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가족학 전공생의 글쓰기_언어지도_필드 노트
종일 비 냄새가 나는 날. 막히는 도로와 지옥철을 뚫고 아파트 단지 나무에서 내리는 비를 몇 방울씩 맞으며 작은 도서관에 도착했다. 2시가 조금 넘어 차례로 들어온 두 어린이 모두 처음 방문한 아이들이었기에 각자 모야를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다. 다양한 재료와 도구를 둘러보다가 작은 손들은 오른손이신 열매로부터 모야 사용 방법 설명을 들었다. 신기한 기계에 인 버튼을 누르고 출입 카드를 넣자 작업 시계가 돌아갔다. 둘은 자리에 앉아 서약서를 작성했다. 작성 과정에서 열매는 계속 아이들에게 읽기를 요구하고 질문을 던지며 참여를 유도하셨다. 여기에서는 아이들이 이름 대신 별명으로 불렸기에 이에 따라 작은 손이 자신들의 별명을 정할 차례였다. 나중에 들어온 8세 남아는 색종이로 만든 용을 가지고 왔는데 그걸 드래곤이라고 소개하더니 자신의 별명도 드래곤이 되었다. 본인이 떠올린 별명이 없어 열매가 “그럼 드래곤이라고 할까?”라는 질문에 끄덕여 드래곤이 되었다. 먼저 온 10세 남아는 평소에 별명이 있냐는 열매의 질문에 너무 많다고 답하더니 고민하다가 용이라는 별명을 택했다. 둘은 번갈아 가며 서약서를 읽었다. “아직은 작은 손을 가진 친구 안녕”이라는 문구를 정말 작은 소리로 읽었다. 서약서를 다 읽은 후 용과 드래곤의 탐색이 펼쳐졌다.
두 작은 손의 첫 작업에 앞서 작업실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졌다. 공간 곳곳을 탐색하기 위해 둘은 자리에서 일어날 것을 요구받았는데 드래곤이 가지고 온 색종이 용을 계속 지니고 있으려 하자 열매가 그건 두고 오자고 말했다. 새로운 환경이 아직은 어색하게 느껴져서 그런지, 애착을 가진 물체와 떨어져야 해서 그런지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 없이 색종이 용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매는 작업실 전반을 소개했다. 이름 카드 넣는 곳, 쓰레기통, 장갑의 위치를 알려준 다음 재료와 도구 칸에 멈춰 섰다. 작은 손들은 알쏭달쏭 큰 호기심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진지하게 구경했다. 옆으로 가서 미완성 작품 보관함, 완성 작품 전시대까지 모두 둘러본 뒤 본격적으로 작업이 진행되었다.
서로 다른 영감의 기원
열매가 자리를 비키자 용과 드래곤은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의자에 앉아서 휴대전화를 쳐다보는 용과 달리 드래곤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료를 찬찬히 둘러봤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다가 빨간색 과일캡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드래곤은 과일캡을 펼치고 뒤집고 누르고 잡고 돌려보며 재료를 알아갔다. 재료와 놀며 교감하는 듯했다. 한편, 용은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로 뒤늦게 일어났다. 여전히 휴대전화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와중 드래곤은 과일캡을 손에 쥐고 네임펜을 꺼내 들었다. 그 후 자리에 앉아 네임펜 뚜껑을 열더니 과일캡의 갈래마다 작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동시에 용이 재료 칸에 가서 파란 털로 둘러싸인 철사를 발견했다. 용이 해당 재료를 계속 곰곰이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보자 열매가 말했다. “모루를 사용하려 하는구나?” 열매의 말을 듣고 나서도 용은 휴대전화를 번번이 쳐다보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뒤늦게 보인 용의 휴대전화 화면에는 어떤 캐릭터 모형이 있었다. 작업에 별 흥미가 없어서 시작부터 휴대전화를 보며 딴청을 피우는 줄 알았는데 이는 나의 착각이었다. 용은 신중하게 자신이 원하는 작품의 모델을 찾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파란색 모루를 재료 칸에 집어넣고는 열매에게 다가가 휴대전화 화면을 보이며 말했다. “이 색은 어디에 있어요?” 다른 색 모루가 옆에 있으니 가서 찾아보라는 열매의 답변을 듣고 붉은색, 검정색 모루 여러 개를 가져와서 휴대전화 속 캐릭터와 닮은 형태를 만드는 작업을 개시했다. 과일캡에 동그라미를 그리던 드래곤은 한 마디에 서너 개의 동그라미를 그린 뒤 둥글게 튀어나온 부분에 점 두 개를 찍고 미소를 그렸다. 영락없는 문어의 형태였다. 그렇게 드래곤은 특정 재료에 관심이 생겨 작품에 쓸 재료로 채택하고 이와 생김새가 비슷한 사물을 떠올림으로써 본인만의 창작품을 만들어나갔다. 드래곤의 연상 및 연결 짓기 능력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용의 영감이 검색을 통한 캐릭터 선정에서 비롯되었다면, 드래곤의 영감은 비일상적인 장소에서 만난 일상적인 물체에서 비롯되었다. 그 기원에 차이가 있지만 어떤 방식이든 모야라는 공간이 아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업 방식의 차이점과 공통점
