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사는 이야기
내가 수의과대학을 진학하기로 한 이유는 말 수의사가 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수능을 치고 대학을 선택할 당시의 나는 무언가를 판단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 당시 나의 내적 동기를 되새김질 해보면 기능적으로 우아한 말의 체형이나 몸 선 혹은 그렁그렁한 눈망울에 매혹되어서가 아니었다. 오토바이 산업에 종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신 탈 것에 대한 대체재로 간주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오토바이 타는 걸 좋아했다. 한국에서 오토바이를 타기 위해서는 2가지 면허 중 하나를 획득해야 한다. 고등학교1학년 생일이 지나고 취득할 수 있는 원동기 면허, 그리고 만18세 생일이 지나고 나면 취득할 수 있는 2종 소형 면허. 각 면허증은 오토바이 엔진의 배기량 기준으로 나뉘는데 125cc 미만이면 원동기 면허가 있어야 하고, 125cc이상이면 2종 소형 면허가 있어야 한다. 고등학교 1학년 생일이 지나자마자 원동기 면허를 취득했고 몇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갬성넘치는 2바퀴 인생을 유지했다. 작은 엔진 베기량에 만족할 수 없어, 수능을 치자마자 친구와 함께 도봉구에 있는 운전 면허 시험장에서 2종 소형 면허를 취득했다. 집과 가까웠던 강남면허시험장에는 오토바이 면허를 취득할 수 없었기 때문에 궁시렁 거리면서 한참동안 지하철을 탔던 기억이 난다.
나의 첫 대학진학은 공대였다. 자동차에 F-1이 있다면 바이크에는 Moto GP가 있다. 막연한 꿈이었지만 Moto GP 에 참여하는 유명한 오토바이 브랜드, 에컨대 두카티나 혼다, 같은 회사에 취직해서 아스팔트가 이글거리는 서킷 위에서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부족한 정보력으로 여기저기 알아본 결과, 레이싱 불모지가 다름 없는 한국에서는 서킷 엔지니어로 삶을 영위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근처 바이크 정비소를 하는 형들과 동호회 아저씨들도 오토바이는 취미로 하는 것이 좋다며 만류했다.
공대에서 적성도 딱히 맞지 않았기에 고민끝에 오토바이와 비슷한 탈 것이라는 매개체로 말을 생각했다. 외국처럼 뒷마당에서 말을 키우면서 어렸을 때부터 승마를 한 것이 아니다보니 승마선수는 언감생심이었고 말 발굽을 수선하는 장제사나 훈련사라는 직업은 어떻게 접근해야할지도 막막했다. 결국 전문직이라는 장점도 가지고 말을 고쳐줄 수 있는 수의사를 생각했고 그렇게 수의대에 진학했다.
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승마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여러 장소로 실습을 나갔다. 한국뿐만이 아니 미국과 영국에 있는 말 병원과 목장으로 실습을 갔다. 경마로 유명한 미국 켄터키주에 있는 해그야드 (Hagyard)에서 지낸 한달은 나에게 말뽕을 집어넣기 좋은 시간 이었다. 말 병원은 목장의 일정을 따라가야하기 때문에 개나 고양이를 진료하는 소동물 병원보다 하루 일과의 시작과 마감이 빠르다. 보통 오전 6~7시부터 진료를 시작하고 오후 4시쯤 일과를 마친다. 밤에 일찍 잠들기 때문에 여명이 막 사그러드는 이름 아침에 일어나는데, 잠을 깨기 위해 밖에 나가면 몸을 감싸는 기분 좋은 고요와 개운함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현재 나는 시골이 아닌 도시에 살고 있다. 그리고 내가 영위하는 도시적인 삶은 아침의 개운함 보다는 밤의 감수성을 일깨운다. 모든 것이 장단점이 있겠지만 밤에 늦게 자면 유용한 생각보다는 잡념들이 머리속을 헝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모든것을 경험한 영국의 청교도들이 노동의 가치와 고단함을 신념으로 삼고 미국땅을 밟았을런지도 모른다.
