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처음으로 다 본 드라마
오피스는 나에게 애증의 드라마이다. 싫어서 여러 번 보기를 그만두었지만, 결국에 다시 보게 되는 정말 별난 드라마였다. 보기를 그만둔 이유는 항상 같았다. 불편한 내용이 너무 많아서였다. 특히 인종과 여성 차별적인 농담과 설정이 난무하는 것이 지독하게도 싫었다. 하도 시대착오적인 발언이 많아서 90년대에 제작된 드라마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초반에는 한두 번 등장하는 유머인 줄 알았으나 나중에 가서는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다. 시즌 9개 전체를 아울러 등장하는 기본 설정 중 하나라는 것을.
혹자는 이러한 차별적 유머를 부각한다는 자체가 차별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라고 하는데,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김지혜 작가의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는 어떠한 대상을 유머의 대상으로 삼는 자체가 그 대상을 낮게 보는 것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 드라마에서 능력 있는 사람은 젠 빼고 모두 남성이다. 마이클, 드와이트, 대릴, 그리고 짐까지. 심지어 젠도 이 드라마에서 중심이 되는 회사 '던더미플린 종이회사'에서 한 순간 능력 있던 여성에서 '쇼핑 중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근무 태만자'로 전락하고 해고된다.
일하는 여성을 폄하하는 대표적인 부정적 이미지 중 하나이다. 이 드라마의 전체 시리즈를 아우르는 핵심 주인공 중 유일하게 여성인 팸은 일단 사무실 접수원이다. 팸의 후임으로 오는 접수원 역시도 여성이다. 꿈이 많은 청춘이지만 미술도, 세일즈도, 능력 부족으로 결국 원하는 결과를 달성하지 못한다. 그리고 짐이 원하던 시기에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붙잡아 두다 결국 그를 위해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의 커리어에 맞춰주는 삶을 택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 외에도 일일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정말 불편한 유머와 상황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피스를 다시 보게 될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애정과 사랑을 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팸이 말하듯, 평범한 것들의 사랑스러움을 이보다 더 잘 드러내는 콘텐츠를 나는 살면서 본 적이 없다. 오피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개성이 과하게 부각되었을 뿐, 우리 주변에 있을법한 사람들이다.
눈치 없고 능력 없어 보이는데 중요할 때는 일처리를 잘하는 상사. 성과와 승진에 집착하는 영업맨. 퇴근 시간만을 바라보며 낱말퍼즐 따위로 시간을 죽이는 만년 부장. 독박 육아에 괴로워하다 직장 동료와 맥주 한 잔으로 힘듦을 위로하는 워킹맘. 직장에서의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만 사실은 사랑과 안정이 가득한 가족을 원했던, 입양이 꿈인 중년여성. 무엇보다 순수한 애정만으로 오피스를 사랑해 마지않는 마이클과 드와이트.
다 어디선가 보았거나, 겪었거나, 들어봤던 사람들이다.
처음에는 왜 저러는가 싶고, 이상하고, 짜증 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마이클과 드와이트가 특히 싫었는데, 여성 차별적 발언을 일삼기 때문이다. 마이클은 성희롱을 일삼고 드와이트는 "여성스럽다"는 것을 욕처럼 활용한다. 그리고 드라마는 난감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팸의 모습 정도 수준의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그래서 그 둘이 특히나 싫고, 그 둘의 차별적인 멘트가 싫었다. 나는 정말 호만큼이나 비호가 강한 사람이라 한 번 싫은 건 웬만해서 계속 싫어하는 사람아더, 그런데도 천재 같은 오피스 제작진은 끝에 결국 내가 이 둘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평범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미숙함과 어리석음,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저지르는 많고 많은 실수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굴러가고, 그 속에서 쌓이는 애정과 우정.
우리는 자주 회사가 싫고 월요일이 싫다고 이야기 하지만, 사실 회사도 사랑스러운 면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공간임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드라마였다. 하루동안 깨어있는 시간의 절반 이상을 보내는 곳에서 보이는 평범한 배경과 평범한 사람들은 사실 매일 약간은 특별하고 약간은 감동적인 사건들을 만들어 내고 있음을. 그리고 우리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들도 사랑스러운 면모가 가득할 수 있음을.
무엇보다 짐이 드와이트를 대상으로 장난치는 게 너무너무 재밌었다.. 사실 드라마 시작 전 프롤로그를 보기 위해 시즌 9개를 다 봤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무리가 아닐 정도로. 지금까지도 돌아다니는 오피스의 밈 대부분이 프롤로그의 일부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정말이지 1차원적인데 기발하고, 유치한데 천재적이어서 감탄하며 웃을 수밖에 없는 5분이다.
살면서 다시 만나기 힘든 특별한 드라마일 테다. 오래간만에 다시 시즌1의 1편을 다시 보았는데 아기 같은 팸의 얼굴, 촌스러운 짐의 스타일, 그리고 낮은 화질까지.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시즌9까지, 내가 10년이라는 시간을 오롯이 함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간접적으로 그 시간을 함께한 것 같은 애정과 감동이 느껴졌다. 내가 이러니 본방으로 10년 본 사람들은 오죽할까. 그 사람들도 다 동일하게 생각하겠지. 평범한 것이 이토록 사랑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그러니 내 평범함도 사실은 아주 특별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