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피고인에게 무급 21년형에 처한다

그가 통치하는 세계

by 은현


[벌주기]

“내현적 나르시시스트는 자산을 숨기고 경제적 지원을 중단하며, 심지어 당신이 지출하는 아주 적은 금액까지 통제함으로써 돈을 처벌의 도구로 사용한다.”

『그 사람은 내현적 나르시시스트입니다』 _(5. 통제와 조종 中)



나는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용돈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학창 시절에 친구들이 간식을 사 먹으러 옹기종기 떠날 때 집으로 가야 했다. (용돈이 없는 이유도 있었고, 학교 끝나면 1분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집으로 가야 했으니까.) 아주 가끔은 남겨둔 세뱃돈으로 친구들과 맛있는 걸 먹고 집에 들어가 엄마에게 늦게 왔다는 이유로 혼이 났다.


나는 받은 세뱃돈을 엄마에게 주기 전에 얼마를 빼서 꿍쳐둔 돈으로 일 년을 보냈다. 손에 꼽을 정도로 아주 드물게 엄마가 용돈이라는 이름으로 주기도 했지만, 대부분 친구 생일 선물이라거나 필기구나 문제집 등을 사기 위함으로 엄마에게 부탁한 돈을 원가에 딱 맞게(혹은 거스름돈이 생기면 반드시 돌려주어야 하는 조건으로) 용돈이라는 이름으로 받았다.


엄마는 매번 ‘필요하면 (돈을) 달라고 해.’, ‘(그리고) 먼저 사고 청구해.’라는 말로 필요할 때마다 용돈을 달라고 말하라고 했다. 나는 돈이 필요한 일이 생겨서(친구의 생일 선물이나, 갖고 싶은 물건이 생겼다거나 등등) 필요하다고 말하면, 엄마는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된다고 이유를 들어가며 용돈을 주지 않았다. 먼저 사고 청구하는 것은 가지고 있는 게 없으니, 지불도 청구도 할 수 없었다. 가끔은 숨겨둔 세뱃돈으로 필요한 물건을 사고 청구해도 ‘그 정도는 니 돈으로 사!’라고 말했다.


엄마는 늘 우리 집에 빚이 많고 그리 잘 사는 집이 아니라는 말을 했다가도 사고 싶은 걸 다 사주진 못해도 필요한 걸 다 사줄 수 있는 집이라는 양립적인 말로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강제 재수 후, 우여곡절 끝에 대학교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규칙적으로 용돈을 받게 되었다. 무급 21년 형기를 마친 것이다. 그때 용돈이 20만 원이었다.

엄마가 용돈을 산정해 준 기준은 그때 당시 학교까지의 지하철 요금, 그리고 식대를 한 끼 기준으로 6-7,000원으로 잡고 학교 방문 횟수만큼 곱해서 용돈을 산정해 주었다. (교통비 5만 원, 식비 15만 원이었다.) 엄마는 늘 그랬듯 ‘부족하면 청구해.’라고 했다.

그 외 부담하는 모든 비용(학과 내 행사, 교재비 등)은 선지불 후청구였다. 엄마는 청구 금액의 끝자리를 반올림해서 몇백 원, 가끔은 몇천 원 더 쳐주며 인심 썼다는 말과 함께 원래 주기로 했던 금액보다 조금 더 주는 자신이 정말 좋은 엄마임을 강조했다. ‘엄마 OO원 더 줬다? (고맙습니다 해야지.)’


물론 알바를 할 수 있는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부모님이 용돈을 당연히 줘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나의 그 생각과는 별개로 (집-학교를 벗어나지 못하게 통제하는 건 20대에도 마찬가지였기에) 엄마는 내가 알바를 못 하게 했다. 신입생 때 나는 통금시간이 5-6시였고, 학교가 멀었던 나는 3시부터 항상 마음을 졸여야 했다. (수업이 늦게 끝나는 날에는 자포자기였다. 집까지 날아갈 수는 없으니까.) 엄마는 5시, 가끔은 더 일찍 전화해서 지금 어디냐고 집에 오라고 전화를 해댔고, 전화를 한 번이라도 받지 못한 날에는 집에 가면 엄청난 폭언과 함께, 다음에 또 그러면 통금 시간을 더 당긴다거나 용돈을 줄이겠다고 협박을 했다.


