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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틴 Jan 21. 2021

회사 업무를 즐긴 적이 있는가?

두려움에서 익숙함을 거쳐 지루함이 오기까지

"나는 회사에서 했던 업무를 진정으로 즐긴 적이 있었던가?"

요즘 읽고 있는 책이 내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답은 쉽게 나왔다. 솔직히 나는 숨이 턱에 차 있었다. 쉽고 편한 작업이 아닌 이상 언제나 부담스러웠고 잘 해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렸다. 뭘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고 일감이 생기면 두려움이 앞섰다. 그 와중에도 잘하고 싶은 욕심은 커서 전임자나 동료의 결과물을 보고 나는 저렇게 하지 못할까 봐 초조했다. 이런 업무는 이렇게 처리해야 한다고 배운 적이 없으니 눈치와 경험과 벤치마킹에 의존해왔다.


어느 회사든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최대의 목표다. 말이 되고 타당하면서 어떤 주장을 품고 있는 결과물이면 더욱 좋을 테지. 여기에서 '어떤 주장'이란 오로지 내 주장뿐일 수는 없었다. 회의 때 듣는 얘기, 대표가 원하는 방향, 팀장의 의견과 일치하는 쪽에 내 의견 한 줄을 고명처럼 얹는 정도다.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몰랐다는 건 어찌 보면 내가 참고할 어떤 의견 소스도 없다는 말과도 같다. 오로지 내 주장을 펼치기엔 나는 부족하다고 여겼고 자신이 없었으며 내 의견에 따라붙을 피드백이 두려웠다. 그렇게 소스형 작업자로 길들여졌음을 느꼈지만 어차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자신을 위로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잘 알아듣고 빠르게 작업해서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팀장에게 대표에게 그들이 원한 비전을 빠르게 문서로 작성해서 보여주기로 했다.


마침, 서비스 기획 실무자로서 내 장점이자 무기는 '몰입하면 빠르게 진도를 나갈 수 있다'는 거였다. 전체적인 구조를 짜고 각 단계별 프로세스를 만들고 나서 디테일 한 부분을 하나씩 그려나간다. 세부 정책 등은 진행하면서 현실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는 부분이라 우선순위를 뒤로 미룬다.

발동이 걸리면 화장실도 참으면서 하나를 마무리할 때까지 몇 시간이고 작업에 집중한다. 이 과정에서 순간순간 '내가 이걸 즐기고 있구나' 여겼다. 틀을 잡고 나서 뭔가를 만들어 가는 것. 완성할 때까지 달리는 것. 완성된 결과물을 보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결과물이 나온 후엔 누군가의 개입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기획 초반부터 의견을 충분히 수용했고 이런 방향을 알려준 건 업무를 지시한 그들이었으니까. 물론 내가 받아들이기 싫다고 안 할 순 없으니 대부분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작업을 빠르게 진행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이유는 그들의 의견이 초반과 달라질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더 좋은 것 더 나은 것을 보고 오면 그렇게 따라 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작업을 빨리 끝내면 나는 그만큼 재빠른 유능한 직원이 되고, 작업 완료 후에 수정을 요청한다는 그 자체로 자신들이 의견을 바꾸었다는 걸 인지하게 만들 수 있었다. 작업 요령이 늘수록 일을 쳐내는 속도는 더 빨라졌고 바쁜 와중에 칼퇴를 누렸다. 어쩌면 소스형 작업자로 일하면서 이런 게임을 즐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에 단점도 분명 존재한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프로젝트라면 몇 번이든 뒤집을 수 있고, 그 말인즉슨 나도 처음부터 다시 몇 번이고 작업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물론 이렇게 여유를 주며 일을 시키는 곳은 없었다는 게 다행이자 안타까운 현실이다. 열이면 열 모두 내가 빠르게 끝낸 걸 흡족해했고 서둘러 다음 프로젝트를 맡기기에 바빴으니까.


어느 대표는 공식적 프로젝트가 끝나기도 전에 자신의 개인 프로젝트를 의뢰하기도 했다. 동시에 진행하지만 당연히 마감은 둘 다 차질이 없기를 바란다는 멘트와 함께.


주제로 돌아가서, 숨이 턱에 차고 불안했던 시간을 지나 익숙함이 배어들자 업무를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던 것 같다. 하지만 즐기게 되면 머지않아 지루함이 그림자처럼 따라붙기 마련이다. 필연적인 지루함과 권태로움을 어떻게 현명하게 극복할 것인가? 각자에게 남겨진 또 다른 과제이다.


지루함과 권태로움은 자신이 성장했다는 증거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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