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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우개연필 Apr 10. 2020

있는 힘껏

두 돌이 된 딸 봄볕이와의 하루

얼마 전 봄볕이의 두 번째 생일이 지났다.


식목일에 태어난 봄볕이는 요즘 한창 '아이야(아니야)'를 연발하며 말을 듣지 않는 꼬마다. 밖에만 나가면 손을 뿌리치고 제 갈 길로 달려가는 독립적인 아가씨이며 반찬만 먹고 밥은 잘 먹지 않을 때가 많아 속을 태우는 편식쟁이 어린이다. 하지만 동시에 백일이 갓 지난 제 동생이 울면 쪽쪽이(공갈젖꼭지)를 물려주며 얼굴을 쓰다듬어 주는 속 깊은 누나이며, 아빠가 현관문을 여는 소리만 들리면 달려 나가 "아빠"를 스무 번쯤 연발하여 아빠를 녹이는 애교쟁이 딸이다.


이 놀라운 생명체를 만난 지 벌써 2년이 꽉 차 가고 있다. 이 아이를 낳기 전에 나는 대체 뭘 하며 지냈을까 싶을 정도로 요즘의 내 하루는 온통 봄볕이와 약간의 첫눈이로 가득 차 있다. 둘째인 첫눈이가 더 어리니 손이 더 많이 갈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둘째는 발로 키운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될 만큼, 첫눈이는 그저 혼자 크고 있다. 요즘 한창 손이 많이 가는 건 누나인 봄볕이다. 그녀는 하루 종일 놀아달라, 밥을 달라, 간식을 달라, TV를 틀어라, 여기 앉아라 등등의 각종 요구 사항이 넘쳐나는 25개월짜리 상전인데 새나라의 어린이이기까지 해서 늘 집안 식구 중 가장 먼저 일어난다. 남편과 나는 '너 이러다 후회한다, 나중에는 자고 싶어도 못 자니 지금 실컷 자 둬라, 아침잠의 달콤함을 누려라.' 등등의 이야기를 해 주지만 봄볕이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그녀는 에너지가 넘쳐나고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늦잠을 잘 수가 없다. 일어나자마자 일단 엄마, 아빠 머리맡에 둔 휴대폰을 가져다가 몰래 이것저것 눌러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엄마가 일어나서 휴대폰을 가져가면 한바탕 생떼를 부린 뒤 유산균 사탕으로 겨우 진정시킨 마음을 다시 아침 맘마로 달군다. 토마토 달걀 볶음이 나오면 일단 토마토만 쏙 골라서 먹고 달걀을 다 남겨서 엄마의 심기를 건드리고 시리얼을 달라고 한 다음에 우유에 말아서 우유만 마시는 엣지있는 아침식사를 한다.


아침을 먹었으면 이제 한바탕 놀아볼 시간이다. 일단 장난감 통을 다 꺼내어 소꿉놀이 도구를 모조리 바닥에 늘어놓는다. 때로 통을 뒤집어서 장난감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촤르르 소리를 즐긴다. 통을 뒤집어 식탁으로 마련하고 토끼 인형 토토와 돼지인형 꿀꿀이를 앉혀 놓고 밥을 먹인다. 피망도 먹이고 수박도 먹이고 초밥도 먹인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나에게 달려와 냉장고 문을 두드리며 밀가루 반죽을 내놓으라고 한다. 그럼 나는 못 이기는 척 얼른 대령한다. 이 밀가루 반죽이면 20분 정도는 혼자 놀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얼른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할 수 있다. 반죽을 수제비처럼 뚝뚝 떼어서 냄비에 넣고 끓이는 건 언제나 등장하는 주요 메뉴지만 가장 좋아하는 건 꽃 모양과 별 모양 찍어내기 놀이다. 이 때는 엄마가 조수로 꼭 필요하기 때문에 밥을 먹고 있던 엄마가 끌려 들어오기 일쑤다. 그러니 봄볕이가 수제비를 끓이고 있을 때 어서 식사를 마무리해야 한다.


