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 지상주의 주범 바비, 그리고 사회적 약자 켄
“내가 기둥은 못 세웠어도 마텔에 의자 하나는 놔줬을 텐데…” 넥슨 본사에 놓인 비품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던 게임광 친구들의 말에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서랍을 열면 안에 가득하던 바비와 바비 옷, 그리고 핑크색으로 뒤덮인 바비 집 모형. 온통 환한 빛이 가득한 백화점 등불 아래에서 파티 드레스를 입은 바비, 잠옷을 입은 바비, 수영복을 입은 바비… 끝없이 이어지는 바비의 행렬 속에서 어떤 것을 골라야 할지 몰라 6살 인생 가장 깊은 번민을 겪고는 했다.
20년 가까이 살던 집을 떠날 때, 엄마는 결국 장롱에 쌓여있던 바비를 다 버렸는데 (영화에서처럼 나와의 추억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바비에 쓴 돈이 아까워서 못 버리고 있었다.) 그때 개수가 적어도 20개는 되었다고 하니, 나는 마텔의 꽤나 충성적인 고객(의 자녀)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23살 때였나.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최근 연구 결과를 통해 어린 시절 바비를 많이 가지고 논 여성일수록 여성상에 대한 뒤틀린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결과가 나타났다는 글을 읽었다. 틀린 말도 아닌 것이, 바비의 외모는 꽤나 ‘뒤틀려 있다.’ 그러니까, 현실 속 사람에게는 존재할 수 없는 형태라는 점에서 뒤틀려 있다. (마고 로비와 수많은 빅토리안 시크릿 모델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내 주변에는 없으니까 일단 없다고 치겠다.)
매일 수많은 아티클을 읽고, 메모를 하지만 돌아서면 기억을 못 하는 내가 지금까지 그 내용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충격이었던 것 같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던 바비가, 지금의 나를 그토록 괴롭게 하는 원인 중 하나였다니. 거울 속 내가 이토록 미운 이유가 바비 때문이었다니.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 하루도 다이어트를 쉬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내 경우에 맞게 이 문장을 해석하자면, 단 하루도 제대로 다이어트를 해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간절하게 마르고 싶은데, 간절하게 음식을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음식을 먹고 싶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꼭 배가 고파서 먹었다기보다 먹고 싶어서 먹었기 때문이다. (마른 우리 남편은 몇 번을 설명해도 배가 고픈 것과 입이 심심한 것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엄마 나를 주인공 삼아 이야기하는 갓난시절 도시괴담이 몇 개 있다. 나를 낳은 직후 병원에서 주는 밥이 부족해서 새벽 내내 울다가도 밥만 먹이면 조용해졌다는 이야기, 산후조리 이후에 집에 와서는 갓난 아기가 이렇게까지 먹어도 되나 걱정이 될 지경이어서 엄마가 외할머니에게 전화해 아이의 배가 터지지는 않을지 자문을 구했다는 이야기 등이 있다. 내가 얼마나 먹는 것에 진심이었는지는 이해가 쉬우리라 믿는다.
그런 내가 마르고 싶어 했으니, 매일이 진퇴양난이었다. 학교 매점에서 방금 구워져 나온 따끈한 초코빵을, 하교 후에 친구들과 들른 맥도널드의 스파이시치킨 버거 세트를, 집 찬장에 덩그러니 놓인 신라면 봉지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마르고 싶은 욕구를 포기하자니, 또래에게 인정받고 싶은 10대 소녀의 본능을 다스리기 위한 요령 따위는 없었다.
그때 한창 인터넷 포털이 보편화되고, “원푸드 다이어트,” “1일 1식” 따위의 극단적인 다이어트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티브이를 틀면 <인기가요>에서 소녀시대가 스키니진, 핫팬츠를 번갈아 가며 입으며 나의 팔뚝만 한 각선미를 뽐내던, 그런 시절이었다. 페이스북에서는 #Thighgap이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허벅지가 너무 얇아서 붙지 않는, 그런 다리를 너도나도 동경하며 “좋아요”를 눌러댔다.
그렇게 나는 눈을 감을 때쯤 다이어트를 결심했다가 눈을 뜰 때쯤 다이어트를 포기하는 10대 후반을 지나 외모 자신감이 낮은 그런 여대생이 되었다. 셀룰라이트 때문에 양쪽 허벅지가 붙는 게 싫고, 몸통에 붙이면 양 옆으로 퍼지는 팔뚝이 싫고, 희미한 턱선이 싫고, 빵빵한 양볼이 싫었다. 까치발을 들면 형체를 드러내는 종아리 알도 싫고, 짧은 종아리 길이도 싫었다. 자주 전신 거울을 보며 “여기만 좀 줄어들면 좋을 텐데…” 생각하면서, 내 손을 마우스 삼아 몸을 포토샵처럼 늘이고 줄이는 상상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비에 대한 연구 결과를 마주한 것이다. 그 이후 나는 바비에 대한 약간의 적대심을 가지고 살았던 것 같다. 왜 나한테 뒤틀린 외모 지상주의를 주입해서, 나를 불행하게 만들었지? 완벽한 금발 머리가 산발이 될 때까지, 바비의 분홍 프릴이 달린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다이어트는 이후에도 오랜 시간 끝나지 않고 이어졌다.
