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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우개연필 Mar 31. 2020

격리된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인적 드문 산책길에 만난 들과 봄

백일을 갓 지난 아들, 첫눈이는 아빠에게 맡겨두고 두 돌을 목전에 둔 딸, 봄볕이을 데리고 산책을 나간다. 옷을 갈아입힐 때부터 딸의 얼굴에는 흥분이 꽃가루처럼 묻어 난다. 밖에 나가는 게 이토록 좋은 아이지만 맘껏 데리고 나다닐 수는 없다. 우린 지금 자가격리 중이다. 코로나 19 확진자인 것은 아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을 뿐이다. 자가격리를 열심히 한 덕에 확진자가 아닌 확찐자가 되어가고 있기는 하다. 잘 알려진 대로 확찐자의 이동 동선은 냉장고-소파-침대-냉장고다. 


스스로 자가격리에 들어간 우리 가족은 요즘 장을 보거나 예방접종을 하러 나가는 것 외에는 외출을 많이 하지 않는다. 장을 보는 것도 남편만 혼자 나가는 경우가 더 많다. 혹시 함께 시내에 나가게 되더라도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차에서 보낸다. 너무 답답할 때 한 번씩, 차를 타고 드라이브만 하다가 사람이 없는 곳에 잠시 내려 바람만 쐬는 정도다. 주로 우리가 햇볕을 보는 시간은 오후에 한 시간 정도의 산책시간인데 이마저도 매일은 아니다. 볕이 좋고 미세먼지가 없는 오후, 딸아이를 데리고 나간다. 별로 볼 것이 없었던 2월 말부터 제법 초록이 많이 보이는 오늘까지, 우리는 잠깐의 산책을 위로 삼으며 눈이 내리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버텨왔다. 다행히 마을에 인적이 드물어서 아직 산책을 하면서 누구도 마주친 적이 없다. 집 옆에 있는 마을회관도 문을 닫았고 가장 가까운 집도 걸어서 5분 거리다. 


산책의 동선은 단순하다. 집 앞마당에서 잠시 놀다가 계단을 내려와 큰 마당과 마을회관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밭에 잠시 다녀오는 것과 소공원에 다녀오는 딱 두 가지 코스다. 집 앞에서 노는지 걸어서 1분 거리의 소공원까지 다녀오는지 정도의 차이다. 요즘 봄볕이는 장화 신고 나가는 걸 좋아한다. 비가 오면 신으려고 우비와 세트로 중고거래를 했는데 아직 우비는 개시하지 못했지만 장화는 열심히 신고 있다. 밭에 나갈 때는 운동화보다 장화가 좋다. 장화를 신으면 신발 속에 흙이나 돌이 끼지도 않고 새로 산 운동화를 더럽히지 않아도 되니 일석이조다. 나도 밭에서 일할 때는 장화를 신곤 하는데, 봄볕이는 장화를 신고 밭에 가야 한다는 걸 아는 걸까? 아니다, 그런 건 알리가 없고 그냥 새로 생긴 장화가 좋을 뿐일 거다. 


내일의 산책을 기다리는 봄볕이의 어흥 장화


밭에는 아직 아무 작물도 심지 않았지만 밭 한편에 작년 가을 심어 놓은 파가 줄 지어 자라 있다. 갈 때마다 파라는 걸 알려주어서 이제 봄볕이는 밭에 가면 먼저 파에게 가서 인사를 한다. 높은 소리로 '아-' 하면서 인사를 한 다음, '파, 파' 하면서 아는 척을 한다. 파를 쓰다듬고는 한 두 잎 따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 밭 한가운데로 들어가 맘에 드는 돌멩이를 골라 주머니에 넣기도 하고 가지고 다니는 작은 가방에 소중히 간직해 놓는다. 밭에는 요즘 냉이꽃이 한창이다. 봄볕이는 꽃을 따면서 '아빠, 아빠'라고 말한다. 아빠에게 가져다주겠다는 얘기다. 늘 데리고 나가는 건 나인데, 나에게는 꽃을 주지 않는다. 나는 아들인 둘째 첫눈이가 봄볕이 만큼 클 때를 노리고 있다. 아들의 꽃은 꼭 내가 차지하리라고 다짐하면서. 


