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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우개연필 May 17. 2016

양배추 벌레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오늘 아침, 게으름뱅이 초보 농사꾼의 일과

아침을 먹고 옷을 챙겨 입고 문을 나섰다. '오늘은 양배추 벌레를 잡아보리라.' 하며. 방울 양배추는 이틀 전에 심었다. 아직 모종판에서 밭으로 옮겨심기도 전부터 양배추 벌레는 온몸의 초록을 자랑하며 내 양배추 모종을 먹고 있었다. 이 놈들, 너희들의 초록이 아름답긴 하다만 그 초록이 모두 내 양배추 잎을 먹은 증거이니 용서할 수 없다! 선크림을 바르고 모자를 쓰고 나가 장화를 신고 농사용 이동식 의자까지 준비했다. 장갑과 호미를 장착하고 양배추 벌레 소탕에 나선다.

 

엉덩이 의자라고도 부른다. 저게 없는 집은 농사 짓는 집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정도. 농사꾼의 잇템


두 다리를 끼워서 저 의자를 엉덩이에 장착한 뒤 쪼그려 앉아 밭일을 하는 것이다. 저 의자가 없으면 계속 쪼그려 앉아 일을 해야 하는 작업환경 탓에 무릎과 고관절이 엄청 아프고 가끔 쥐도 난다. 저 의자가 조금 더 일찍 개발되었다면 우리 동네 할머니들 무릎 통증이 지금보다는 조금 낫지 않았을까 싶다. 어쨌든 저 엉덩이 의자를 끼고 앉았다는 것은 오래 밭일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나도 퍼질러 앉아 샅샅이 양배추 모종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발견한 양배추 벌레는 0마리. 이상할 정도로 깨끗하다. 분명 갉아먹은 흔적은 있는데 말이다. 그제 밤 내린 비에 모두 씻겨 내려갔을까? 어쨌든 양배추 벌레가 없다는 것은 반가워할 일이지만, 어쩐지 엉덩이 의자까지 완비하고 나선 내 차림이 무색하다. 농사꾼 차림을 완비하고 나온 김에 다른 모종 들이라도 살펴보기로 한다.

 

어디 갔을까 이놈들.




시골살이에서 날씨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길에서 마주쳐 인사를 나누기라도 할 때면 오늘의 날씨 그리고 내일의 날씨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특히나 비 소식이 있다면 더욱 그렇다. 비 예보가 나오면 길거리엔 개도 한 마리 없다. 모두 밭에 가 있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한창 무언가를 심는 철에는 비 내린다는 말처럼 반가운 소식이 없다. 본격적으로 비가 내리기 전, 갈아 놓은 땅 혹은 비닐을 곱게 씌워놓은 땅에 모종들을 옹기종기 심어 놓고 나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 없다. 비가 오지 않는 가문 날이 계속되면 하는 수 없이 마른땅에 모종을 심으며 물조리로 물을 주기도 하는데, 이게 한두 평도 아니고 넓은 밭에는 너무도 고된 일이라 시도하기가 쉽지 않다. 이틀 전,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 우리 동네 대부분의 집들은 모두 밭에 나가 무엇인가를 심었다. 나도 옥수수와 방울 양배추와 모둠 쌈채소를 심었다. 보름 전에 옥수수 한판을 심었고 이제 두 번째 옥수수를 심은 것이다. 옥수수를 심을 때는 한 번에 모든 밭을 다 채우기도 하지만, 한 번에 다 팔아버릴게 아니라면 몇 번에 걸쳐 나누어 심어야 한다. 한꺼번에 많은 양의 옥수수가 익어버리면 다 따서 먹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보통 1~2주 간격을 두고 서너 번에 걸쳐 심는다. 그러면 익을 때도 간격을 두고 차례대로 익기 때문에 한꺼번에 너무 많은 양을 수확하지 않아도 되고 일을 나누어할 수 있어서 좋다. 이틀 전에 심은 방울양배추와 쌈채소 모종은 이른 봄에 씨앗을 사다가 모종을 키우는 법을 물었더니 비닐하우스도 없으면서 무슨 모종을 키우냐며, 윗마을 베테랑 농사꾼께서 키워다 주신 모종이었다. 비가 온다고 하니, 지금 심으면 딱 좋을 거라고 가져다주셔서 옥수수와 함께 밭에 심었다. 모종을 다 심고 나니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내렸다. 봄철에 내리는 비는, 특히나 무엇이가를 심고 어린 모종들이 밭에서 자리를 잡고 자라야 하는 요즘 내리는 비는 말 그대로 단비 중에 단비다. 그날 밤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얼마나 단꿈을 꾸었는지 모른다. 


첫 옥수수를 심으며 함께 밭에 심은 쌈채소는 벌써 조금씩 따서 먹을 수 있을 만큼 자랐다. 이 야들야들하고 생기 넘치는 이파리로 샐러드를 먹으면 입 안 가득 초록 빛깔 생명이 가득해진다.  뱃속도 초록색이 되고 위와 장이 모두 봄빛으로 반짝이는 것만 같다. 과장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밭에서 갓 따온 채소를 먹어보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침 먹은 지 3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점심을 먹고 싶어 졌다.


