면 가끔,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소원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산사태가 나서 그 해 여름과 가을 내내 삽자루를 쥐고 수해복구 작업에 빠져 살아야 했지만 어쨌든 창고는 처리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나서서 철거를 하려고 했으면 중장비를 부르고 잔해들을 치울 트럭이 필요했을 텐데, 산사태가 우리 창고를 처리해주고 나니 나라에서 중장비와 트럭을 불러 잔해들을 치워주었다. 국가재난지역으로 선포되어서 말이다. 물론 산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겠지만, 나는 습관처럼 이 와중에도 좋은 면을 자꾸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밭은 밭이 있기에는 애매한 자리에 위치해있다. 바로 옆에 커다란 밤나무가 있고 새로 생긴 컨테이너 창고 때문에 그늘이 많이 생긴다. 게다가 건물이 있던 자리다 보니 밭을 갈다보면 간혹 철근 같은 게 발견되기도 한다. 집을 보수하면서 쓰인 재료일 텐데 지금 이 밭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방해가 된다. 호미로 밭을 갈고 있는 나로서는 이 철근을 뽑아낼 수 없으니 결국 철근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서 밭의 일부분이 된다. 나는 한가운데 철근이 꽂혀있는 밭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철근을 조금 지나 더 밭을 갈다보면 나무뿌리가 있다. 이 뿌리에서 봄이 되면 얇은 가지가 나오는데 그 얇은 가지에서 굳이 자라는 새순을 보며 기막혀하다가 나는 그 나무뿌리도 그대로 살려두기로 했다. 없애려고 해도 뿌리가 깊이 박혀 있어서 뽑을 수도 없다. 이렇게 해서 결국 나는 한가운데 철근과 매해 새순이 돋는 나무뿌리를 가진 밭의 주인이 되었다.

   

올해도 만났다, 철근. 이름을 지어줄까보다.


이렇게 철근과 나무뿌리를 함께 사는 식구로 받아들이면서 호미로 밭을 갈고 가축분뇨로 만든 퇴비를 뿌려 섞어준다. 정석대로 하자면 퇴비를 뿌려 며칠 묵혀두었다가 발효가 진행되고 가스가 빠져나간 밭에 비닐을 씌워야 하지만 나는 너무 게을러 미리 밭을 갈아두지 못한 관계로 꼼수를 써야 한다. 퇴비를 뿌리고 비닐을 씌우되 비닐에 구멍을 내주어서 가스가 빠져나갈 길을 만들어 줄 것이다. 지금은 일단 밭을 갈고 퇴비를 뿌려 섞어 놓은 다음 비닐을 씌우지 않고 모종을 사러 장에 간다. 그동안 잠깐이지만 밭이 가스를 마구 배출해주기를 기대하면서. 


모종을 사는 일은 세상의 모든 쇼핑 중 가장 가슴 떨리는 쇼핑이라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지금 돈을 주고 구입한 이 모종이 아니라 앞으로 이 모종에서 자라나 나에게 안길 수많은 상상 속의 열매들을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종을 사는 것은 가능성을 사는 것이다. 내 밭은 엄청나게 작은 밭이지만 이래 봬도 먹고사는 데는 큰 부족함 없이 모종을 심을 수 있다. 모종은 오이 5개, 대추 방울토마토 4개, 청양고추 1개, 안 매운 고추 2개, 가지 6개, 파프리카 4개를 사고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아스파라거스도 10개 산다. 이렇게 찔끔찔끔 사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이 녀석들이 본격적으로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여름이 되면 다 따먹기가 바쁠 정도로 쏟아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삼시세끼 고추만 먹을 수도 없고 가지밥만 열흘 동안 해 먹을 수도 없으니 한두 개의 모종만 있어도 내가 먹을 만큼은 충분하다. 올해 처음으로 시도해보는 아스파라거스는 잘 자라면 옆집에도 나누어 드릴 요량으로 10개나 샀다. 새로운 작물을 시도해보고 그게 잘 되면 이웃에게 자랑하며 나누어주는 것이 이 텃밭 가꾸기의 큰 즐거움이니까. 이것만으로는 밭을 다 채울 수 없지만 오늘 모종을 심어보고 남는 땅이 얼마나 되나 살펴본 다음에 나머지 작물을 살 생각이다. 호박과 배추, 이웃에서 씨앗을 모종으로 길러서 가져다주신다고 하신 쌈채소와 방울양배추 자리도 남겨 놓아야 한다. 


