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가 더 많은 일을 할수록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천재의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는 섬세함과 정서"가 결여된 무분별한 복제 메커니즘
1855년 <The Crayon>의 한 호에서 등장한 사진기에 대한 표현이다. 당시 감정도 없는 기계가 예술을 모방한다는 사실 자체가 화가들에게는 모욕으로 다가왔을지 모르겠다. 사진기뿐만 아니라 노동의 현장 곳곳에서 기계들이 사람의 육체노동을 대체하는 산업 혁명의 시작되던 시기였다.
하지만 2023년 오늘 우리는 안다. 아주 넓은 의미의 예술과 향유의 관점이라면 모를까, 사진은 화가들의 미술 작품 대체재가 아니다. 사진기의 등장 이후 인상주의, 표현주의와 같은 새로운 미술 사조가 등장했고, 화가들은 오히려 사진기가 전달하기 어려운 가치들로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사진기는 사진기 대로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권리의 접근성을 확장시키면서, 누구나 다양한 장소와 시간을 포착하고 자신의 세계를 투영할 수 있는 수단을 만들어냈다.
최근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과 함께 작가들, 화가들이 느끼는 모욕과 위협이 다시금 재현되고 있는 듯하다. 일부 콘텐츠들은 생성형 인공지능을 활용했다는 이유로 동료 예술가들 혹은 대중들로부터 질타를 받고 있다. 나를 예술가에 범주에 둘 수 없기 때문에 주제넘은 이야기일 수 있지만, 또 범주 바깥에 있는 사람이기에 들었던 생각은, 오히려 ‘무엇이 중요한지’를 다시 깨닫는 기점이 될 것 같다는 것이었다.
무엇이 중요하냐면, 사람과 그 이야기가 중요하다. 어디 대기업의 표어 같은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고. 방금 말한 가까운 역사만 들춰보아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예술가의 작품을 향유할 때 작품 자체가 대상이 되는 경우도 많지만, 대부분 그 예술가 애정한다. 나는 피카소를 좋아하고, 데이비드 호크니를 좋아하고, 드뷔시를 좋아한다. 물론 그 예술가의 작품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 예술가의 세계관이 투영되는 그 작품을 좋아할 때가 많다. 많은 전시회가 특정 예술가를 주제로 열리는 것도 같은 이유일테다.
글을 쓰는 작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특정 작가를 사랑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밀란 쿤데라를, 정세랑을 좋아하고, 그 작가의 신작을 찾아본다. 그런데 왜 아직 모든 서점들과 출판사들은 특정 책을 중심으로 이야기할까? 우리는 왜 화가들만큼 작가들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적을까? 나는 그게 작가들의 세계가 브랜드화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화가들의 작품은 작품 그 자체가 어떤 브랜드 이미지를 자극하지만, 작가들은 여러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기 전까지는 그 세계를 알기 어렵다. 다시 말해, 진입 계단이 높다.
이렇게나 좋은데. 이렇게 좋은 글이 많은데. 이렇게 좋은 글은 이렇게나 위안이 되는데. 더 많은 사람들이 알지 않다는 게 슬프고, 나만 안다는 게 미안했다. 그리고 사실 나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나조차 좋은 글을 더 많이 읽고 싶어서였다.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은. 그래서 먼저 진입계단이 상대적으로 낮은 좋은 글들을 나눠보려고 한다. 그게 누군가의 출근길에, 퇴근길에, 쉬는 시간에 지친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마음의 재료가 되었으면 좋겠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