큰 밭의 작물들이 벌레에게 정복당하지 않고 잘 자라고 있는 것을 확인하니 기분이 참 좋았다. 작은 밭으로 올라가 보니 토마토와 가지와 고추들이 휘청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지대를 세워주어야 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지난겨울 밭을 정리할 때, 사용한 지지대를 뽑아서 창고 한쪽에 아무렇게나 두었더랬는데 나는 그것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일을 먼저 시작했다. 작년에 사용한 낡은 끈이 아직 여기저기 매달려 있어 그 매듭을 풀고 끈을 잘라내고 지지대를 깨끗하게 정리하는 일이었다. 나는 이 속이 빈 쇠기둥을 보면서 옆집 정씨 아저씨를 생각했다. 이 지지대는 작년에 옆집 아저씨께서 주신 것이다. 지지대만 주신 것이 아니라 와서 직접 땅에 지지대를 박고 작물들을 고정하는 것까지 해 주셨다. 우리는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토마토가 휘어지는지 고추가 흔들거리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정씨 아저씨는 오며 가며, 왕초보인 데다가 게으르기까지 한 우리의 작물까지 눈여겨 봐주시고 계셨던 것이다. 작년 이맘때쯤 집에 있는데 망치소리 같은 것이 들려 밖에 나가보니 아저씨가 와서 지지대를 땅에 박아주고 계셨다.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 작물을 묶을 노끈까지 잘라다 주시며 이렇게 묶어 주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더랬다. 고마운 아저씨께 포도 효소를 탄 탄산수에 얼음을 띄워 가져다 드리고 함께 밭에 서서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정말 엊그제 같다. 나는 아저씨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지지대를 땅에 박고 토마토며 가지며 고추들을 조심스레 기둥에 묶어 주었다.



정씨 아저씨는 이제 더 이상 우리 집 밭에 관심을 가져주시지 않는다. 봄이 막 시작되었을 때, 감자를 심어 놓고 아저씨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셨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었고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옆집 아주머니도 우리도 참 많이 울었다. 옆집은 힘든 소송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가끔 필요한 서류를 컴퓨터로 만들어 드리고, 군청에 여러 번 함께 가서 아저씨를 대변해드리기도 하고, 법원에도 같이 가곤 했다. 아저씨는 언제나 우리가 한 것보다 늘 배로 고마워하셨고 눈이 내리면 먼저 일어나 우리 집 앞 눈까지 쓸어주시고, 농사일도 가르쳐 주시고, 농사지은 수확물도 나누어 주시고, 막힌 처마도 뚫어주시고, 고장 나는 것이 있으면 손수 공구를 챙겨 와 고쳐주시기도 하셨다. 이 지지대도 그런 아저씨의 선물이었다. 


나는 작년에 쓴 지지대를 정리하면서 아저씨께서 묶어두신 끈 매듭들을 보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지금도 옆집에 가서 부르면 구부정한 허리를 하고 나와서 수줍게 웃으며 무엇이든 도와주실 것 같은데, 아저씨가 이제 더 이상 우리를 도와주실 수 없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지지대의 하나 남은 매듭은 풀지 않고 그대로 두었는데, 그건 가끔 아저씨가 생각날 것 같아서였다. 멀리 있는 가족보다 더 자주 만나던 이웃사촌, 삼촌 같기도 했고 친구 같기도 했던 아저씨를 나는 이렇게나마 기억하기로 했다.

슬픔도 기쁨처럼 잘 다듬어 두면, 무엇 못지 않은 보석이 된다.



오래 걸릴 줄 알았던 오전 일과를 아주 짧게 마무리하고 흙도 얼마 묻지 않은 장화와 장갑을 털어 제자리에 둔다. 꺼내놓은 호미는 쓰지도 않았고 엉덩이 의자도 다시 창고행이다. 이제 장독대를 한번 닦고 볕이 좋으니 뚜껑을 열어 바람을 좀 쐬어 주고 이불을 창창한 햇빛에 널어야겠다. 글을 쓰다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다. 새들은 어디서 이렇게 많이 왔는지 집 앞 밤나무에서 집회를 벌이고 있다. 무슨 이야기를 이렇게 열심히 하는 것일까. 내 생각에는 희대의 난제, 오늘 점심은 뭘 먹나를 토론하는 것 같다. 나는 아까 눈 여겨보아둔 쌈채소를 몇 잎 뜯어다가 밥에 넣고 달걀 프라이를 하나 해서 슥슥 비벼 비빔밥을 해 먹으려고 벌써 정해 놓았으니 오늘 몫의 고민은 끝이다. 그러고 보니 양배추 벌레는 이 새들의 아침식사였을까? 아, 정말 그런 걸까. 한편 안타깝고 다른 한편으로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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