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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현옥 Oct 04. 2020

나는 엄마 편이지

 “우리 딸은 언제나 엄마 편이지?”


 초등학생 나이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 안의 사탕을 혀로 사정없이 굴리면서 시선은 다른 곳에 고정된 채였다. 한 마디로 그냥 다른 생각 중이었다. 저런 걸 왜 물어보지? 언제나 엄마 편이 된다는 게 뭘 뜻하는 걸까? 난 엄마 딸인데, 그럼 당연히 엄마 편인 것 아닐까? 맞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그 뒤로도 몇 번을 더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만, 제발 그만 물어봐!’


 귀찮게만 느껴졌던 그 물음은 나도 모르는 새 내 기억 속에 깊게 남겨졌나보다. 그래, 내가 엄마 편 아니면 누구 편이겠어! 


 그다지 많은 나이도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살아오며 수많은 괴로움이 있었다. 외로움, 사랑에 대한 갈구, 억울함, 분노! 내가 힘든 건 다 엄마 때문인 것 같았다. 왜 하필이면 이런 집에 태어났을까, 왜 자식은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걸까. 조금만 더 칭찬해주지, 조금만 더 따뜻하게 대해주지. 그 아쉬움과 괴로움 속에서 엄마를 미워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결국 엄마의 편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 놈의 핸드폰 없애면 되잖아!”


 아, 또 싸웠다. 핸드폰 문제로 엄마랑 지겹도록 싸우고 결국 나는 핸드폰을 없앴다. 소리지르며 차 조수석에 핸드폰을 팽개치고 씩씩대며 뒤도 안돌아보고 학교로 향했다. 그 때부터 나는 고3 내내 수능 전까지 핸드폰이 없었다. 이건 여담이지만 엄마가 그렇게 핸드폰을 뺏으려고 했을 땐 짜증나고 없으면 답답했는데 막상 내 손으로 핸드폰을 놓으니 별로 아쉽지도 않고 생각보다 살만했다. 어찌됐든 쓸데없는 얘기는 각설하고!


 무슨 숙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학교에서 숙제가 있었다. 사진을 촬영해야만 하는 숙제였는데 나는 앞서 얘기했던 것과 같은 이유로 핸드폰이 없어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기에 옆에 있던 아빠에게서 핸드폰을 빌려 숙제를 했다. 촬영을 다 마치고 아빠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려는데 누군가에게서 메세지가 왔다. 문자도 아니었고, 카톡도 아니었다. 보라색 아이콘의 처음 보는 채팅 어플이었다. 아빠에게 온 메세지는 그저 잘자라는 내용의 특별할 것 없는 한 마디였지만 왠지 내가 보면 안되는 걸 본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아빠가 티비에 빠져있는 사이 나는 후다닥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물론 남의 대화를 몰래 보는 것은 나쁜 일이지만, 고민 끝에 메세지 알림창을 눌러 아빠가 의문의 상대방과 나눈 메세지 전문을 훔쳐봤다. 대화는 초반 부분이 삭제된 듯 중간 지점부터 시작되었다. 


 [내일 밥 같이 먹을까?]

 [좋지, 안 그래도 당신 보고 싶었는데 내가 그 쪽으로 갈게]


 [오늘 꿈자리가 별로여서 기분이 안좋아]

 [걱정하지마. 당신이랑 나는 하나인데 내가 괜찮으니 당신도 괜찮을 거야]


 멍한 기분이 들었다. 모르는 여자와 대화를 나누는 아빠는 이런 모습이 있었나 할 정도로 달콤한 말들을 쏟아냈다. 엄마하고는 매일 싸우기만 하는데……. 아들 얘기를 하는 것 보니 상대방도 자식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빠는 바람을 피는 게 아니었다. 엄마와 아빠는 이미 이혼한 상태니까. 그럼 상대방은? 상대방도 이혼했을까? 어디서 만났을까? 어떻게 생겼을까? 엄마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상대방의 대화명은 이름 석자로 저장되어 있었다. 정말 실명이 맞나 싶을 정도로 예쁜 이름이었다. 아빠에겐 미안하지만 그 이름으로 아빠 폰을 다 뒤졌다. 주소록, 카카오톡, 카카오 스토리……. 생각보다 그 여자에 대한 정보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나는 결국 그 사람의 사진과 전화번호를 알아낼 수 있었다. 