손에 꼭 쥔 그녀의 꽃다발


노랗고 하얀 꽃이 피어 있는 밭에서 한참을 놀다가 키가 큰 은행나무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 이유는 주로 새소리 때문이다. 참새떼가 찾아오기도 하고 까치가 날아들어 소리를 내기도 한다. 참새는 '짹짹'이라며 아는 척을 하고 까치는 '악악' 하고 따라 한다. 까치 소리를 아무리 '깍깍'이라고 알려주어도 봄볕이는 언제나 '악악'이라고 한다. 봄볕이 귀에는 그렇게 들리는 거다. 은행나무 밑에서 새소리를 듣다가 마을회관 쪽으로 내려가거나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다른 새를 찾아보기도 하면서 놀다 보면 어느새 40분쯤 흘러 있다. 그럼 나는 슬슬 집 쪽으로 봄볕이의 동선을 조정하다가 결국 집에 들어가자고 유도한다. 물론 잘 먹혀들지 않는다. 봄볕이의 산책은 언제나 아쉬움으로 마무리되고 자주 울음으로 끝이 난다. 더 놀고 싶은데 내가 자꾸 들어가자고 하기 때문이다. 봄볕이의 산책을 기분 좋게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딸기를 먹는 것이다. 딸기를 먹으러 들어가자고 하면 부리나케 신발을 벗고 들어간다. 봄볕이에게 딸기란 과연 어떤 의미일까 가끔 궁금하다. 딸기로도 해결되지 않는 일은 대부분 그 무엇으로도 풀 수 없다.


다른 날은 딸아이를 데리고 마을 소공원에 간다. 길을 건너는 아이는 신이 나서 이리저리 눈을 돌리고 목소리가 높아진다. 소공원에서 내려다보면 마을을 가로지르는 개울이 보인다. '무' 혹은 '물'이라고 손짓을 하며 봄볕이는 신이 난다. 요즘 할 줄 아는 단어가 조금씩 늘고 있는데 그중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단연 물이다. 집에서도 물장난을 어찌나 하는지 하루에 옷을 몇 번을 갈아 입히는지 모른다. 소공원에도 역시 인적이 없다. 인적이 없는 건 코로나 때문이 아니라 원래 그렇다. 산골 마을 어르신들은 늘 밭일하시느라 바쁘시지, 운동기구를 찾아와 운동하시는 걸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래서 몇 년 전 소공원이 생긴 이래 가장 열심히 들락거리는 사람은 봄볕이뿐이다. 요즘은 더 그렇다. 운동기구는 있지만 운동하는 사람은 없고 팔각정에 '신을 벗고 올라가시오'라는 안내문이 있지만 신을 신고 올라가는 사람도 벗고 올라가는 사람도 없다. 사람은 없지만 그렇다고 공원이 텅 빈 것은 아니다. 인적이 없는 것과는 별개로 공원의 흙바닥에는 구석마다 뭔가가 자라고 있다. 아직은 구석 마다지만 조금만 지나면 흙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초록색의 뭔가가 자라기 시작할 것이다. 


내가 이름을 아는 풀이라고는 냉이, 쑥, 질경이, 달래 정도다. 눈에 익은 풀이 많지만 생각해보니 난 한 번도 이 풀들의 이름을 알려고 노력해 본 적이 없었다. 요즘은 시절이 좋아져서 휴대폰을 가져다 대면 꽃 이름, 풀이름을 알려주는 기능도 있건만 왜 지금까지 해 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딸에게도 늘 '풀'이라고만 가르쳐주었지 이 풀들에게 각기 이름이 있다는 걸 알려주지 못하고 있다. 다음번 산책을 나가면 꼭 검색을 통해서 이름을 알아내어 봄볕이에게 각각의 풀이름을 가르쳐주어야겠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산골에 산 지 벌써 8년 차인 게 부끄럽다. 사는 게 풍성해지고 다채로워지려면 사소한 것들, 그저 지나치는 것들에 더 눈길을 주어야 한다. 들풀의 이름을 하나씩 찾아보는 것도 그중 하나일 텐데, 나는 시골살이가 지루하다고 생각할 때는 있었어도 이 작은 풀들의 이름 한번 불러주려는 노력을 해 본 적도 없었다. 풀마다 내가 '풀'이라고만 부를 때마다 입을 샐쭉하며 눈을 돌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미안하다. 누가 나를 가리키며 '사람'이라거나 '여자'라거나 '아줌마'라고만 부른다면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울까. 어느 순간 가끔은 나도 나를 그저 '엄마'나 '아줌마' 정도로 여기고 살았던 건 아닌가 돌아본다. 나를 어느 범주에 넣고 뭉뚱그려 대할 때 나는 나를 스스로 외롭게 만드는 실수를 저지르는 거다. 어떤 범주 속 이름 없는 누군가가 아니라 단 한 사람, 유일한 나로 나를 대하고 그런 나로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 풀의 이름을 찾아보는 걸로 시작하자. 나는 나는 언제까지나 이렇게 작은 것에도 신나하고 궁금해하는 사람이고 싶다.


