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덩이가 주도한 미래

출퇴근 거리를 무시하지 마라!

by 크리스틴

'머리에 살짝 열이 있기도 하네. 오늘 아플까?... 이렇게 출근해서 내가 하는 일은 고작…'


지하철 2호선, 앞사람의 등과 옆 사람의 머리카락 사이에서 내 공간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다. 살짝 식은땀이 맺히는 출근길에서 잡생각에 빠진다.




코로나19는 현대 직장인의 출퇴근 지도를 순식간에 바꿔놓았다. 재택근무가 프리랜서의 전유물로 보이던 시절이 있었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몇몇 스타트업은 재택근무를 사내 복지로 내세우기도 했다. 그만큼 적당한 출퇴근 거리는 직장인에게 연봉만큼 중요한 부분이다.


지하철을 환승하고 버스를 타고 도보 몇 분을 걸어서 회사에 도착하면 이미 체력의 3분의 1이 방전되어 하루를 시작한다. 특히, 9시부터 6시까지 근무하는 회사라면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다. 한참 자율출근제와 유연근무제 등을 시행하는 회사가 많이 생기던 시점이라 출근 시간이 분산되었지만 붐비는 건 여전하다.



지하철에서 빈자리를 보기는 쉽지 않다. 종점 근처에서 타거나 이른 시간에 출근하지 않는 이상, 제대로 서서 갈 수만 있어도 다행이다. 종종 내 앞에 앉아있던 승객이 내리기도 한다. 이때 바로 앞에 서있는 사람에게 암묵적인 자리 권한이 주어진다. 옆에 서 있던 사람의 아쉬운 시선이 잠시 빈자리에 꽂힌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는 순간부터 출근길은 좀 살만해진다. 목적지에 가까워지는 게 아쉬울 정도다.


그 아쉬움에 어느 날은 출근을 제꼈다. 회사는 2호선으로 환승하여 노선의 반 바퀴를 돌아야 도착하는 곳에 있었다. 9시의 출근 지옥을 맛보던 어느 날, 입사한 지 3일 남짓 된 신입은 그만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쳐버렸다. 추운 겨울날 뜨끈하게 열이 올라오는 자리에서 더 쉬고 싶은 유혹 때문인지, 졸다가 역을 지나쳤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날따라 놀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정차했던 지하철이 출발했지만 자석처럼 달라붙은 엉덩이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끊어졌다.


엉덩이의 사소한 실수로 시작된 일은 점점 더 커다란 사건으로 불어난다. 이 회사에 출근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 글쎄, 잘 모르겠다. 일단 집에서 너무 멀다. 체력이 약한 몸뚱이로 1시간 반을 서서 간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가혹한 일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세수를 할 때만 해도 회사를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반대로 회사를 다녀야겠다는 생각도 없는 건 마찬가지다.


그만두어야 할 마땅한 이유를 찾아본다. 예상보다 너무 쉽게 찾았다. 하나, 두울, 셋... 이 정도라면 그만두는 게 맞다는 결론을 내린다.


고뇌와 자책뿐인 마음에 강 같은 평화가 밀려든다. 설렘을 거쳐 환희에 다다른다. 무거운 마음은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백수 친구에게 슬며시 문자를 넣어본다. 아니나 다를까, 같이 놀 사람이 생겨서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어디로 튈지 모르고 대책도 없고 목표도 없던 스물다섯 살짜리 신입은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일어난다. 무겁던 엉덩이는 온데간데없이 친구를 만나러 다음 역에서 내린다.



오래전, 철없는 신입이 실제로 저지른 일이다. 당연히 그 신입은 바로 나다. 길고 피곤한 출퇴근에서 시작된 하나의 일탈 스토리다. 물론 세상에는 힘든 출퇴근을 하며 열심히 경력을 쌓아가는 신입이 더 많다.


나는 입사할 목적으로 나를 어필하는 방법을 갈고닦았을 뿐, 그 이후의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목표가 없는 삶이란 이렇게 무섭다.


엉덩이가 내 미래를 좌지우지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려면
목표는 반드시 세워야 한다.
그 목표가 머지않아 곧 바뀐다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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