 사진 속 그 여자는 그냥 평범한 아주머니였다.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듯한, 오히려 너무 평범해 보여서 맥이 빠졌다. 차라리 진한 화장을 하고 섹시한 옷을 입고 있는 여자였으면 내 기분이 좀 달랐을까? 아빠와 그 아주머니는 그저 평범하게 사랑하고 있는 커플과 다를 것 없었다. 그 분은 체육관처럼 보이는 곳을 배경으로 운동복을 입고 배드민턴채를 잡고 계셨다. 아빠는 운동을 잘했고 배드민턴을 좋아했다. 매일매일 퇴근하면 체육관에 나가 배드민턴을 치고 들어오셨다.


 ‘거기서 만났나 보구나.’


 나는 그 분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문제집 귀퉁이를 찢은 곳에 옮겨 적고 누가 볼세라 내 지갑 속에 숨겼다. 아빠에게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핸드폰을 돌려줬다. 기분이 이상했다. 설명할 수 없는 헛헛한 느낌이 들었다. 슬픈 것도, 화나는 것도 아닌, 말 그대로 이상한 감정이었다. 아빠는 이 사람과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지 않을까? 혹시 우리가 아빠에게 부담이 되고 짐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이혼도 했겠다, 다른 사람과 새 가정을 꾸리고 싶을 수도 있을텐데 우리 삼남매가 아빠의 발목을, 아빠의 삶을 붙잡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무서웠다.


 다음 날, 학교 동아리실 전화기를 붙잡고 나는 고뇌했다. 내 오른손에는 수화기가, 왼손에는 지갑 속에서 꺼낸 쪽지가 들려있었다. 예쁜 이름과 전화번호가 쓰여있는 쪽지. 어떤 사람인지 너무 궁금했다. 아빠가 사랑하게 된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학교 전화번호이니 상대방은 내가 누구인지 절대 유추하지 못할 것이다.


 ‘전화해볼까, 말까.’


 전화번호를 누르고, 수화음이 들리고, 달칵 소리가 난 뒤 목소리가 들려오면……. 그 다음에 나는 뭘 어떻게 할 것인가?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목소리만 듣고 끊을까 했지만 다 쓸모없는 짓이었다. 내가 이 아줌마의 목소리를 들어서 뭘 할 건가?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바꿔야 할 이유도 없다. 나는 쪽지를 다시 고이 접어 지갑 안에 넣었다. 그냥 버릴까 했지만 차마 버리진 못했다. 마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남친의 연락처를 지우지 못하는 상처받은 여자처럼 구질구질해진 기분이었다. 상대방은 아무것도 모를텐데.


 정말 많이 고민했다. 엄마에게 말해야할까? 하지만 엄마가 모른다면……. 굳이 말할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엄마와 아빠는 이미 이혼했고, 이건 아빠의 사생활이고, 무엇보다 엄마가 알면 너무 허탈할 것 같았다. 엄마와 아빠는 부부이기 이전에 사업 파트너였다. 이혼이란 제도를 통해 법적으로 갈라졌다 할지라도 두 사람은 사업을 이유로 계속 얼굴을 마주할 수 밖에 없는 사이였다. 작은 회사이지만 엄마가 얼마나 애써왔는지 알기에 말할 수 없었다. 외롭고 지쳐보이는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불쌍한 엄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엄마 곁에도 다른 사람이 생기기를, 엄마에게도 의지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기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나는 언제나 엄마 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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