이 풀-아직은 이름을 다 모르니 미안하지만 그냥, 풀-을 자세히 살펴본 적은 많다. 이름을 몰라 그렇지 이제 제법 눈에 익은 풀도 있다. 풀마다 좋아하는 땅이 각기 다르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냉이는 주로 밭에 무리 지어 자란다. 길가에 있는 녀석들도 있지만 내가 냉이라도 기름지고 보드라운 밭에 자라고 싶을 것 같다. 냉이는 아직 밭에 무엇도 심기 전, 봄이 막 시작되면 자라나기 때문에 그 밭에 무엇을 심을지와 상관없이 아무 밭이라도 다 있다. 물론 양지바르고 보드라운 흙이 있는 곳에 더 많다. 달래는 주로 나무 그늘 아래쪽에 자란다. 이 녀석들은 살짝 습한 땅을 좋아하는 것 같다. 달래는 뿌리가 동글동글해서 캐다가 그만 흙 속에서 다 파 내지 못하고 끓어져 버리기도 하는데, 그렇게 남아있는 녀석들이 자기들끼리 뻗어나가서 그 자리 주변에 잔뜩 자리를 잡는다. 매년 비슷한 나무 그늘 아래 언제나 달래가 있다. 우리 집 주변에도 제법 많이 자라는데 내 게으름 때문에 아직 달래장 한번 만들어 먹지 못했다. 다음 산책 때는 봄볕이랑 달래를 캐봐야겠다. 봄볕이는 아직 달래를 보고 손짓을 하며 '파'라고 한다. 길쭉하고 초록색이기만 하면 그녀에게는 모두 파일뿐이다. 몇 년 살고 보니 각기 풀마다 좋아하는 땅이 있어서 매년 비슷한 자리에 비슷한 녀석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조금 더 지나면 어느 자리쯤에 하얀 민들레가 필 건지, 동글동글한 열매를 맺는 녀석은 어디를 좋아하고 길쭉길쭉한 녀석은 언제쯤 많아지는지 대략 예상이 된다. 이름을 몰라 그렇지, 이제는 익숙한 이웃들. 비슷한 모습으로 늘 같은 자리를 지키며 자기 몫의 생명을 살아내는 녀석들이 있기에 봄 들판은 잠깐 졸고 일어나면 온통 초록이 된다.


역병 때문에 사람들은 이동을 자제하고 서로 만나지 않으면서 일상이 많이 바뀌었지만 들에는 봄이 여전하고, 들에는 봄으로 아랑곳없다. 봄꽃이 만개하는 게 요즘 같은 시절에는 크나큰 유혹이 되지만, 사람들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방해한다고 꽃을 탓할 수는 없다. 셀프 자가격리를 크게 해치지 않는 선에서 나는 열심히 봄을 누려볼 생각이다. 굳이 사람을 찾아 나서지 않는다면 사람을 만나기가 오히려 힘든 곳에 산다는 게 이럴 때는 좋은 면도 있다. 봄볕이를 데리고 봄을 찾으러 다니는 산책길. 내년 봄에는 한 명 더 달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어지겠지. 본격적인 농사철이 돌아와 밭을 일구고 모종을 심는 시기가 오기 전에 이 역병이 물러가면 좋겠다. 봄볕이를 데리고 모종을 사러 5일장에 가고 싶은데, 요즘은 5일장마저 열리지 않는다. 당연하던 일상이 아쉬워지고 그리워지는 요즘. 나중에 모든 게 다시 돌아오게 된다고 해도 가끔 오늘의 그리움과 아쉬움을 기억하면서 일상을 더 소중히 여기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흘러가지만 사라지지 않는 소중한 것들을 순간순간 꼬옥 붙잡고 누릴 수 있는 우리가 되길.  


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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