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혀님 May 12. 2018

거짓말로 쌓은 기적

British Sea Power의 [아란의 남자]

로버트 플래허티의 [아란의 남자]. 플래허티 작품 가운데 [북극의 나누크]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그것 못지않게 논쟁적인 기록영화다. [아란의 남자]는 베니스 영화제 역사상 첫 수상작이기도 하다. (1회 베니스 영화제에는 경쟁부문이 따로 없었고 2회부터 자국과 외국 영화 한 편씩에 '무솔리니 컵'을 수여했다. 황금사자상의 전신이다.) 영화 내용은 북극의 거친 자연에 맞서 삶을 일구는 나누크 가족의 투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일랜드 서부 아란 제도에 사는 '아란의 남자', 그의 아내와 아들이 거센 바다와 척박한 토양을 견뎌내는 삶의 필연을 카메라에 담았다.


'아란의 남자'와 아들 | Man of Aran

[북극의 나누크]와 다른 점은 토키 영화라는 점이다. 토키 영화가 발명된 이후인 1934년 공개됐다. 하지만 이 영화가 본질적으로 토키 영화인지는 애매하다. 영화에 음향이 삽입됐는지 여부와는 다른 문제다. 영화는 마치 무성영화처럼 간자막을 통해 상황을 설명한다. 등장인물의 육성 역시 가족 간 대화 위주로 엉성하게 더빙된 영어와 아일랜드 게일어가 뒤섞여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다. 뜸하게 나오는 대화에 귀기울이는 것이 무의미하다. 영화는 종종 무성영화로 잘못 소개되기도 하는데 사실 소리를 끄고 봐도 영화에 대한 이해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British Sea Power(이하 BSP)의 사운드트랙 실험이 재미난 이유다. 2009년 발표한, 영화 제목과 동명의 앨범은 무성영화로서의 [아란의 남자]를 상상한다. 앨범의 목적은 영화의 음향 대신 사운드트랙처럼 틀기 위함이다. 무성영화의 연주상영과 비슷한 경험을 의도한다. 앨범 길이도 영화 러닝타임과 같은 73분이다. 영화는 무성영화가 아니지만 BSP의 사운드트랙을 통해 무성영화가 된다. 영화를 받아들이는 데는 여전히 무리가 없다.


British Sea Power - The North Sound


BSP는 인스트루멘탈 밴드가 아니지만 유사-무성영화의 사운드트랙이다 보니 대부분 곡에 보컬이 없다. 커버곡인 Come Wander with Me에 유일하게 보컬 트랙이 나올 뿐이다. 조악한 더빙이 사라진 자리를 채우는 포스트록 넘버들은 꽤 극적으로 영상과 맞아떨어진다. 현악의 웅장한 노이즈가 거친 파도와 폭풍우 소리를 어색하지 않게 대체한다.


하지만 이 앨범은 절대 영화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이 될 수 없다. 이미 세상을 떠난 플래허티의 승인이 없는 한 그럴 것이다. 영국의 음악 비평 웹진인 The Quietus는 이 앨범을 두고 "흉내내기의 흉내내기다. 19세기 생활방식을 다룬 20세기 영화를 보완하려는 21세기의 시도다"라고 평했다.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의 흉내이기도 하다. 아일랜드 서부의 삶을 그린 미국인 감독의 영화 사운드트랙을 지극히 영국적인 영국 밴드가 재구성한 것이므로.


British Sea Power - Man of Aran


영화도, 음악도 허구다. 영화의 후반부는 허구의 클라이맥스다. 아란 제도의 주민들은 희곡 '바다로 가는 기사들'의 한 장면처럼 장엄하게 바다로 돌진해 상어를 사냥한다. 이후 주인공의 모자는 바다의 보복처럼 다가온 거친 파고에 갇힌 상어 사냥꾼들을 발견한다. 그들의 아버지다. 이들이 배가 뒤집히는 우여곡절 끝에 극적으로 구출된 뒤 파랑은 도리어 더욱 거세진다. 생사의 순간을 지난 '아란의 남자'가 먼 곳을 응시하는 클로즈업 샷은 이내 똑같은 곳을 응시하는 아들의 클로즈업 샷으로 전환된다. 자연과 맞서야 하는 운명이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질 것을 암시한다.


마지막 시퀀스 | Man of Aran

하지만 영화가 촬영된 당시 아란 제도에는 이미 상어 사냥 풍습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위협하던 것은 바다가 아니라 가난이었다고 한다. 푸티지가 아닌 픽션. 작살을 든 아들, 아들을 대열의 전방에 세운 아버지, 남성성의 조력자로 뒤따르는 어머니의 실루엣. 연출된 숭고미는 살금살금 고조돼 가다 이 장면에서 절정을 맞는다. BSP는 플래허티의 거짓말을 보조한다. 포스트록 특유의, 절제하되 축적되는 긴장과 한순간 휘몰아치는 노이즈가 거짓말의 기적을 더한다. 순간 기타줄이 끊어질듯 뒤틀린다. 지이이이잉-


몇 년 전에 영화를 처음 본 뒤 아란 제도를 여행한 적이 있다. 관광지가 다 된 한편 자연은 사뭇 몰인정하고 본토 사람들이 잊은 지 오래인 아일랜드 게일어를 고집하는 곳. 그것도 허상이었을까. 거짓말 같기만 하던 플래허티의, BSP의 [아란의 남자]가 뜻밖에도 여전히 잘 어울리는 섬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후진 음악이 38선을 지울 것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