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혜민 Aug 03. 2023

샐러드와 라면

먹고 싶어서 먹는 식사

점심에 샐러드를 먹었다.

방금 마트에서 사 온 신선한 청상추와 케일, 치커리를 숭덩숭덕 썰고, 냉동실에 있던 닭가슴살을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저번에 먹었을 때 아무래도 간이 짰어서,  닭가슴살을 주욱주욱 손으로 찢은 후, 찬물에 씻고 물기를 짜낸다. 그러면 간이 딱 맞는 닭가슴살이 된다.


올리브, 방울토마토와 같은 기타 재료들은 넣지 않는다. 2인 가구가 사는 집에서 재료가 다양한 샐러드는 사치이다. 채소를 수북이 쌓은 그릇 위에 닭가슴살을 얹고, 냉장고에 있던 홈메이드 오리엔탈 소스를 꺼내 숟가락으로 샐러드 위에 두른다. 먹을 준비가 다 되었다. 한 번의 포크질로 청상추와 케일, 닭가슴살을 동시에 찍고 입에 넣는다. 청상추의 담백함과 케일만의 향, 닭가슴살의 짭조름함이 입안에서 뒤섞인다.


저녁에 라면을 먹었다.

찬장에 있던 진라면 순한 맛을 꺼내 찢는다. 계량컵으로 정확히 500미리의 물을 맞추고 은색 냄비에 부어 넣는다. 가스를 켜고 라면 수프를 넣는다. 물이 조금이라도 더 빨리 끓였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면을 넣는다. 나는 약간 불은 면이 부드러워서 좋다. 그래서 투명해진 면을 30초 정도 더 기다린다.


뜨거워진 손잡이를 손수건으로 잡고, 깔아 둔 냄비 받침 위에 냄비를 올려둔다. 앞접시를 꺼내도 되지만 뚜껑을 사용하는 쪽을 택한다. 내가 먹을 음식은 라면이기 때문이다. 표면이 반들 해진 면을 한 움큼 집는다. 면의 고소함과 국물의 짠기가 입안에 뒤섞인다.


이쯤 되면 다이어트하다가 의지박약으로 무너진 거라고 예상하겠지만 틀렸다. 나는 샐러드를 맛있어서 먹고, 라면도 맛있어서 먹는다. 한 때 다이어트 하다가 무너진 적이 수도 없이 많기에 이제 먹는 걸로 다이어트하지 않는다. 그저 배부르면 숟가락을 놓는 정도이다. 전후로 몸무게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22살 대학생 여름 방학, 부모님이 여행을 가서 집을 비우자, 식단 관리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여름 초입에 세운 방학 목표 첫 줄에 ‘몸무게 53kg 달성’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내 키는 174다). 하지만 날씬해지고 싶은 욕구만큼이나 맛있는 걸 먹고 싶은 욕구도 강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라면은 포기할 수 없는 음식이다. 그래서 1일 1식을 한답시고 한 끼에 라면 두 봉지를 끓여 먹었다. 사실 세 개를 끓일까 고민했는데 먹고 나니 그러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26살 직장인 여름날, 외부 사람과 밥을 먹으면 돈을 넉넉하게 쓸 수 있는 법인카드가 내 손에 쥐어졌다. 그래서 인근에서 일하는 동료들을 만나 한 끼에 14,000원이 넘어가는 고오급 샐러드를 겁도 없이 매일 같이 사 먹었다. 어느 날은 스테이크를 추가한 샐러드를, 어느 날은 연어가 넉넉히 들어가 있는 포케를, 어느 날은 왜 비싼지 모를 후무스와 함께 샐러드를 먹는 식이었다. 이러면 살이 좀 빠질까 기대했다. 하지만 법인카드가 생긴 만큼 잡아야 하는 약속은 저녁에도 있었다. 그럴 때면 가고 싶지도 않은 모임에 나가 술을 잔뜩 먹고, 비싼 안주도 잔뜩 먹었다. 샐러드로 주린 배를 저녁 안주로 그득하게 채웠다.


그냥 좀 살지. 지난 여름들을 되돌아보며 나는 안쓰러운 마음을 느낀다. 식단 같은 거 안 하고 그냥 적당히 배부를 정도만 먹었어도, 오히려 취미로 하는 재밌는 운동 종목을 하나 만들었어도 지금보다 더 건강했을 테다. 강박적인 마음의 칼날이 자꾸 의지를 반토막 낸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제 뭐든 해야 해서 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신선하고 아삭한 샐러드가 맛있을 것 같은 날이면 토핑보다는 채소의 신선도에 신경을 써서 식사를 준비한다. 라면이 먹고 싶은 날에는 그냥 먹는다. 그러면 또 한 동안은 안 먹고 싶다. 그동안은 된장찌개도 먹고, 볶음밥도 먹고, 삼겹살도 먹고, 비빔밥도 먹고, 다양하게 먹는다. 그날 먹고 싶은 것을 맛있게 먹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 점심으로 샐러드를 먹고 저녁으로 라면을 먹었다.


Photo by Edanur Ağaç on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좋아할수록 외로워지는 방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