그렇게 학교를 몇 달을 다니다 제발 용돈을 올려주면 안 되겠냐고. 통학할 때 전철보다 더 빨리 집에 올 수 있는 방법(통학버스)을 알게 되었으니 그 방법을 사용하려면 이 용돈으로는 교통비로 다 나가고 한 달에 절반 이상 밥을 못 먹는다고. 가격이 비싸졌지만 집에 더 빨리 온다는 말 때문인 건지 엄마는 통학버스 가격만큼 교통비를 책정해 주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매년 용돈을 올려달라는 나의 온갖 사정과 설득으로 용돈이 조금씩 을랐지만 그렇게 오른 용돈은 학기 중이 아닌 방학을 위함이었다.


제한적인 용돈에 영향을 많이 받았던 시기는 방학이었다. 내가 학교를 가지 않으니 엄마는 용돈을 주지 않겠다고 했다. 알바를 못하게 하면서 용돈도 없는 거냐는 나의 말에, 그럼 용돈을 줄 테니 집에서 공부만 하라며 10~15만 원 정도의 용돈을 줬다. 차라리 알바를 하러 나가겠다고 내가 난리를 칠 때마다 엄마에게 두들겨 맞거나, ‘이렇게 대학 등록금도 지원해 주고, 교재비도 용돈도 필요한 물건(생필품)도 집에서 지원해 주는데 방학 때 공부할 생각은 안 하고 밖에 나갈 생각만 하지?, 복에 겨운 줄 몰라. 이런 환경을 가진 걸 감사할 줄 모른다, 엄마를 고마워할 줄 모른다’라고 소리치는 욕을 들었다. 그러다가 매번 방학이 끝나고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엄마는 잊어버리지도 않고 ‘다른 애들은 방학 때 학기 중에 자기가 쓸 용돈(혹은 등록금)은 번다는데 너는…’라고 말했다.


이런식으로 산정된 용돈은 내가 어디에 얼마나 돈을 쓰는지 모든 걸 파악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돈을 쪼개고 쪼개 내가 필요한 물건(화장품 같은)을 사거나 방학 기간에 겨우 한두 번 친구를 만나러 나갈 때면 엄마는 매번 “용돈이 썩어나지? 좀 줄여야겠네.”라고 말했다.


엄마는 딱 교통비와 식비. 내가 학교에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금액을 용돈으로 주었다. 부단히 용돈 협상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모든 것이 허사였다. 자취는 꿈도 꿀 수 없었으니 나는 또 쉽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숨만 쉬며 통학을 했다.

그렇게 또 ‘나’를 없애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나’를, ‘감정’을 없애야 고통스럽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에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녔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그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을 겨우 쳐내며 지냈다.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건 정말 잘했으니까.


내가 용돈에 집착할수록 엄마는 더 깐깐하게 행동했다. 돈으로 나를 통제하려는 엄마에게 지쳐 얼마 지나지 않아 얼마를 주든지 말든지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엄마가 주는 만큼 쓰고,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지냈다. 학교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교통비는 충분했으니까.

용돈을 얼마를 주든 내가 신경 쓰지 않자, 엄마는 용돈을 올려주었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처음 받던 용돈이 작아 보일 정도로 훨씬 더 많은 금액을 용돈으로 줬다. 필요할 때 없던 돈이 다 포기하고 난 뒤 생긴다 한들, 이미 많은 것이 지나간 상태에서 얻은 돈은 의미가 없었다.

엄격히 제한한 금전적인 통제 탓에 나는 나 자신이 ‘돈 쓸 가치가 없는 사람(돈을 쓰는 것 그 자체만으로 부정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그래야 돈을 쓰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니까.

나는 마지막 학기를 다니고 있었고, 학점을 미리 다 채워 들었기에 주 2일 학교를 가는 학생이었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나머지 요일은 집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시간을 버렸다. 시간표를 더 채워서 들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은 이제 와서야 한 번 해본다. 학교에 가지 않는 이상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엄마의 손아귀에 갇힌 채 대학을 졸업했다.







1. 이 글은 독립출판을 염두하고 쓰는 글입니다. 올해 말로 계획하고는 있지만 글을 쓰는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계획이 고정되면 공지 예정)

2. 출판을 하게 될 경우, 출판되는 책은 퇴고를 거치면서 내용이 살짝 바뀌거나 수정되거나 추가될 수도 있습니다. 대신 연재했던 글은 수정없이 포스타입에 유료로 남겨둡니다.(출판 시 소장 가격 변경+공개 상자 이동 예정/현재 포스타입 소장 100원 고정) / 브런치 스토리의 경우 글이 비공개로 전환될 수도 있습니다.

3. 개인적인 경험을 글로 풀어쓰기로 마음 먹은 만큼 어떤 사건들은 임의로 수위를 조정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