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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틴 Jan 14. 2021

60만 원을 벌어줬던 5분

즉각적인 반응을 자제하라

집주인에게서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다음 달부터 월세를 5만 원 올리고 싶다는 내용이다. 벌써 재계약을 할 시점이구나. 돌아보니 1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이 집을 계약할 당시에 부동산에서 인사했던 집주인은 얼마 후 집을 팔았고 나는 새 주인을 만났다. 주인이 바뀌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집 여기저기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더운 여름밤, 선풍기가 갑자기 멈췄다. 애꿎은 선풍기만 탓했는데, 한쪽 전기배선이 노후되어 일을 냈다는 걸 알았다. 집주인에게 연락하고 전기공사를 하느라 아까운 주말 반나절이 날아갔다.

- 그래도 출근 안 하는 주말이라 바로 처리할 수 있어서 다행이지.


쌀쌀한 가을에 접어들자, 이번엔 보일러가 또 말썽을 일으켰다. 보일러 온도 조절기에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온도 조절기는 며칠간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하더니 금세 숨을 거두고 말았다. 보일러 기사님의 손길에 곧 회복할 수 있었다.

- 그래도 추운 겨울이 아니라서 다행이지.


이게 끝이 아니다. 해가 바뀌고 싱크대 쪽 위의 전등이 소리를 질렀다. 깜빡깜빡 비명을 지르더니 이내 꺼진다. 집에 오면 늘 이 등만 켰는데 내가 너무 혹사시킨 걸까 잠시 반성을 한다. 새 등을 끼워봐도 켜지지 않는다. 관리실 아저씨에게 도움을 청해보니  형광등 안정기에 문제가 생겼다고 사람을 부르라고 한다.

이젠 뭐 놀랍지도 않다. 집주인에게 문자로 간단히 상황을 알렸다. 이미 안면이 생긴 전기 아저씨에게도 연락한다. (지난 브런치 글에도 썼듯이) 형광등 대신 LED 등이 생겼고 덕분에 방은 훨씬 더 밝아졌다. 비용처리를 위해 집주인에게 문자로 영수증을 보낸다. 즉시 수리비용이 입금되었다.

- 그래도 이전보다 더 밝아져서 다행이지.


혼자 사는데 필요한 생활 지식이 +3점 향상되었다. 내 방에 들어오는 전기는 배선이 여러 개 일 수 있고 두꺼비집에 따라 전류 허용치가 다르다는 걸 알았다. 보일러는 보일러 플러그에 다른 전자제품을 꽂아보고 전기 공급에 이상이 있는지를 살펴본다. 주말엔 출장비가 조금 더 비싸다는 것도 알았다. 형광등은 전구가 아니라 안정기라는 부품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도.


보일러가 문제를 일으켰을 땐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는 게 낫겠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형광등을 고친 뒤부터는 이사할 생각을 접었다. 이사를 갔다가 또 어딘가를 수리할 타이밍과 만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집에서 고장 날 만한 곳은 모조리 고쳤으니 더 문제가 생길 확률은 작다. 이사 온 날과 비교해보니 달라진 것들이 보인다. 두꺼운 전기 선이 벽 모서리를 타고 최대한 몸을 숨긴 채 바닥으로 이어져있다. 지하철 역사 안에 사용되는 LED 등이 내 방 안에도 생겼다.


다행이라고 다독거리며 미운 정이 쌓일 무렵, 집주인이 내게 월세를 올리고 싶다는 연락을 해 온 것이다. 이로서 새로운 고난을 맞닥뜨렸다. 순간,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고 머리는 무거워진다. 그동안 이 집을 고쳐 살면서 얼마나 번거로웠는데!


휴대폰 자판을 힘주어 눌렀다가 다시 지우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5분을 훌쩍 넘겼다.

코로나로 힘든 시국이니 월세를 반만 내라는 건물주도 있다는데. 원망이 한가득이지만 격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도록 최대한 문장을 다듬는다. 딱딱한 사무적인 말투로 썼다가 지우고 물결(~)과 모음(ㅠ)을 적절히 섞어서 양해를 구하는 답장을 보냈다. 내 마음속에서 귀여운 물결은 집채만 한 파도를 치며 이 방을 집어삼켰다.


곧 회신이 왔다. 내년부터 올리겠다고 한다. 파도가 어느새 발목에서 찰랑거린다. 다행히 앞으로 1년 동안은 현재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마음속 뜨거운 순간이 있었지만 연출된 문자 하나로 당분간은 거친 숨을 쉬지 않아도 된다. 5만 원씩 12개월이면 60만 원을 낼뻔한 셈이다. 무겁던 머리가 스르르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나를 시험해 들게 한 사람은 집주인이었지만 이런 시험은 여러 관계에서 다각도로 찾아온다. 가까운 가족, 친구, 회사 동료, 직속 상사 등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욱해서 맞받아치는 순간을 잘 넘길 수 있다면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많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어떤 격한 상황에서도 즉각적인 반응을 자제하라!
최소 5분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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