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 고통스럽지만 행복했던 세번의 계절
8번의 선항암과 왼쪽가슴의 전절제 및 복원, 25번의 방사선 치료까지..
23년 1월부터 시작한 표준치료가 무수한 이벤트를 거치며, 10월말로 끝이 났다.
그리고 나는 현재 타목시펜 복용과 함께 루프린 주사를 맞으며
3~6개월마다 본원과 지역병원을 드나들며 추적관찰 중이다.
독한 항암은 머리카락과 함께 내게서 의욕과 의지를 앗아갓고,
기나긴 수술은 내 가슴에 날카로운 상처와 함께 묵직한 이물을 남겼으며,
약 10개월 가량의 치료기간 동안 체중은 10kg 가까이 빠져나갔다.
그렇게 아이들을 친정엄마와 동생에게 맡겨둔 채 온전히 나 자신에게 집중했다.
그 시간만큼은, 내 아픔과 고통, 치유가 우선이었다.
낯선 살림에 적응하느라, 뒤늦게 육아를 전담하느라, 아픈 딸의 컨디션과
주말마다 일터에서 돌아오는 사위의 식탁을 신경쓰며.. 엄마는 다시 희생했다.
그리고 그런 엄마가 걱정되어 곁을 지키는 동생도, 일년 가까운 시간을
나와 우리 아이들에게 헌신했다. 이들이 있었기에, 난 항암을 버틸 수 있었다.
떨어지는 호중구와 혈압, 느닷없는 고열과 구역감으로 일주일을 누워있다가..
컨디션이 조금 돌아오면 엄마, 동생과 함께하는 식사와 산책, 시답잖은 농담이 유일한 기쁨이었다.
내 몸이 너무나 낡고 닳아 있었기에, 당시의 나는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도, 신랑이 건네는
위로도, 내 곁에서 지쳐가는 엄마와 동생의 마음도 가늠할 수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겨우, 먹고 쉬고 잠들 수 있음에 안도하고 감사해야 했다.
그런데, 이제 와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 주변에는 시기질투보다 이해배려가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내가 사는 세상은 아직 절망보다 희망이 더 많은 곳이었다.
속절없이 빠지는 머리카락과 두통을 감당할 수 없어 찾아갔던 바버샵 사장님은
행여 두피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한시간 넘게 정성껏 쉐이빙을 해주셨고,
일곱살 딸아이에게 미리 엄마의 병과 치료과정을 설명해두었지만..
막상 민머리의 엄마를 마주하니 눈물부터 쏟아내던 아이에게,
유치원 선생님은 머리짧은 여가수와 긴머리의 남자를 보여주며
머리카락보다 중요한 건 그 사람 안에 담긴 마음이라고 다독여주셨다.
평소 인사만 간단히 하고 지나던 이웃이 어느날 나를 보고 말없이 안아주던 일,
애써 준비한 딸아이의 생일파티 당일, 호중구 수치가 500도 안되는 바람에
외출을 할수 없어 너무나 속상했는데.. 친구 엄마들의 도움으로 아이에게
즐거운 시간과 함께 환하게 웃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었던 일.
가족은 물론.. 이웃, 때로는 스치는 타인에게서도 호의와 위로를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따뜻했고, 세상은 아직 살만했다.
그래, 23년은 내게, 고통스럽지만은 않았다.
육아에 지쳐 보이지 않던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미소와
집안의 가장으로 쉼없이 달려 온 신랑의 쓸쓸한 뒷모습을 발견하고..
어느덧 일흔을 바라보는 친정엄마의 건강을 염려하며,
묵묵히 언니를 위해 안팎으로 애써주는 동생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된 것.
내 나이 마은 세살의 한 해는, 지난 십수년의 여러 해보다
더 의미있고 가치있는 시간이었다. 감았던 눈을 뜨고 내 세상을 다시 보았고,
닫았던 마음을 열어 나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남은 생을 어떻게 살고 싶은지,
나와 주변인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인생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둘 것인지..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하며, 세 번의 계절을 소중하고 감사하게 보냈다.
그러자, 내 안의 미움과 원망이 사그러들고
평화와 안식이 찾아왔다. 가족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고,
내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지, 새로운 삶의 방향을 어디로 할 것인지
되새기는 기회였다. 그렇다. 암은 내게 끝이 아닌, 시작을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