영화 초반 바비의 “완벽한 세상”을 비꼬는 대사에서 통쾌함을 느낀 이유일테다.
Thanks to Barbie, all problems of feminism have been solved.
Greta Gerwig, <Barbie> (2023)
이 대사 직후에 따라오는 장면들, 그러니까 여성 대통령에, 여성 공사 현장 인부, 여성 과학자, 여성 대법관들이 줄줄 이어지는 장면도 필시 비꼬는 거라 생각했다.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오던 찰나, 나는 통쾌함을 느끼는 대신 울컥했다. 나 뭐지. 이 발랄한 영화가 시작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나 왜 눈물이 날 것 같지.
그러니까 나는. 포용성을 상징하는 다양한 바비의 출시가 “완벽한 세상”을 만들지 못했을지언정, 내 어린 시절 다양한 바비가 있었더라면 나는 그동안 조금 더 편안할 수 있었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 울컥한 것 같다. 여성이 대통령을 하고, 공장현장에서 일하고, 대법관을 하는 게 당연한 세상을 어린 혜민도 알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 세상을 바꿔놓을 수 있는 메세지가 아니었어도 내 세상은 조금 바뀌지 않았을까.
바비가 줄어드는 매출에 대한 해결책을 꾀하고자 변화하는 시대의 여성상에 맞춰 다양한 바비인형을 출시한다는 기사는 이전에 본 적이 있다. 고무적이라 생각하며 벅찬 기분이 들었던 것도 기억난다. 거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바비 인형의 “제품 라인”을 확장한다고 해서 지금까지 바비가 가져온 문화의 그림자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찔러낸 그레타 거윅의 통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바비 팬이라면 누구나 콩닥거릴만한 이스터 에그들이 곳곳에 드러나는 영화 장면들은, 현대의 여성 사회를 그리는 그레타 거윅과 기성 여성 사회를 그려왔던 마텔의 만남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보여준다.
동시에 세계관의 논리적 모순과 얕은 깊이에 대한 아쉬움은 감추기 어렵다. 사실 켄이라는 캐릭터가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바비랜드 안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고충을 이야기할 때, 성별을 떠나 소수자로 사는 삶을 반영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여성으로 태어나서가 아니라, 어느 사회에서 힘과 자리가 없는 약자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손톱 아래 가시처럼 잔잔하게 괴로운 일인지, 라이언 고슬링이 연기한 켄이 보여줬다고 생각했다.
켄들의 저항을 거쳐 바비랜드가 켄도 포용할 수 있는, 다양성이 부각되는 그런 사회로 나아가려는 목적이라고 예상했다. 인간은 자신과 시각적으로 유사한 사람의 말에 본능적으로 더 공감을 하니까. 굉장히 영리하고 지혜로운 방식으로 남성들에게 페미니즘 문제를 전달한다고 여겼는데, 일부 맞고 일부 틀렸다. 마지막에 바비들이 법무부의 말단 자리를 허락하는, 기득권의 관점에서 켄을 포용해”주는” 식의 접근이 최선이었을지 궁금하다. 특히, “I’m K-enough”라는 티셔츠는 말 그대로 “주어진 것에 감사함을 느끼라”는, 여성들이 줄곧 들어왔던 폭력을 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그렇지만 마고 로비와 그레타 거윅과 바비라니. 미워할 수 없는 조합이라 생각하며 영화 개봉을 기다렸고, 미워할 수 없는 조합이라 생각하며 영화관을 걸어 나왔다. 그레타 거윅의 모든 영화들을 애정하지는 않지만 <레이디버드>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영화 10편을 꼽으라면 무조건 들어갈 영화이다. 그래서 마고 로비가 자칫하면 자신이 왜곡된 메세지를 전달할 수 있는 바비 영화에, 감독으로 그레타 거윅을 점 찍은 이유가 이해된다. 이 세상에서 소녀로 산다는 것이 어떤지에 대해 울림을 줄 수 있는 이야기꾼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의 어린 시절 최소 3할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바비. 안 입는 티셔츠 등을 잘라서 옷을 만들어주던 기억도 난다. 서툰 실력으로 바느질을 하다 보니, 구멍 간격이 손가락 마디 만해서, 천이 다 울고, 바비의 속살이 보일 지경이었지만, 내 손으로 옷을 만들어 입혔다는 자부심만큼은 빳빳하고 온전했다. 내 옷장 속 바비들의 작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대소사의 기승전결을 만들고, 켄과의 사랑 이야기를 상상하던 어린 시절, 바비는 창작 영감의 중심이었다. 그러니 모든 원망을 바비 너에게 돌리지 않기로 한다. 그녀들이 “완벽한 세상”을 만들지는 못했어도, 혼자 방 안에 앉아 놀고 있는 어떤 여자 아이에게 “완전한 세상”은 만들어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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