켄터키의 병원이 4시에 끝나면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동네 구경을 나간다. 동네 주민들은 픽업트럭에 달린 트레일러에 말을 승마(?) 시킨 뒤에 종합레저시설을 갖춘 장소로 삼삼오오 모인다. 어른들은 긴 채를 이용해서 상대편 골대에 골을 넣는 폴로 (Polo) 경기를 했고, 아이들은 마장마술 을 연습하거나 그냥 말과 함께 뛰어 놀았다. 5월의 푸른 잔디밭에 누워서 그 풍경을 보면서 말이 반려동물이라는 말이 가슴으로 참 와닿았다. 우리가 당연히 점심을 먹는 것처럼 그들에게 말은 그냥 삶의 한 부분이었다.
반면 한국에서 실습을 하고난다면 아직은 한국에서는 말이 반려동물로 받아들여지기 힘든 환경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어렸을때부터 말이라는 동물을 경험할 만한 기회가 없고 땅크기가 좁다보니 말이 지낼 수 있는 장소가 부족하다. 대부분 말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마방이나 승마장에 말을 맡긴 뒤에 위탁관리를 하고 있다. 가끔 승마를 하고 싶을 때만 온다. 그러니 말들이 주인을 알아보겠는가? 말들도 마방에서만 지내니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정신병인 정형행동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지리학적으로도 한국은 산악 지형이 전 국토의 70%를 차지하기 때문에 예전부터 말보다는 소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글로 자세히 적기에는 힘들지만 전반적인 말산업을 한 단체에서 독점하고 있다는 것도 말 문화 저변확대에 대한 진입장벽을 높이고 있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
여러모로 한국보다는 미국에서 말 수의사를 하는것이 낫다는 결론이 나왔다. 미국수의사 면허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길이 있었는데, 나는 남부에 있는 오클라호마 주립 대학교에서 본과4학년 학생들과 함께 1년동안 임상실습을 하는 과정을 선택했다. 학교에서 제공하는 기본 정규과목 이외에도 내가 원하는 몇가지 과목을 추가로 선택할 수 있었는데 나는 말과 관련된 과목만을 선택했다. 말 산과, 말 응급의학 등등.
학교가 전형적인 미국 남부 시골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원하는 만큼 실컷 말을 볼 수 있었다. 미국 남부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말의 종류는 단거리 경기를 위해서 브리딩한 쿼터홀스 (Quarter horse) 라는 말이 있다. 보통 경주마인 더러브렛이나 아라비안이 뛰는 거리의 1/4 (Quarter)를 뛰기 때문에 불리는 이름이다. 쿼터호스는 경마를 하거나 3개의 드럼통을 최단시간에 돌고 들어오는 배럴 레이스 (Barrel racing)에 주로 출전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 동영상을 첨부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p6pD-kQcNo
한국에서 말에 관심을 가지고 남들보다는 많이 다뤄봤다고 생각했지만, 태어났을 때부터 뒷마당에 말을 키우면서 자란 사람들 앞에서는 입조차 뻥긋하기 힘들었다. 이전 실습을 갔을 때는 겉 핡기식으로 접하면서 넘겼던 사소한 것들이, 막상 내 일이 되니 문화적 차이로 다가왔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아직도 참 고마운 사실은, 연결고리가 없으면 다가서기 힘든 미국 친구들과 한솥밥을 먹으면서 한번 친해지고 나니, 낯선 환경에 있는 나를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했다. 한국에서는 본 적도 없는 장비들과 생소한 용어들을 친절히 설명해주고 말의 몸짓과 언어를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책에서 배울 수 없는 소중한 경험들이 근육에 새겨들어왔다.
하지만 말 수의사가 되기 위한 길의 장애물은 다른 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장 큰 이유는 말 보호자들이 까다롭기가 이를데가 없었다. 미국 수의사 사이에서는 반려동물 보호자 중 말 보호자와 이야기를 나누기 가장 싫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굉장히 예민하고 자기가 말에 대해 더 잘알고 있다는 고집이 강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말 다리에 부종이 생기는 걸 방지하기 위해 패드를 감을 때도 그들만의 특별한 규칙을 따라야 한다.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앞쪽에서 뒤로. 만약 수의사가 패드를 감을 일이 생기면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실수일지라도, 그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수의사를 다시 찾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와 같은 사람 (Horse people)들에게 그 정도의 행위는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와야 한다는 믿음때문이다.