독상을 받은 토토. 커피와 핫케익으로 보아 브런치 메뉴인 듯.


한바탕 아침 소꿉놀이를 하고 난 후에는 산책을 갈 시간이다. 내복 바람에 점퍼를 꺼내 들고 현관 앞으로 엄마를 끌고 가면서 "바, 바, 핫띠 핫띠"라고 한다. 팔을 앞뒤로 흔들면서 말이다. 밖에 나가서 "하나 둘, 하나 둘"하면서 달려야 한다는 표현이다. 봄볕이는 어른들이 하는 말은 아주 사소한 것도 죄다 알아듣지만 아직 표현 능력은 그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손짓 발짓과 몇 안 되는 단어의 조합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표현하는데 이 수수께끼를 맞추기 위해서는 눈치가 빨라야 하는 것은 필수고 그보다 먼저 애초에 봄볕이와 보낸 시간이 많아야 가능하다. 그래서 주로 그녀의 통역관은 엄마인 나인데 나도 잘 못 알아듣는 말을 할 때, 그래서 자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얼마나 답답해하는지 모른다. 어서 봄볕이가 말을 능숙하게 해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으면 좋겠다 싶을 때가 많지만, 한편으로는 지금의 이 스무고개 같은 대화가 그리워질 것 같기도 하다. 서로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런저런 표정도 지어보고 손짓과 발짓도 해 보고 손을 잡아끌고 이리저리 다녀야 하는 이 대화가 말이다. 이 퀴즈를 맞추었을 때, 그래서 서로 통했을 때 느끼는 안도감과 쾌감을 다른 것으로도 대신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에게는 감추어져 있는 언어, 엄마나 아빠만 알 수 있는 그녀의 언어를 이해하며 느끼는 동지의식 같은 이 기분을 말이다. 나는 봄볕이가 말을 잘하게 되어도 가끔은 "몸으로 말해요" 게임을 해보자고 하고 싶다. 여전히 우리가 잘 통하는지, 여전히 봄볕이의 말을 내가 마음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지 궁금해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엄마도 내가 표정만 좀 변하면, 말투만 좀 달라지면 어디가 아픈지, 속이 상한지 금방 알아차리곤 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나 싶었는데, 이제 알겠다. 내가 말을 하지 못할 때부터 함께 수수께끼 같은 언어를 공유해온 그 내공이었다. 엄마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 말을 알아듣는 법을 아주 오래전부터 연마해온, 아직 말이 아닌 내 말을 알아듣기 위해 온 신경을 다 기울여 본 세상 유일한 사람이었다.


산책의 필수품, 삽과 그릇


봄볕이와 산책을 하고 돌아와서 점심을 먹는다. 점심을 먹을 때쯤이면 벌써 봄볕이는 졸려서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일찍 일어났기 때문이다. 잠투정을 하는 아이와 대결을 하듯 점심시간을 보내고 낮잠을 재운다. 마침 졸리던 봄볕이는 밤잠과 달리 순순히 누워서 수월하게 잠이 든다. 마침 첫눈이도 비슷한 시간에 잠이 들어주면 꿀 같은 한두 시간의 휴식시간이 주어진다. 이 시간 동안 해야 할 집안일이 많지만 주로 같이 낮잠을 자거나 커피를 마시며 쉬고 뒹굴거린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봄볕이의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냥 집안일이 하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그렇게 집안일은 늘 쌓여간다. 부지런히 한다고 해도 언제든 다 하지 못한 일은 남아있기 마련이니 쉬는 시간을 작정하고 가지지 않으면 평생 쉴 수 없을 거다. 매일매일 찾아오는 봄볕이의 낮잠시간은 직장인과 학생들의 점심시간보다 더 달다. 더 달다고 한 이유는 완벽히 보장되지는 않았기 때문이고 또 언제 끝날지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봄볕이가 자지 않는 날도 있고 겨우 30분쯤 자고 일어나는 날도 있고, 가장 중요한 건 이 낮잠은 곧 사라지게 될 거라는 점에서 그렇다. 아직은 낮잠을 자는 어린아이지만 곧 낮잠을 자지 않고도 하루를 살 수 있는 어엿한 어린이가 될 거라는 점에서 지금의 이 낮잠시간은 참 달디달다. 아, 이 낮잠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위기감이 날로 커지고 있다.


