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ather Feb 17. 2019

영화 <페르세폴리스 (2007)> 리뷰

진보적 무슬림 여성의 자아 정체성에 대하여

“Your real “country” is where you’re heading, not where you are.”
— Rumi



<페르세폴리스(2007)>는 이미 꽤 이전부터 추천을 받았던 애니메이션이다. 그러나 매번 기회가 닿지 않아 보지 못했다. 애니메이션을 모두 본 이후 나는 이것을 왜 이제야 보았을까 스스로 자책하였으나 지금 이 시점에서 보게 되어 다행이라는 기묘한 양가감정에 휩싸였다.


일단 약간의 해명으로 글을 시작해 보자. 나는 본 후기에 대해 '진보적 무슬림 여성의 자아 정체성에 대하여'라 부제목을 달았으나, 이것은 <페르세폴리스>의 극히 일부를 담아내는 표현이라 생각한다. 보다 괜찮은 부제를 붙일 수 있으면 좋았으련만, 내가 부족하여 보다 나은 부제를 붙이기가 어려웠다. 약간의 변명을 해 보자면 이 애니메이션은 애초에 요약하기가 어렵다. 대단히 복잡한 플롯을 가진 것도 아니고, 시간적 연속성을 괴이하게 꼬아둔 것도 아니지만 애니메이션이 품은 이야기 자체가 꽤나 특수하기 때문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이란 태생의 감독 마르잔 사트라피의 자전적 이야기에 기초한다. 그녀는 이란 태생의 예술가로, 1994년 프랑스로 이주한 이후 줄곧 프랑스에서 활동 중이다. 이 사실은 꽤 주목할 만하다. 그것이 애니메이션의 특수성을 형성했으니까. <페르세폴리스>는 사트라피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무슬림’ ‘디아스포라’와 맞닿는다. 정말이지 <페르세폴리스>는 내가 지금껏 본 그 어떤 애니메이션과도 다른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본 애니메이션은 주로 일본 혹은 미국의 것이었으므로. 예외가 있다면 프랑스 혹은 아일랜드, 영국의 것을 언급할 수 있겠지만, 그러한 비일본/비미국 애니메이션을 본 횟수는 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나 될까, 의문이 들 만큼 수가 적다. 그래서  <페르세폴리스>를 보기 전 일정 부분 걱정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내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 궁금했고, 혹여 유의미한 세계의 목소리를 지루하게 느끼진 않을까 염려하기도 했다. 다행히 이런 걱정은 모두 기우였다는 것이 첫 10분 만에 밝혀졌다.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페르세폴리스>가 특별하게 보인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사실, 감독(작가)의 생활환경은 해당 문화권에서도 보편성을 띤다고 말하기 어렵다. 마르잔의 삶은 그야말로 흩뿌려진 것이다. 혼란한 이란의 현대사 속에서 프랑스어 국제학교를 다니며 자랐고, 이라크 전쟁을 경험하였으며,  오스트리아로 넘어가 유럽의 문화를 체험하기에 이른다. 다시금 이란에 돌아와 대학  진학, 결혼, 이혼을 겪으며 프랑스로 넘어갈 수 있었던 일련의 경험들은 분명 ‘평범’이라는 이름으로 재단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통념상 성공적이었다 부르기 어려울 유럽 유학 이전의 삶 역시 그리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1970년대 속에서 성장한 마르잔 사트라피는 부유하고도 진보적인 집안 속에서 자랐다. 소녀시절부터 그녀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보수적이지 않은 어른들과 호흡하고 대화를 나눈다. 공산주의적 사상을 듣고, 국왕 타도를 외치는 맹랑한 꼬마였던 마르잔은 차도르와 같은 베일로 여성들이 억압당할 때 브랜드 신발을 신고, 청자켓을 입으며 소극적 저항을 하는 소녀로 자랐다. 학교에서도 대담한 질문을 하여 집으로 전화가 오기까지 한다. 그런 그녀를 부모님은 어떻게 대하는가? 물론 어린 마르잔이 위험에 처할까 말리기도 하지만, 마르잔의 성정을 억압하고 폭력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데에 힘쓴다. 그래서 내려진 결론이 바로 유학이었다. 오스트리아로의 유학. 고향이 아닌 타지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개인은 새로운 환경을 수용해야 하고, 적응해야 한다. 게다가 사회는 일정 부분 개인과 새로운 사회 사이의 동화를 바란다.