그렇게 모종 쇼핑과 그 밖의 잡다한 읍내 일로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나고 집으로 돌아와 밭에 검은 비닐을 씌운다. 검은 비닐은 모종에게는 땅의 수분을 오래 가둬두어 모종을 잘 자라게 하는 역할을, 잡초에게는 햇빛을 가리는 역할을 해서 잡초의 성장을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 같은 식물, 같은 생명이지만 그들이 밭에서 맞이하는 운명은 비극적으로 갈린다. 밭이 아닌 곳에서야 다를게 없지만 밭에서의 모종과 잡초는, 분명 다른 길을 간다. 때때로 밭에 자란 잡초를 뽑으면서 가끔 슬퍼지기도 한다. 하지만 슬픔에 겨워 그들 모두를 살려둔다면 밭에서 거둘 수 있는 것은 실망뿐일지 모른다. 모종을 심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는다. 정갈하게 밭이 준비되기만 한다면 모종을 옮겨 심는 일은 순식간에 끝이 난다. 호미로 비닐을 뚫어 자리를 만들고 모종을 넣고 물조리로 물을 주고 주변을 흙으로 잘 덮어 준다. 하나의 모종을 심는데 1분도 걸리지 않는다. 그 전에 어떤 모종을 어디에 심을지 결정하는데 오히려 시간이 걸린다. 버팀목을 해 주어야 할 만큼 키가 크게 자라는 녀석들은 한 줄 혹은 두 줄로 줄지어 심는 게 좋다. 그래야 버팀목을 여기저기 꽂지 않고 한 군데 줄 맞춰 꽂을 수 있다. 해가 더 잘 드는 곳에는 토마토를 심고, 밭의 가장자리에 그물망을 기대어 놓은 곳에는 오이를 심는다. 오이 줄기가 이 망을 타고 올라갈 수 있게 말이다. 생각해보니 이 그물망은 쓸려간 창고의 잔해 중 하나다. 쓰레기가 될뻔한 철망을 따로 빼놓았는데, 철망은 이제 오이가 자랄 터전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모종을 다 심고 나서 물을 흠뻑 주면 오늘의 텃밭일은 끝이 난다. 모종에 물을 주는 이 순간을 나는 사랑한다. 모종에 물줄기가 닿을 때 간지러워하며 이리저리 몸을 비트는 모종들을 보면 나도 같이 웃게 된다. 무슨 모종이 간지럼을 타고 웃느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속는 셈 치고 모종에 물조리로 물을 한번 줘 보시라. 내 말이 무슨 말인지 금방 알게 될 것이다. 모종을 보면 언제나 기분이 좋아진다. 그게 맵디 매운 청양고추 모종이든, 달콤 상큼한 파프리카 모종이든, 한 번도 심어본 적 없는 아스파라거스 모종이든 마찬가지다. 모종은 언제나 눈을 똘망 똘망하게 뜨고 있다. 눈빛을 반짝이면서 신기한 모험을 기다리는 아이와 같다. 잎에는 윤기가 흐르고 어느 곳 하나 시든 구석 없는 새로움 덩어리이다. 이 모종을 밭에 옮겨 심는 일은 별거 아닌 것처럼 손쉬운 일이면서도 사실은 엄청난 가능성과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일이다. 모종은 심어지기 전까지는 하나의 생생한 생명에 지나지 않지만 밭에 심기는 순간 수많은 생명을 품고 있는 가능성이 된다. 모종을 모판 그대로 둔다는 것은 머지않아 그 생명이 사라질 것을 말하는 것이지만, 밭에 심는다는 것은 이것이 심기움으로서 수많은 생명이 이 작은 가지들 속에서 태어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천재지변이 없다면 모종은 틀림없이 성장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오늘은 장에 가서 모종을 사와 밭에 옮겨 심었다. 오늘 한 일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렇게 간단하지만 서툰 나는 거의 하루가 꼬박 걸렸다. 그리고 이제 끝인가 하면, 아니다. 이제 막 시작이다. 조만간 잡초와의 싸움이 시작될 테고 키가 자라는 동안 버팀목도 만들어 주고 오이줄기가 엉뚱한 곳으로 뻗지 않도록 길을 잡아 주기도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어느 뜨거운 여름날 나는 파프리카 몇 개와 청양고추, 가지와 오이 그리고 어쩌면 아스파라거스까지 얻게 될 것이다. 아직은 그날이 과연 올 수 있을까 싶은 수줍은 모양새의 밭이지만, 땅은 나처럼 게으르지 않으니 나는 곧 내가 심은 것보다 더 많은 생명을 거두게 되리라고 믿고 있다. 


아직은 휑한 밭, 모종은 오늘 저 밭에서 처음으로 잠을 잔다.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떨다가 별이 불러주는 자장가를 들으며 잠이 들겠지. 모종은 어떤 꿈을 꿀까. 내일 아침에 물조리로 물을 주면서 물어봐야겠다. 우리 밭에서 첫날밤은 어땠냐고, 산짐승 소리에 무섭지는 않았느냐고, 봄의 아침 햇살을 너도 나처럼 좋아하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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