봄볕이는 낮잠에서 일어나면 부스스한 얼굴로 내 품으로 와서 안겨 머리를 비빈다. 한쪽 팔에는 토끼 인형 토토를 꼭 끌어안은 채. 토토를 끌어안고 비몽사몽 한 얼굴로 깨자마자 엄마 품을 찾은 아이를 꼭 안고 잘 잤냐고 인사를 하는 엄마를 상상해보시라. 이보다 더 사랑스러운 광경이 있을 수가 없다. 이 순간 아이가 나에게 주는 행복감은 이전 반나절 동안 나에게 울고 불고 떼를 써서 생겨난 피로감을 씻어줄 만큼이나 크다. 그렇게 내 피로감을 다 씻어놓고 나서 아이는 다시 맘 놓고 떼를 쓰는 거다. 그렇게 우리의 두 번째 하루가 시작된다.


간식을 먹고 나서 인형들과 좀 놀고 책을 뒤적이던 봄볕이는 또 "핫띠 핫띠" 한다. 밖에 나가는 것만큼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는 놀이는 없다. 책을 읽어주거나 소꿉놀이를 하거나 병원놀이를 하거나 간식을 먹거나, 하여튼 무엇을 하든지 단연 최고는 산책이다. 울다가도 밖에 나가자고 하면 뚝 그치고 양말을 신겨달라고 얌전히 앉아 있는다. 이러니 하루도 나가지 않을 수 없다. 코로나와 추위 때문에 한동안 집 앞도 나가지 않았는데 이제는 도저히 안 되겠어서 요즘은 다시 나가고 있다. 마당이 있고 밭도 있어서 외부인을 마주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산책을 할 수 있다는 점이, 그렇게 인적이 드문 곳에 살고 있다는 점이 이토록 좋은 건 줄 몰랐다. 이 산책의 유일한 단점은 끝내기가 무척 어렵다는 점이다. 산책을 나갈 때 봄볕이는 너무나 신이 나지만, 그녀를 데리고 집에 오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 나는 더욱더 지치곤 한다. 그녀는 나가자는 말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강도로 들어가자는 말을 정말 싫어한다. 그래서 한 시간을 넘게 돌아다녀도 성에 차지 않는 봄볕이의 산책은 대부분 울음으로 끝이 난다. 한도 끝도 없이 밖에서 놀 수도 없는 노릇인데 이렇게 울어재끼니 산책을 나가자고 하려면 이 울음을 각오해야 한다. 그나마 봄볕이의 울음을 달랠 수 있는 건 딸기다. 딸기를 먹으러 들어가자고 하면 순순히 따라 들어올 때가 있다. 물론 통하지 않을 때도 많지만, 딸기로 해결되지 않는 일은 그 무엇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집에 가기 싫은 봄볕이, 절하는 거 아니고 떼쓰는 중


