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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Sep 17. 2020

영화 <덩케르크(2017)> 리뷰

전쟁 속 생존을 다루는 세련된 미니멀리즘

(* 본 글은 2017년 네이버 블로그에 업로드하였던 제 게시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1.

    덩케르크를 볼 때마다 내가 느낀 건 어떠한 압도였다.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압도. 나는 스토리를  중시하기에 이만큼 스토리가 없는 영화에 내가 왜 매료되었는지 이유를 찾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그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뽑인  놀란의 덩케르크는 굉장히 아름답다. 비장미가 넘친다거나, 우아미가 넘친다고 말하기도 어려운데도.



2. 

     관람객 모두가 알겠지만 이 영화의 특이한 점은 한 인물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한 인물의 서사를 따라가겠다는  욕심을 버리자 영화는 훨훨 날기 시작한다. 카메라의 앵글과 숏은 자유를 획득한다. 인물들과 함께 뛰면서 인물들이 흐릿하게 보여도  괘념치 않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블러 처리를 하는 것처럼도 느껴질 정도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몇 명의 서사가 아니라  그들이 겪은 극한의 상황이기에. 

    토미가 물에 빠져서 허우젹 대는 상황을, 놀란은 빛 없는 새까만 물  속과 쏟아지는 소음들로 처리해버린다. 알 수 없는 불빛 속에서 우리가 희미하게 따라갈 수 있는 것은 토미가 누군가의 발에 차일  수도 있다는 어떠한 가능성 뿐이다.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고 Take me home, 이라는 말을 간신히 뱉어내는 그가  겪었을 고난을 감정적으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덤덤히 그의 상처를 조명한다. 물 속에서도 귀를 막아야 하는 토미, 새까만 밤 속  구축함을 빠져나와 깁슨이 던져준 밧줄에 간신히 의지해야 하는 토미, 기름으로 뒤덮힌 얼굴을 제대로 들지도 못하면서 피터의 손을 꽉  잡고만 있을 뿐인 토미… 그러나 이러한 건조한 전달은 오히려 우리에게 어떠한 충격을 가하는 듯 하다. 얼마나 많은 토미가 집에  가고 싶어했을지, 얼마나 많은 토미가 슈투카의 폭격음에 귀를 막고 광활한 해변가에서 몸을 숙여야 했는지를 알기에. 


     또한 물이 차오르는 장면을 빼놓을 수 없다. 익숙한 수평을 넘어 사선으로 매섭게 쏟아지는 물길은 관객들의 숨마져 옥죈다.  하늘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고 빛이 없기 때문일까. 파도는 절망이 되어 구축함 속의 인물들과 우리를 향해 달려온다. 이는 짧은 시간  내에 경험하는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어 어선 씬의 흐르는 물줄기에도 관객인 내가 괜시리 입을 틀어막게 된다.



3. 

     덩케르크의 비어있는 서사를 채우는 것은 분명 풍경과 소리이다. 해변은 광막하기 짝이 없어 비참하고 처절한 모든 상황을  상기시킨다. 압도적일 정도로 막막한 상황은 풍경으로 제시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와 숨을 곳 하나 없는 광막한 해변가. 육군은  보이지 않는 독일군에 쫓기고 보이는 자연에게 막혀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한계로 몰아세우는 것이 있으니, 바로 시계소리다.  째깍이며 우리를 바로 뒤에서 쫓아오는 그 소리, 소리, 소리. 



4. 

     소리가 나왔으니 공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공군과 소리는 생각보다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는 아마 슈투카  때문일 것이다. 제리코의 나팔을 탑재한 슈투카의 소리는 끔찍한 공포를 만들어내고, 놀란은 이에 대항하여 스핏파이어의 롤스로이스  마릴린 엔진을 제시한다. 도슨의 입을 통해 '감미롭다'고 까지 언급된 이유는 아마 두 세력 간의 대비를 위함이었을 것이다.


     코엑스 MX관에서 보는것을 적극 권하고 싶진 않지만, 덩케르크를 한 번 이상 볼 생각이라면 한 번쯤은 MX관에서 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용산 아이맥스는 사운드가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인데 (거칠다고 생각) MX관에서 볼 시, 폭격기가 주는  공포를 좀 더 효과적으로 느낄 수 있으며 조지와 깁슨의 죽음도 더 생생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 예컨대 조지가 바르작거리는  소리나 깁슨의 숨소리와 물소리가 섞이다 결국 물소리가 깁슨을 압도해버리는 그 순간의 소리를 놓치는 것은 참 아까운 일이다. 


