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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틴 Jul 02. 2021

소속이 없다는 것

믿을 건 오로지 짬밥이다

2001년의 봄, 토익시험을 준비하려고 종로의 한 어학원을 찾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니 대학원 입학을 취소한 직후였다. 그때의 나는 진학이 아니면 사회로 나가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사회에 발을 내딛기 위해 남들이 모두 준비한다는 토익을 떠올렸다. 스펙 경쟁이 지금보단 덜했던 시절이지만, 이력서에 채울 ‘증’ 한두 개쯤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건 비슷했다.


졸업하기 전에 정보처리기사 자격증을 땄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했다. 성적이나 영어 실력과는 관계없이 이력서에 토익 점수를 적어내기로 결심했다. 어학원에서 수강 신청서의 항목을 하나씩 적어 내려 가던 중에 손이 멈췄다. 순간 뭐라고 채워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직도 하얀 A4 용지에 빈 공란이 생각난다. 소속을 적는 칸에서 한참을 멈춰있었다. 학생? 직장인? 또 뭐가 있더라? 백수?


학생과 직장인 사이의 그 어딘가. 지금은 ‘취업준비생, 취준생’이라는 말이 있지만 당시엔 나의 위치를 정확하게 짚어 줄 단어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았다. 그렇게 인생에서 처음으로 백수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어떻게 적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무직’으로 흐릿하게 적었던 기억이 난다.


백수와 무직. 내 위치에 아무런 감정이 없었는데 당시에도 이 두 가지 단어가 죄책감을 가져다줬다. 소속이 없다는 건 대한민국 사회에서 내 존재를 증명하지 못한다는 말로 느껴졌다. 그렇다면 나라는 사람은 불필요한 존재인가- 자문했다. 다음 날 친구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친구는 자기 일처럼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진지한 눈빛으로 공감해주었다. 본인도 영어학원에 등록하려고 했는데 소속에 그렇게 적겠노라 덧붙였다.


요즘은 무소속이면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사람들이 많다. 여러 군데에 한 발씩 걸치고 디지털 노마드의 삶을 살기도 한다. 소속되지 않아도 스스로 브랜드가 되어 숨은 재능을 펼칠 수 있다. 20년 전엔 어느 집단에 속하지 못한다는 자체로도 엄청난 공포였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도 무서웠을까?


소속은 존재를 의미하지 않지만 당시의 나에게 소속감은 존재감이나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소속은 껍데기고 존재는 알맹이에 가깝다. 어렸던 나는 내 존재를 나 자신에게 증명할 수 없었다. 무리 속에서 장학금을 받고 동호회에서 보직을 맡는 등 비교 우위와 특정 역할이 필요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나의 현주소를 인지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새 20년이 지났다. 엄밀히 따져보면 나는 이 순간도 무직이자 백수다. 이제는 자발적으로 은퇴를 했고 쇼핑몰을 시작했다는 사실만 다르다. 쇼핑몰은 좀처럼 수익이 나지 않아 사업자 등록을 미루고 있기 때문에 공식적으론 사업자의 위치도 아니다. 하지만 20년 전보다 훨씬 이 '무소속 백수'의 삶을 즐기고 있다.


그렇다고 지금이 그때보다 더 나은 상황도 아니다. 오히려 없던 빚이 생겼고 무직자가 되면서 금액이 매년 불어나고 있다. 과거에 어떤 회사를 들어갈지, 어떤 일이 적성에 맞을지 고민하던 것과 비슷하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한다. 더 어렵고 치열해진 경쟁 속에서 소속에 기대지 않고 온전히 바로 설 수 있는 포지션은 무엇일까 고민한다.


그래도 20년 가까이 일했던 IT 경험, 여러 활동으로 체득한 지식과 인간관계들, 삶의 역경을 헤쳐 지금까지 용케 살아온 나 자신. 힘든 상황 속에서 믿을 건 오로지 짬밥이다. 과거의 내게는 없던 짬밥과 적당한 자신감, 적당한 두려움, 적당한 여유가 생겼다. 인생이 뭐 별건가? 자신감과 두려움의 밸런스를 맞추면서 하늘에 떠있는 구름 한 점을 바라볼 여유를 가지는 것. 그렇게 오늘 하루를 충만하게 보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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