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블비를 '이용'하여 완성시킨 찰리 왓슨의 성장담
※ 본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트랜스포머>라는 거대한 기획이 시작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달리 말하자면, 트랜스포머 제작진은 새로운 관객을 애타게 갈망했으리라는 뜻이다. 시리즈물을 이어가기 위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작품의 미학이나 완전성이라기보다는 기실 관객의 명수나, 작품에 많은 돈을 쏟아부어줄 열렬하고도 충성스러운 코어 관객층에 가깝지 않은가. 그러나 시리즈물은 그 개수가 쌓여갈수록 기존 관객은 대개 떨어져 나가고, 새로이 영화를 기웃거리는 사람이 진입하기엔 부담스러워진다는 이중의 문제에 휩싸인다. 최근 개봉한 <범블비>는 그러한 고민의 결과물인 듯하다. 트랜스포머 영화의 연장선임에도 독립적으로 설 수 있는 영화로 제 역할을 톡톡히 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제목이자 주인공인 '범블비(딜런 오브라이언)'는 <트랜스포머> 세계에서 사랑받았던 귀여운 오토봇으로, 기존 시리즈와 그 궤를 같이한다는 것을 강력히 표방한다. 그러나 이 영화를 다 보고 났을 때 내게는 한 가지 질문이 남았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정말 범블비인가? 감히 말하자면 내 대답은 ‘아니오’다. 이 영화는 본질적으로 찰리(헤일리 스타인펠드)의 성장담에 가깝다.
기본적으로 어떤 매체이든 작가는 주인공을 늘 신중하게 무대에 내세운다. 신데렐라가 무도회장에 들어서는 순간은 모든 이가 이미 도착한 이후였듯이. 영화 <범블비>에서 우리가 찰리를 만나는 순간이 꼭 그러하다. 우리는 언제 찰리를 마주하는가? 범블비가 지구에 도착한다는 배경으로 소비된 이후다. 이윽고 관객은 찰리에 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한다. 카메라는 찰리가 스미스의 음악을 아침부터 헤드폰으로 들으며 자신만의 세상에 빠진 모습, 가족과 갈등을 겪는 장면, 아르바이트를 하는 씬을 충실히 담아내고 범블비는 소외당한다. 이러한 이야기 배치를 선택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이런 것. 우리는 이미 트랜스포머를 보았기 때문에 범블비에 대한 정보를 손에 움켜쥐고 있으리라는 전제, 모두 범블비가 나오리라는 것을 예상할 테니 그 기대를 먼저 충족시키는 것이 중요하리라는 계산.
그러나 내가 이 영화의 장르를 성장 드라마로 분류하고 싶은 까닭은 이야기의 중심이 결국 찰리와 범블비 사이의 교감에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영화는 끝내 그 결과인 ‘찰리의 성장’에 도달하지, 범블비의 기억 찾기에 도달하는 것으로 종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범블비의 기억은 마치 부차적으로 존재하는 곁다리 이야기처럼 취급당하기까지 한다. 범블비의 기억이 초기화되었을 때 감독은 찰리와 범블비 사이의 우정(혹은 소동)을 카메라에 담아냈지, 범블비의 고뇌를 담아내지 않는다. 목소리까지 잃어버린 범블비와 찰리의 교감은 어려울 수밖에 없으니 그녀가 초반부에 범블비를 돕지 못하는 것은 이래저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까닭을 알 수는 없으나 범블비 역시 자신의 기억을 찾기 위한 노력을 특별히 기울이지 않는다. 심지어 옵티머스 프라임의 메시지를 찾았음에도! 게다가 영화의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찰리의 다이빙(트라우마의 극복)이지, 범블비의 인사가 아니다.
트랜스포머의 골수팬들이라면 이번 영화가 퍽 실망스럽지 않았을까. 이전 시리즈보다 로봇들의 CG는 조금 허술해 보이고, 디셉티콘 세력마저 상당히 평면적으로 등장하는 데다가, 기승전결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렇지만 이번 영화는 안정적으로 범블비의 귀여움을 어필한다는 점에서 미워하기 어려운 영화이기도 하다. 범블비가 시종일관 사랑스럽게 등장하는 데다가, 마지막엔 영리한 술수로 감동을 선사하기까지 하니까. 물론, 쉬운 이야기 구조를 통해 가족 단위의 새로운 관객층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전략이라 불러도 괜찮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