     덩케르크는 체험에 초점이 맞춰진 영화이고 시각적 청각적 조화가 섬세하게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MX관에서 한 번쯤 관람하는 것은  정말 괜찮은 선택이다. 물론 영화를 단 한 번만 봐야 한다면 화면이 잘리기 때문에 IMAX를 강력히 권한다.



5.

     덩케르크에선 인물들의 짝이 몇 있다. 일례로 조지와 파리어는 덩케르크의 40여만명+a의 인물 중 영웅으로 추앙되는 극소수의  캐릭터이다. 이 둘의 희생은 자발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리라. (조지는 배를 징발당하지도 않았고 도슨씨의 아들도 아니었음에도 바다로  나섰고, 파리어는 예비 연료까지 사용하며 덩케르크로 향해 결국 포로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문스톤 씬이 조지로 끝맺어질 때면  높은 확률로 공중의 파리어가 뒤이어 등장한다. 



6.

    깁슨과  토미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콤비다. 두 사람의 unspoken understanding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고 말도 안된다는  생각이 들지만, 파리어와 관객 사이에 형성되는 unspoken understanding이 마치 그 관계를 반증해 주는 것만 같다.  또한 두 사람의 조합은, 그 당시 지친 병사들이 얼마나 많았을지를 짐작케 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이는 토미, 깁슨, 알렉스가  최소한 하루는 꼬박 같이 있었을 텐데도 서로의 출신지를 묻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알렉스는 하이랜더스라고 부르며  자신의 부대를 찾아가지만 어선 안에서 알렉스가 같은 부대 출신이었음을 밝히기 전까지 토미는 전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점은  알렉스가 깁슨 못지 않게 눈치가 빠르거나 민감하게 상황을 파악할 줄 안다는 것을 보여준다.



7. 

     깁슨과 킬리언이 맡은 덜덜 떠는 병사 역시 흥미로운 한 쌍이다. 이 두 사람은 문자 그대로 "lose himself"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깁슨은 살기 위해 프랑스 병사라는 정체성을 버리고 영국인 병사 깁슨이 되었고, 킬리언은 PTSD로 인해  자신의 이름 하나 쉬이 말하지 못하는 군인이다. 자의든 타의든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든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군인이 맞이한  결과가 (자신/타인의) 죽음이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8.

     알렉스가 깁슨을 몰아붙이는 장면에서 토미는 어쨌든 이것은 공정치 못하며 옳지 않다고 항변하는데, 이 장면은 깁슨이 구축함에서  망설이며 문을 열었던 것과 이어진다. 어선 속의 응답과 구축함에서의 손길은 전쟁 속에서도 지켜져야 하는 존엄과 어떠한 인류애, 즉  한 사람이 살릴 수 있는 도덕성이 반드시 외부에(민간어선이나 공군에만) 존재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9.  

      전쟁만 없었더라면 평범한 청년들이 평범한 일상을 보냈을 텐데 전쟁은 보통의 군인들이 생존을 욕망하고 다투게끔 몰아갔다.  알렉스의 부끄러움과 죄책감은 사실 고만고만한 우리네의 현주소이다. 생존에 대한 욕심은 사실 무엇보다도 가장 우선시되며 당연한  투쟁의 권리이지 않은가 - 깁슨 역시 영국군의 옷을 훔쳐입지 않았던가.


    하얀 도싯의 절벽을 바라보던 두 병사의 시선은 불타는 프랑스를 불안하게 바라보던 깁슨의 시선과 맞물린다. 집에 가고자 했던 세 청년의 갈등은 한결 누그러진다.



10. 

    이 영화가 영국 전체에게 헌정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민간어선이 해변으로 들어서는 씬 자체 때문은 아니다. 그 배 중 한  어선의 이름이 뉴 브리타니카(아마도 New Britannica)였던 것을 기억하는가? 이 어선은 필름의 중앙을 지나간다. 그리고  토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처칠의 연설엔 구세계를 구원할 신세계가 올 것이라는 구절이 있다. 꽤나 영리한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는 마냥 낙관적일 수 없는데, 그것은 실제 존재한 역사의 결과 때문이며 이마저도 놀란은 영화에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도슨은 바다 위에서 어린 청년들을 무자비하게 전장으로 내보내선 안된다고 이야기하지만 처칠은 전쟁은 계속될 것임을  이야기하고, 워킹역에서 우리는 토미의 무한한 피로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젊은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살았을까?  죽었을까? 살았어도 자신을 잃고 살아야 하진 않았을까? 그러나 신문을 넘기는 소리와 함께 엔딩크레딧이 까맣게 우리의 눈을  잠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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