문어를 표현한 한 차례의 창작을 끝낸 드래곤은 또 다른 재료를 탐색하려 일어섰다. 용은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를 열심히 쳐다보다가 모루를 들고 자리를 이동하여 가위를 책상에 가져왔다. 재료 칸에서는 퐁퐁이가 달린 줄이 드래곤의 시선을 끌었다. 책상에서 용은 싹둑싹둑 모루를 자르면서도 계속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자신이 고른 캐릭터와 최대한 비슷하고 정교한 작업물을 만들고자 하는 꼼꼼함 혹은 조심스러움을 엿볼 수 있었다. 둘은 비슷한 시기에 가위를 사용했는데, 가위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두 작은 손의 특징을 비교할 수 있어 흥미로웠다. 용이 가위를 자기 자리로 가져와 모루를 잘랐다면 드래곤은 재료 칸에서 가위를 들고는 그 옆에 자를 재료가 있는 곳 앞에 서서 재료를 잘랐다. 용은 잘라놓은 모루를 도구로 사용해 비슷한 길이로 다른 모루를 잘랐고 드래곤은 재료가 가위로 잘 잘리지 않자 손으로 뜯는 방법을 사용했다. 각자가 가진 문제해결 능력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창작 과정에서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작은 손은 작업에 열중한 나머지 침묵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섬세함을 발휘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열매가 용에게 질문했다. “이런 거를 만들려고 생각했었어? 언제부터 생각한 거야?” 용이 답했다. “아까요.” 드래곤은 가지고 있던 퐁퐁이가 달린 줄을 두고 다시 한번 다른 재료를 탐색하다가 줄을 문어의 머리 부분에 둘러보았다. 줄의 양 끝이 목공풀로는 붙지 않았던지 작업을 잠시 멈추는 듯하다가 테이프라는 또 다른 접착물질을 발견했다. 용은 목공풀을 짜던 중이었다. 드래곤은 가위로 테이프를 잘라 하늘색 줄의 끝에 붙였다. 용은 목공풀의 양쪽 뚜껑을 다 열고 모루를 붙이려 시도했으나 목공풀이 자꾸 나오지 않았다. 드래곤은 넘치는 만큼 줄을 더 잘랐다. 목공풀 짜기를 멈춘 용은 다시 모루를 만지면서 몸을 빙빙 돌렸다. 열매가 어지럽다며 용의 행동을 지적하고는 안 나오는 목공풀 말고 다른 걸 가져오라고 말하자 용이 속상한 얼굴에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세 번째로 집은 건데.” 동시에 드래곤은 직접 잘라 써야 하는 테이프를 쓰다가 돌아가는 테이프를 발견하곤 하나를 뜯어 줄 끝부분에 붙였다. 용은 전보다 더 힘을 줘서 목공풀을 짰다. 자르기 과정에서 드래곤이 물리적인 방식을, 용이 전략적인 방식을 사용해 문제를 해결했다면 접착 과정에서는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작품과의 상호작용, 주변과의 상호작용
테이프로 줄의 양 끝을 붙이고 테이프가 넘치는 부분을 잘라서 문어 머리에 씌울 장식품을 완성해낸 드래곤은 문어 머리 위에 만든 장식품을 올려보았다. 용은 또 작업을 잠시 멈추고 주변을 빤히 쳐다보다가 창작을 재개했다. 드래곤은 테이프 하나로 고정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는지 테이프를 여러 개 뜯어 꼼꼼히 장식품을 문어 머리에 붙였다. 용은 붉은색 모루를 자르고 꼬아 특정한 모양을 만들면서도 드래곤을 한 번씩 쳐다봤다. 이제는 돌돌이 테이프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드래곤이었다. 드래곤을 보다 말고 용의 시선은 내가 있는 쪽으로도 향했다. 한창 드래곤의 작업을 관찰하던 나는 나를 향한 용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재료를 둘러보는 드래곤은 마음에 든 재료와 가위를 자리로 가져와 자르고 가위는 바로바로 도구 칸에 돌려놓았다. 재료를 고르는 속도가 꽤 빨라졌다. 용은 목공풀을 짜서 모루 붙이기를 시도하던 참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달팽이 집처럼 말려있던 모루를 풀어서 다른 형태로 만들고는 꾹 눌러보았다. 감기 기운에 작업 내내 코를 훌쩍이고 기침하던 용, 휴대전화를 다시 만지다가 또 나와 눈이 마주치자 몸을 배배 꼬았다. 그리고는 드래곤을 힐끗 쳐다본 것이 아니라 오래 응시했다. 드래곤은 책상 위에 두었던 색종이 용을 쓱 만지고는 뒤에 있는 재료/도구 칸으로 가서 탐색을 이어갔다. 그동안에 용은 작품 창작을 재개해 둥글게 만 모루의 양 끝에 목공풀을 붙이고는 합장하는 손 모양 안에 넣고 꾹 눌렀다. 그는 마치 부디 이번에는 모루가 붙길 바라며 기도하는 모습 같았다. 나도 함께 바랐다. ‘제발 붙어라!’
