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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Mar 04. 2019

영화 <사도 (2015)> 리뷰

생각할 사思 슬퍼할 도悼



한국인이기 때문에 어떤 영화를 보든, 결국 한국 영화에 대한 고민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맹신하려는 것은 아니나, 아주 틀린 것도 아니라 생각한다. 내가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고, 내 감정을 가장 잘 건드릴 영화란 결국 한국 영화이지 않겠는가. 며칠 전만 해도 삼일절이 되었다며 영화 <밀정>과 <암살>을 보았던 나로서는, 일본의 근대 영화에 대해 식민지 지배자로서 그리고 미국의 강점을 동시에 겪은 나라가 엮어낸 '흥미로운 시절의' 영화라 설명하는 서양인의 태도에 대해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적 마찰을 (홀로) 겪은 나로서는.



사도세자는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조선시대 인물 중 한 명이다. 사실 한국인이라면 누구든 그렇지 않을까? 역사와 역사 속 인물은 그 자체로 우리의 눈길을 끈다. 우리는 수많은 가정을 했다가, 안타까워했다가, 최악이 오지 않았음에 때로 감사하곤 한다. 예컨대 이런 거다. 만일 문종이 조금 더 장수했다면 어땠을까,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나 그의 부인 민회빈 강 씨가 무사했더라면 어땠을까. 아쉬움에 괜스레 해 보는 가정 외에도, 아찔한 상황은 무궁무진하다. 만일 양녕대군이 왕위를 이었더라면, 이순신 장군의 두 번째 처벌이 백의종군보다 가혹했더라면, 등등.

각설하고, 사도세자 역시 그러한 가정을 하게 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만일 영조가 후사를 조금 일찍 보아서 조급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차라리 어린 시절 그가 총기를 빛내지 않았더라면 (혹은 대기만성형 인재였더라면) 그 개인은 조금쯤 행복하지 않았을까. 언제나 사실이 픽션보다  드라마틱하다는 말의 산 증인이기도 한 이 역사적 실화, 임오화변은 한국인에게 너무나 익숙한 소재이다. 어디 그뿐인가? 문제적 부모-자녀관계는 전 세계적으로 해묵은 클리셰이며 그것이 건드리는 감정 역시 마찬가지다. 21세기의 한국 사회는 오히려 그것이 강화되었을지도 모른다. 조선시대에선 '높으신 분'들만이 겪었을 학업으로 인한 부모-자녀 갈등이 확대되었으니 말이다. 이곳은 영화 <위플래시>를 본 이후 플레쳐의 가르침에 대해 긍정하는 이가 결코 적지 않은 나라이지 않던가.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또한 본디 사도세자의 이야기 자체가 워낙 드라마틱하다 보니 <사도>는 플롯을 설명하는 것조차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스크린과  연출이 중요해진다. 어떤 장면을 어떻게 접붙일 것인가. 궁 안의 수많은 사람들과 그 관계를 어떻게 비출 것인가. 이준익 감독은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유아인)의 여드레 나날을 과거와 교차 편집한다. 디졸브의 자연스러운 연출은 아스라한 안타까움을 불러낸다. 영조(송강호)의 얼굴, 사도세자의 부채 속 용 따위가 현재의 비극과 파국에 이르기 전의 과거와 겹치면서……. 끝내 무덤에서 나가는 세자는 곧 뒤주에 들어가는 세자가 되고, 아비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아들이 아비를 죽이려는 죄인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도 익숙한 소재였으나 영화 속 모든 순간들이 사무치도록 인상에, 아니 가슴에 남는다.


뒤주 속 세자를 이토록 적극적으로 표현했던 매체가 또 있었던가? 제 한 몸 누이기도 어려운 공간 속에 세자가 있다. 빛만 간신히 걸음 하는 새까만 화면, 다리 하나 제대로 필 수 없는 비좁음, 환각임에도 눈을 찌푸리게 되는 지네들. 그 공간을 벗어나면 문제가 해결되는가? 그 물음에 대해 감독은 철저히 아니라 답해온다. 뒤주를 부순 사도세자가 마주하는 암흑 역시 넓게 느껴지지 않는다. 문을 두드림에도 문이 열리지 않는 순간 그의 비극은 이미 종결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궁궐이라는 공간 그 자체가 사도세자에겐 지상이 뒤주와 별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미 영조가 폐서인이라 칭하며 손수 그의 죄목을 적었을 적부터. "허공으로 날아간 저 화살이 얼마나 떳떳하냐." 세손(이효제)에게  자조하듯 물었던 세자의 말속에는 뼈가 있다.


<사도>의 후반부 장면 속 세손, 정조가 영조 앞에서 고하는 말은 영화 <우리들>의 한 부분을 떠올리게끔 한다.  예법도 결국 사람이 있어야 나는 것이라 말하는 세손의 말속엔 영조와 사도세자, 세손 본인이 담겨있으나 현재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반성케 하는 한 줄이기도 하다. 아비의 눈길을 바랐으나 그것 한 번이 없었고, 사가와는 달리 왕가에서는 자식과 척을 질 수밖에 없다며 스스로를 변호하는 영조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이 영화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내야 하는지. 

영화 속 색감, 카메라의 앵글, 화면의 전환과 음악의 사용이 모두 조화롭다. 마지막 장면만은 다소 아쉬웠으나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나 '집안의 이야기'이며 영조와 사도세자뿐만이 아니라 정조에게까지 이어졌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감독이 넣고자 했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제목의 사도는 사도세자의 시호이기도 하지만 마땅히 바쳐졌어야 할 수많은 종류의 묵념을 대변하는 것도 같다. 애도의 대상은 사도세자뿐만이 아니라 영조 역시 포함되며 정조 역시 포함될 것이며 영빈 이 씨와 혜경궁 홍 씨 역시 포함되리라 믿는다. 생각하며 슬퍼해야 하는 것은 부서질 대로 부서지고 망가질 만큼 망가진 하나의 가족이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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