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혀님 May 10. 2018

후진 음악이 38선을 지울 것이다

데이빗 보위부터 디페시 모드까지, 음악의 줄탁동시

flickr@anteldaniel https://flic.kr/p/5rknu6

베를린 장벽은 어떻게 무너졌을까. 고르바쵸프의 개혁개방의 여파가 동독의 체제 불안정을 불러왔고(필연과) 유화책으로 내놓은 여행자유화 정책을 발표하는 과정에서의 착오로(우연으로) 하룻밤 사이 베를린 장벽이 붕괴했다고들 한다. 하지만 음악팬들이 베를린 장벽 붕괴를 복기하는 과정은 좀 다르다. 특히 디페시 모드의 팬이라면 음악이 베를린 장벽을 무너트렸다는 이론을 더욱 신봉한다. 굳이 명명하자면 음악의 줄탁동시 이론.



기록은 1977년 데이빗 보위의 곡 Heroes부터 시작한다. 보위는 이즈음 서베를린에 살았다. 베를린 3부작을 내놨던 시기로 장벽 서편과 아주 가까운 스튜디오에서 작업했다. 보위와 오랜 기간 작업했던 프로듀서인 토니 비스콘티가 이때도 프로듀싱을 맡았다. 그곳에서 비스콘티의 불륜을 목격한 보위가 장벽을 배경으로 써 내려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노래가 바로 Heroes였다.


“난 기억할 수 있어/
장벽에 기대/
우리 머리 위로는 총성이 오가고/
우리는 키스했지, 어떤 것도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1987년 보위는 서베를린을 다시 찾았다. Concert for Berlin이라는 페스티벌 공연을 위해서였다. 베를린 장벽과 맞붙은 광장 무대에 여러 뮤지션이 올랐지만 보위만큼 이 장소가 뜻깊은 뮤지션은 없었다. 보위는 그 무대에서 Heroes를 불렀다.


David Bowie - Heroes (Live in West Berlin 1987)


뜻밖에 장벽 반대편에서도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그날 동독 주민 수천 명이 공연을 듣기 위해 장벽 동편으로 몰려왔고 분위기가 격해지면서 수백 명이 체포된 것이었다.


장벽을 허물어라!


장벽 너머의 음감회는 반체제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들으려는 욕구는 더 이상 통제할 수 없었다. 결국 동독 정부는 집권당 청년 조직을 통해 서구 뮤지션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같은 해 밥 딜런이, 이듬해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동독을 찾았다. 스프링스틴 공연에는 동독 전역에서 수십만이 모일 정도였다. 어쨌든 당이 엄선한 명단에 오른 뮤지션은 어느 정도 납득할 만한 이름들이었다.


하지만 디페시 모드는 뭔가 이상했다. 밥 딜런 같은 정치적 아우라도, 브루스 스프링스틴 같은 노동계급 이미지도 없었으니까. 디페시 모드는 대중적이긴 하지만 솔직히 정말 후진 음악을 하는 신스팝 밴드다. 심지어 페티시즘을 전면에 내세우는 퇴폐성까지. 동독 정권이 모셔오고 싶을 이유가 전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대중의 생각은 달랐다. 디페시 모드는 동독뿐만 아니라 동구권에서 아이돌 수준의 열렬한 청년 컬트를 누리고 있었다. 디페시 모드의 동독 팬 모임과 그들이 만드는 팬진은 비밀경찰의 감시 대상이 될 정도였다. 동독 정권도 그 인기를 외면하지 못했으리라.


자유를 갈망하던 이들이 역설적으로 억압과 가학을 신봉하는 BDSM 콘셉트의 음악을 사랑했다. 당시 디페시 모드의 대표적 히트는 Master and Servant였다.


Depeche Mode - Master and Servant
"날 개처럼 다뤄주세요/
날 무릎 꿇게 만들어주세요/
우린 이걸 주인님과 종놈이라고 부르죠"


당시 최신 히트였던 Strangelove도 다르지 않았다.


“제가 당신께 드릴 고통을, 당신은 받아들이실 건가요?/
다시 또다시, 그리고 제게 그 고통을 되돌려 주실 건가요?”


그들은 레더 팬츠를 입고 하네스를 가슴에 찬 채 무대에 올랐다. 때때로 성도착 의상도 가리지 않았다.


디페시 모드의 동베를린 공연 티켓 | https://bit.ly/2I84gYZ


억압받는 상황을 그들의 가사에 쉽게 대입할 수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세련된 서구 음악을 접해보지 못한 이들에게 이들의 후짐마저 꽤 그럴싸해 보였던 걸까. 불법으로 들여온 디페시 모드 부틀렉, 카세트, 포스터 등을 은밀히 모아 온 청년들은 그들을 직접 볼 수 있는 기적 같은 순간을 놓칠 수 없었다. 동베를린 공연 암표는 당시 동독 노동자 월급의 절반이 넘는 값, 높게는 수달치 임금에도 팔려 나갔다고 한다. 그들에게 다음 기회는 없을지도 몰랐을 테니까.


하지만 동독이 제 발로 열어젖힌 좁은 문틈으로 가정법이 움트기 시작했다. 디페시 모드를 볼 수 있는 다음 기회가 있다면. 혹은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볼 다음 기회가 있다면. 데이빗 보위를 직접 볼 기회가 있다면. 상상력은 억누를 수 없었다. 같은 해 마이클 잭슨의 서베를린 공연이 열렸을 때 동독은 장벽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공연을 중계할 방안을 구상하기도 하고 장벽 접근을 필사적으로 막기도 했다. 하지만 듣고자 하는 열망은 더 커질 뿐이었다.


음악팬들은 이렇게 장벽 서편과 동편에서 들려온 음악이 장벽에 균열을 내는 지난한 과정을 설명한다. 데이빗 보위가 세상을 떠났을 때 독일 정부가 “베를린 장벽 붕괴에 도움을 준 것에 감사한다”라고 했으니 덕후들의 과장만은 아닐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에도 이 줄탁동시가 적용될 수 있을까. 우리도 얼마 전 평양 공연과 정상회담 환송식에서 정말 후진 음악을 많이 들어야 했다. 특히 윤도현밴드와 정재일. 디페시 모드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후진 음악. 2002년 평양 공연 후 윤도현밴드의 노래가 북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고 하니 어쩌면 이들의 후진 음악이 38선을 지워버리는 데도 일조할 수 있지 않을까. 후진 여성비하 전력을 가진 후진 기획자 탁현민의 후짐이 의외로 통일을 서둘러 불러올지도 모를 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헬조선 트위팝을 찾아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