의사소통의 문제도 있었다. 일반적인 대화는 별 문제 없지만 문화가 녹아든 깊은 이야기를 시작하면 대화가 끊기기 일수였다. 예를 들어, 남부지방의 유명한 컨트리 노래를 부른 가수 이야기, 혹은 캔사스에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에 대해서 이야기와 같은 것들 말이다. 말 수의사라면 유명한 경마 기수들이나 말 브리더들도 알아야 한다. 말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누구네 집 아들이 우승했다더라, 누구네 딸이 수의대를 졸업하고 말 내과 전문의가 되어서 돌아온다더라 하는 소식들도 금방금방 돈다. 이런 배경지식이 없다면 처음부터 소위 ‘라뽀’를 쌓아야 하는데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고유의 억양은 덤으로 안고가야 하는 장애물이다. 켄터키나 오클라호마같은 남부 지방에서 사용하는 ‘레드넥 엑센트’에 적응하기 위해 반년 정도는 정말 고생했다. 굉장히 심한 경상도 사투리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편하다.
미국 지역별 액센트를 재미로 한번 넣어봤다.
https://www.youtube.com/watch?v=UcxByX6rh24
수의사의 복장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 말 수의사들이 공통적으로 준수하면 좋은 복장이 있다. 여름에는 어두운색의 폴로 셔츠와 면바지, 그리고 겨울에는 위에 집업니트와 조끼패딩을 입고 닥터마틴처럼 생긴 편한 가죽구두를 신는다. 복장 이외에도 자세하게 들어가면 이런 상세한 문화와 의식들에는 끝이 없다. 일일히 적어놓은 뒤에 지키기는 힘든 것들이다. 살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터득해야 한다.
말 수의사를 하려면 도시에서의 삶은 포기해야 한다. 야간에 응급 환자들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 주기적으로 당직을 서면서 대비해야한다. 특히 밤에는 두 가지 응급상황이 잘 발생한다. 다른 동물들보다 장이 길다보니 장이 꼬이거나 장에 돌이 생겨서 복통이 발생하는 산통 (Colic), 그리고 출산 시즌에 망아지를 낳는 것들과 같은 응급 상황들이 많다 (참, 돌이켜보니 이때도 말 영양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 밖에도 여러가지 문제점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만 했다. 이유없이 인종차별을 당하는 경우도 있는데 눈을 응시하고 질문을 해도 대답은 옆에 있는 전혀 다른 사람 (주로 백인들)에게 한다던지, 별 대답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상당히 무디고 직설적인편인데 (ESTJㅋㅋ) 내가 느낄 정도라면 다른 사람들은 애초에 몹시 기분이 나빳을 것이다.
나는 지금 말 수의사 대신 소동물 수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사실 정말 말을 좋아한다면 저런 어려움들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선택의 순간, 나를 수의대로 이끈 동기를 다시 생각 해보았다. 오토바이 대신 탈 것에 대한 열망 그리고 전문직에 대한 현실적인 타협점이 말이라는 생명체에 대한 진심어린 마음보다 컸다. 결국은 말 수의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이 승리했다. 그리고 15년전, 말 수의사가 되고 싶었던 나의 내적 동기 중 가장 진실한 이유가 현재 말 수의사를 포기한 나의 길에 영향을 미쳤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것과 상관없이, 내 스스로가 알고 있는 진짜 이유가 인생에 어떤식으로든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달은 셈이다.
동물윤리적인 차원에서도 언젠가는 경마산업은 도마위에 오르게 될 것이다. 경마에서 승리하기 위한 말 1마리를 만들기 위해 연간 72,000마리의 말들이 브리딩 된 후에 목적없이 방치되거나 버려진다. 유기마들이 많아지고 버려진 말들을 데리고 있는 보호소들도 잇다. 또한 경마를 대체할 수 있는 자동차나 오토바이 경기등의 기계식 레이싱이 발전하고 있으며, 스노우보드나 e-게임과 같은 다른 레저 스포츠들이 다양해지고 영역을 넓혀가면서 말산업은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내가 왜 말 수의사를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주저리 적어보았다. 비록 지금 내 모습이 수의대에 처음 들어갔을 때 꿈꿨던 모습은 아니지만, 어떤 자리에서든 여전히 말 못하는 생명의 고통을 덜어주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함과 자부심을 느낀다 (무력감을 느끼는 시간이 더 길긴 하지만...).
사람이든 동물이든 제발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