관찰 시간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열매가 운을 뗐다. 용은 모루를 만지작거리면서도 말하는 열매를 의식하고 있었다. 열매는 아무 말 없이 각자의 작품에 열중하는 두 아이를 보고 만들기를 선호하는 성향의 아이들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이렇게나 집중하며 창작하는 아이들은 1년 만에 보는 것 같다고도 하셨다. 힘을 줘서 접착을 시도하던 용은 도중에 드래곤을 쳐다보았다. 드래곤의 문어는 그의 손에 의해 오므려졌다가 눌러지고 있었다. 그 후 드래곤은 파란 하드보드지를 가져와 직사각형 형태로 자르기 시작했다. 드래곤은 하드보드지가 잘 잘리지 않아 두 손을 사용해 힘을 주어 잘랐다. 그 과정에서 용은 의자를 빙빙 돌리며 드래곤을 여러 차례, 오래 쳐다보았다. 드래곤은 테이프를 사용해 문어를 파란 합판에 붙였다. 용은 의자를 앞으로 당기고 모루 고정에 열중했다. 용이 작업 후반부에 낸 “하유” 소리를 듣고 미루어 짐작해볼 때 앞 친구에게 자극을 받으면서도 작업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아 답답한 듯했다. 그 초조함이 타인을 더 의식하고 몸을 움직이는 행위로 드러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끊임없이 재료를 어루만지며 작품에 의해 속이 상하기도 하면서 필요한 작업을 수정·보충한다는 점에서 작품과 상호작용하고, 애착이 형성되어 있는 물건이나 주위를 의식하며 주변과 상호작용하는 두 작은 손이었다. 그 배경에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아닌 돌돌이 테이프가 돌아가는 소리, 노트북 타자 치는 소리, 붙이는 소리, 코를 훌쩍이는 소리, 작은 손들이 돌아다니는 소리가 가득했다.
나의 배움
“이제 가신대. 모두 인사하자.” 열매의 말에 작은 미소를 머금은 작은 손들의 “안녕히 가세요.”라는 예쁜 인사로 기분 좋게 모야를 나섰다. 귀가하는 길에 작업실 바깥에 붙은 모야 선언문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스스로, 자유롭게,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시도하는 작업 공간. 공간의 힘은 대단했다. 기존에 작은 손이 적어놓은 “모야는 저에게 유일하게 만들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문구가 아이들에게 이 공간이 주는 가장 큰 의미가 아니었을까. 그 속에서 아이들은 어른의 직접적인 개입 없이 어떤 방식으로든 작품을 만들 기회를 누리고 자율적인 창작자로 거듭난다. 소개로 들었을 때만 해도 알지 못했다. 모야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작업에 얼마나 진심으로 임하는지, 아이들이 작업실 안에 들어가면 얼마나 달라지는지. 과제를 통해 아이들만의 작업 공간이 가지는 가치와 상호작용의 색다른 측면을 배웠다. ‘이건 뭐야? 저건 뭐야?’에서 비롯된 이름, 모야. 그곳에서 작은 손들이 보여준 특별한 발견과 상호작용이 아이들의 일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바란다. 아이들의 호기심이 각양각색으로 표출되는 공간이 모야가 유일하지 않기를, 그들이 존재하는 모든 환경이 곧 모야 같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