울음으로 산책을 마무리하고 딸기를 얻어낸 후에는 뽀로로와 즐거운 시간을 가진다. 봄볕이가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나비의 숲"이라는 이야기이다. 뽀로로와 크롱이 작아져서 나비를 타고 날아다니기도 하고 꽃이 주는 꿀을 먹기도 하고 거미에게 쫓겨 도망을 가기도 하는데 바로 여기가 이 에피소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이 장면에서 봄볕이는 뽀로로가 되어 온 집안을 뛰어다니며 도망을 친다. 마치 정말 거미가 쫒아오기라도 한다는 듯이 소리를 지르면서 도망을 간다. 콩순이 만화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는데 이번엔 콩순이가 개미에게 쫓긴다. 그 장면이 나와도 영락없이 온 집안을 뛰어다니면서 도망을 친다. TV를 보면서 등장인물의 상황에 공감하기도 하고 표정을 따라 짓고, 춤을 추면 같이 춤을 추기도 하는 아이를 보고 있으면 TV보다 훨씬 재미있다. 가끔 이 재미를 오래 누리고 싶어서 내가 카메라를 들이대면 봄볕이는 카메라를 의식하고 곧 멈추고 만다. 가장 남겨두고 싶고 저장해 놓고 싶은 장면들은 내 기억 속에만 담아둘 수 있다. 어쩌면 그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요즘 카메라보다 내 눈에 오래 담는 걸 택할 때가 많다. 이 순간은 흘러가지만 사라지지는 않을 테니까.   


저녁을 먹고 나서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히고 청소를 하고 잠잘 준비를 하는 시간은 하루 중에서 가장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몸에 피로가 쌓여있어서 그렇기도 하고 피곤해진 봄볕이가 말을 잘 안 듣는 시간이기도 해서 그렇다. 옷을 입자고 하면 도망을 가고 누워서 다리를 하늘로 쳐들고 발버둥을 치면서 반항을 한다. 자기 딴에는 놀자고 하는 것 같은데, 놀이로 받아주지 못하는 피곤한 엄마는 이 아이가 언제 커서 혼자 씻고 옷 입고 혼자 자려나 혼잣말만 한다. 아직은 그런 날이 올까 싶다. 그런 날이 정말 오기는 하는 걸까.


봄볕이는 잘 때 필요한 게 있다. 먼저 토끼 인형 토토가 꼭 있어야 한다. 토토의 귀를 자기 볼에 비비거나 손으로 토토 팔을 쓰다듬으면서 잠을 청하는데 그 모습은 볼 때마다 참 사랑스럽다. 그리고 요즘은 아빠가 사 준 별빛 취침등이 있어야 한다. 봄이가 자는 곳은 범퍼침대 위에 인디언 텐트를 쳐 놓은 곳인데 그 텐트 속에 들어가서 별빛 등을 켜 놓고 토토를 끌어안고 잔다. 요즘 봄볕이를 재우기 위한 방법으로 아빠가 발마사지를 하기 시작했다. 다리를 주물러 주고 발 마사지를 해 주면 그게 좋아서 누워 있다가 스르르 잠이 드는 방법인데 나도 종종 애용한다. 봄볕이와 첫눈이를 다 재우고 나면 9시가 넘은 시간이다. 그제야 남편과 나는 한숨을 돌리고 같이 야식을 먹거나 각자의 방법으로 쉼을 누린다. 가끔 봄볕이와 첫눈이가 자는 방을 들여다보고 이불을 덮어주면서.


봄볕이는 지금 자고 있다. 오늘도 긴 하루, 꽉 찬 하루가 지나갔다. 내일도 아마 빈틈없이 봄볕이와 첫눈이로 가득한 하루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다. 가끔 이 꽉 참이 버겁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나는 알고 있다. 분명히 나는 오늘 내 하루를 가득 채운 아이들의 아기 냄새와 웃음소리와 나를 하루 종일 끌고 다는 그 보들보들한 손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반드시 그리워하게 될 오늘을 나는 충분히 누리며 살았을까. 내일은 봄볕이의 손을 한번 더 잡아 주고 첫눈이와 한번 더 눈을 마주쳐 주어야겠다. 힘들다고 투정 부릴 때는 부리더라도, 오늘 주어진 행복을 꼭 끌어안아줘야겠다. 있는 힘껏 안아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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