자유로운 유럽 속에서 마르잔은 수많은 차이를 마주한다. 그것은 때로 고요하지만 또한 때로 폭력적이다. 풍요로운 슈퍼마켓은 분명 이란과 달랐으며, 갑갑한 베일도 없었다. 하지만 유럽의 친구들은 정치에 대해 마르잔과 전혀 다른 생각을 품었고 향유하는 문화 역시 결이 다르다. 어머니의 친구와 지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손쉽게 무너졌고, 열댓 살도 채 되지 않은 마르잔이 홀로 마주해야 하는 것은 날것의 유럽 그 자체다. 그곳에서 그녀는 불어를 사용하여 소통이 가능했으나 언어장벽이 없다 해서 일상이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오스트리아에서 그녀는 눈에 띄는 이방인이었다. 모든 것에 지치고, 노숙 끝에 병을 얻은 마르잔이 결국 고향에 돌아왔을 때엔, 이란 역시 변해 있었다. 어쩌면 변한 것은 마르잔일 것이다. 아니, 이란과 마르잔, 마르잔의 주변인 모두였을 것이다. 다만 각각의 속도가 달랐거나 변화의 정도가 달랐을 뿐일 터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마르잔의 성장은 자꾸만 요철을 겪는다. 주류에 편입되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녀 경험의 특수성 때문일까? 이 역시 어쩌면, 하나의 중대한 이유일 것이다. 마르잔이 겪은 일들 중 사소한 몇 가지만 뚝 떼어도 한 인간의 방향을 바꿀 만큼 거대해 보이는 일이 여럿 있었으니까. 나는 그러나 그중에서도 환경 자체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싶다. 이란에 남을 수 없었던 운명이었다는 그 사실은 필연적으로 정체성의 분열을 가져온다. 이 특수 속의 보편은 마르잔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시간이 흘러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변과 다른 속도, 다른 방향으로 자라난다는 것은 외로움을 수반한다. 더불어 그 어느 곳에도 낄 수가 없다는 사실, 혹은 정착-불가능성은 한 사람을 서서히 잠식해 올 수밖에 없다. 놀라운 점은 이 모든 이야기가 톡톡 튀는 마르잔과 함께 자연스레 녹아 있기에, 영화 자체가 심각하거나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가 가진 힘이 십분 발휘되었다고나 할까. 할리우드가 사트라피의 원작 만화를 영화로 만들기 위해 시도를 했다고 들었는데, 작가 본인이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나선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페르세폴리스>는 대부분 흑백으로 진행되지만, 마르잔이 공항에 앉아 있는 첫 장면과 후반부에는 컬러가 입혀져 있다.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이 정체성을 탐구할 때 여행이라는 테마 혹은 기차라는 전형적인 상징물로 대변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서 <페르세폴리스>을 감상한다면 기차역이 공항으로 바뀌었을 뿐 수많은 여행과 귀환이 변주되며 애니메이션 그 자체가 마르잔의 자아 정체성 찾기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애니메이션이 끝났다고 해서, 그녀의 삶이 종결된 것은 아니므로, 여전히 마르잔의 정체성 탐구 여정이 지속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난 프랑스인이야', 하고 유럽에서 자신을 소개했던 마르잔이 어떤 어른이 되었는지 만큼은 알 수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사트라피가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제목으로 현재 이란의 수도인 ‘테헤란’이 아니라, 고대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채택했단 점은 따라서 유의미하다.


★★★★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캡틴 마블(2019)> 리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