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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Mar 15. 2019

영화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2006)>리뷰

구원은 언제나 예기치 않은 곳에서 찾아온다

영화 <더 폴(2006)>은 공간적 쾌감이 넘치는 영화다. 몇 년에 걸쳐 촬영지를 엄선했다는 감독의 정성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이 영화는 환상적인 풍경을 자랑한다. 롱 샷으로 잡히는 강렬한 사막, 경이로운 바다와 투명한 햇빛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도 작고 사소하다. 심지어 블랙 밴디트(리 페이스)가 복수를 다짐하는 장면마저 관객들은 감정적으로 동화되기 어렵다. 카메라는 액자식 구성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점층적으로 물러나며, 다섯 모험가를 지워내기에 바쁘다. 하지만, 내 앎이 짧아 그런 것일지도 모르나, 각 풍경 속에서 기하학적 의미나 갖가지 색의 상징을 분석하는 것이 유의미한지 잘 모르겠다. 알렉산드리아의 상상 속에서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게 그려진 세계가 기실 끝없는 죽음에로의 욕망이었다는 이중성 자체가 이 영화의 백미이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본격적인 리뷰에 들어가기 전, 간단하게 플롯을 정리해 보자. 오렌지를 따다가 팔을 다친 소녀 알렉산드리아(카틴카 언타루)는 병원에서 나름대로의 유명 인사다. 팔을 다쳤음에도 신부님에게 오렌지를 던지고, 병원에 배송되는 커다란 얼음을 몇 번이고 할짝여야 하는 이 말괄량이는 같은 병원, 다른 병실에 입원한 로이 워커(리 페이스)를 만난다. 로이는 다리를 다친 스턴트맨으로, 당장의 꿈을 잃을 위기에 놓였으며 실연까지 겹친 청년이다. 두 사람은 정말이지 우연히 만났다. 알렉산드리아가 창 밖에서 날린 쪽지가 그의 침대로 불어오지 않았더라면 알렉산드리아는 로이의 존재조차 모른 채 퇴원을 했을 것이다.


한 순간의 스침으로 남을 수 있었던 이 인연은 로이의 이야기로 인해 연장된다. 네 이름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름을 따 온 것을 아느냐는 질문을 시작으로 로이는 <더 폴> 속의 셰헤라자데가 된다. 사실 로이를 실력 좋은 이야기꾼이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야기는 두서가 없고 설정은 끊임없이 바뀌며 말도 안 되는 덧붙임이 수없이 이어지니까.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에게 로이의 이야기는 세상 그 무엇보다 흥미진진한 드라마다. 하지만 로이는 알렉산드리아가 지적하듯, 제일 재미있을 때마다 이야기를 멈춘다. 그리고선 모르핀을 훔쳐오라는 부탁을 한다. 끊임없이.


알렉산드리아는 알파벳을 간신히 읽는 만 다섯 살 남짓의 소녀였기에 그의 부탁에 숨은 의도를 모른다. 아주 약간의 예감을 한다는 암시가 영화 속에 존재하기야 하지만, 구체적으로 자신의 불길한 감각을 자살이라는 단어와 관련짓지는 못한다. 다만 소녀는 로이에게 구글러 구글러, 하는 마법 주문을 배달하고, 그간 들려주던 얘기만큼은 반드시 마무리 지어 달라고 부탁할 뿐이다.


"난 영원히 안 나으면 좋겠어요. 아저씨랑 같이 있고 싶으니까."


<더 폴>은 한 사건, 한 이야기, 심지어 한 줄의 문장과 단어 속에도 다양한 시선이 존재할 수 있음을 유려하게 그려낸다. 추락이라는 사건 앞에서 로이는 삶을 포기할 만큼의 절망을 맛보았으나, 알렉산드리아에게 추락이란 병원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얻은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로이의 좌절을 형상화한 서사시(epic)는 알렉산드리아에게 약간의 로맨스가 가미된 흥미진진한 모험 이야기이다. 의사 선생님과 엄마 사이의 대화는 통역사 알렉산드리아가 얼마든지 다르게 전달할 수 있었고 필기체로 적힌 E는 숫자 3으로 읽히기까지 한다. 그러하니 '이빨'에 힘이 숨어 있다는 말은 로이가 순발력을 발휘해 지어낸 변명이었으나, 영화의 끝에서 돌이켜본다면 그의 말은 그리 틀리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 중 한 명은 침대 위에 갇힌 신세고, 한 명은 깁스를 풀지 못한 소녀다. 그러하다 보니 <더 폴>의 가장 큰 추동력은 로이가 알렉산드리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하필이면 다리를 다친 인디언, 여자를 보지 않겠다고 맹세한 인디언 등은 모두 그를 닮았다. 알렉산드리아의 아버지를 닮았다는 최초의 블랙 밴디트가 그나마의 예외였으나, 이마저도 알렉산드리아의 항의로 로이를 가장 잘 반영한 캐릭터가 된다. 그리고 로이는 자신의 자살이 실패로 돌아가자 모든 캐릭터를 차례로 죽여나간다. 자신을 세상에서 지워나가며 이렇게 말한다. "내게 해피 엔딩이란 없어."



하지만 로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가 그의 일상/이야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단 것이다. "이건 내 이야기야."라고 단언하는 그에게 소녀는 "내 이야기이기도 해요."라고 대답한다. 이야기 속에서 연인을 죽이며 블랙 밴디트는 이렇게 말했다. "알 수 없는 세상이야. 어제 사랑했던 이를 오늘 죽여야 한다니." 그러나 그 선언은 변주된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딸이 죽으려는 밴디트를 살리는 것으로. 그리하여 현실에서 이미 죽어 없던 알렉산드리아의 아버지를 대체한 이야기 속 블랙 밴디트가 끝내 살아남는다. 그는 떨고 있는 딸을 어르고 달랜다. 어제 죽었어야 했던 로이가 오늘 눈을 뜨고 내일을 견디게 된다.


그렇다. 살아 있기만 하다면 그리고 간절하게 당신의 생존을 바라는 이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결국, 정말이지 언젠가는, 그 우울은 흘러간다. 둘은 영사기를 들인 병원에서 함께 타인의 이야기(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고,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 다시금 나름대로의 일상을 일굴 수 있게 되었다. <더 폴>의 마지막은 그래서 아름답다. 씨앗 하나 없이 텅 빈 오렌지 껍질 속의 틀니는 병원에서의 삶이 종결되었다는 상징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알렉산드리아가 마주할 미지의 가능성을 은유하는 씨앗처럼 읽어낼 수도 있으니까.


"내 영혼을 구원하려 하는 거야?" 로이는 알렉산드리아에게 이렇게 물었지만, 나는 조금 다른 질문을 해 보고 싶다. <더 폴> 속 한 줌 바람을, 우리는 기적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니라면 모르핀을 원했던 로이의 욕망이 빚어낸 나비효과를 기적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할까?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영화의 117분 모두가 기적과도 같았다.


언제나 구원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찾아온다. 인간을 끌어내리는 사고가 예측불허라면 구원 역시 그러해야 마땅하리라. 영혼이라는 말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성체를 단순히 먹을 것이라 표현했던 어린아이로부터, 모르핀이라 믿었던 약이 실은 설탕이었던 우스꽝스러운 헛소동으로부터, 그리고 나의 이야기가 당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깨달음으로부터 왔던, 인생을 살아낼 힘은 어쩌면, 그렇게 땅 속에서 숨을 쉬고 있을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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