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을 추억하며
올림픽 공원엔 장미 축제가 한창이었다. 자리를 잡기 위해 걸은 지 몇 분이 되었을까,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겨우 그늘에 돗자리를 깔고, 한층 더워진 공기를 느꼈다. ‘아, 이제 진짜 여름이구나.’ 시간은 성실히 흘러 또 다른 계절을 가져다주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그 계절 한가운데 있었다. “뭘 했다고 벌써 유월이냐.” “올여름은 또 얼마나 더울까.” 다시 찾아온 여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느린 한낮을 보냈다.
바람이 조금씩 서늘해질 때쯤, 돗자리를 접고 을지로에 갔다. 만선호프의 시원한 맥주 한잔이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을지로에 가게 된 겸 방 한편에 묵혀 두었던 필름을 맡기기로 했다. 스캔 유목민인 나에게 주변의 수많은 필름러버들이 추천해준 망우삼림에 가보기로 했다. 범상치 않은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던 곳. 가격은 한 롤에 3000원으로 착한 편이었다. 필름을 맡기고는 곧바로 만선호프로 향했다. 열대야가 오기 전에 부지런히 선선한 여름밤을 즐겨야 했다.
노가리에 시원한 맥주를 한 잔 하고, 청계천을 거닐었다. 반팔을 입고, 프라푸치노를 먹어도 하나도 안 춥다니, 다시 한번 여름임을 실감하면서 선선한 밤을 오래도록 즐겼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더위에 지친 몸을 씻어내고, 방에 드러누운 지 얼마나 되었을까, 웹하드에 사진이 올라왔다는 알람이 울렸다. “벌써?” 설레는 마음으로 사진을 내려받았다.
여름이 다 돼서야 받아본 지난봄의 추억들. 사진 속에는 목련, 벚꽃, 유채꽃이 잔뜩 펴 봄내음이 가득했다. 돌담길에서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던 순간, 진분홍 진달래가 핀 석촌호수에서 친구들과 돌아가며 사진을 찍어주던 순간, 지천이 온통 노랬던 유채꽃밭에서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들떴던 순간. 지난봄의 순간들이 생생해졌다.
룸메와 한참 동안 필름 사진을 들여다보며 지난 계절의 추억을 곱씹었다. 이 사진들은 아까 낮에 나는 대체 유월이 되도록 뭘 한 걸까, 한탄했던 것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봄이라는 계절을 만끽하며 추억을 쌓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지난 시간을 잘 보낸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냥 지나가버렸다고 생각했던 과거에 소중한 의미가 생겼다.
사진이 어떻게 나오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하고, 결과물을 받아보는 데까지 꽤나 큰 수고로움이 들어도 필름카메라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생각지도 못한 모습으로 담겨있는 과거의 순간들, 그리고 그 속에서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 사람들을 볼 때면 그래도 잘 지내왔구나, 하고 위안을 얻는다.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보내준 소중한 선물. 미루고 미루다 결국 계절이 바뀌고 나서야 필름을 맡긴 게으름이 큰 몫을 했다. 게을러도 좋으니, 꾸준히 남기고 필름 생활을 통한 소소한 행복을 오래도록 느끼고 싶다.
올여름은 또 어떤 모습으로 남겨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