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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아 May 24. 2023

나의 청소년기와 엄마
: 엄마에게 쓰는 편지

대학 생활 적응기_청소년발달_'나의 청소년기 허심탄회하게 돌아보기'

- 사랑하는 엄마에게 -


  안녕, 엄마. 이번 학기에는 청소년 발달이라는 수업을 듣고 있는데 나의 청소년기를 돌아보는 글을 쓰는 게 첫 과제야. 나는 아직도 내가 청소년기에 속한다고 생각하고 과제를 시작하기 전에 이차성징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가 겪은 변화와 성장들을 쭉 나열해봤거든? 그러다 문득 엄마를 빼놓고 나의 청소년기를 논할 수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어. 엄마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성장에 기폭제가 되었던 사람이니까. 내 몸과 마음에 있어 큰 변화를 경험한 3번의 시기별 엄마에게, 그리고 나에게 손을 내밀어 보려 해. 청소년기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이차성징,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때의 엄마에게,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교 1학년 내내 계속되었던 딸의 영문 모를 눈물에 답답했을 엄마에게,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의존하는 사이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는 사이로 발전한 엄마에게. 각각의 시기마다 내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엄마는 어떤 심정이었을지 현재 나의 시점에서 이야기해보고 싶어.     


나의 신체 변화를 지켜봤던 엄마에게

  10살 무렵 나는 이차성징이 시작되었지. 엄마도 또래보다 성장이 빨랐다며 내가 어릴 때부터 엄마를 닮으면 어쩌나 걱정했던 엄마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나. 걱정은 현실이 되어버렸어. 나는 내가 친구들이랑 얼마나 달랐는지 잘 몰랐는데 엄마 눈엔 그게 다 보였나 봐. 2학년인가 3학년 때부터 성조숙증인지 검사받으러 같이 병원도 다녔잖아. 나는 어려서 엄마랑 붙어있을 수 있어서 마냥 좋기도 했지만, 남자 의사 선생님께 상의를 올려서 내 몸을 보여줘야 했을 때는 엄마가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했어. 엄마는 온통 나에 대한 걱정과 미안함으로 가득 찬 정신 상태에서 의사 선생님의 진단을 듣고 있었겠지. 그땐 엄마의 심정을 고려하기엔 내가 너무 어려서 내가 성장이 빠르건 느리건 나한테 아무 상관 없으니까 당장이라도 병원을 벗어나고 싶었어. 물론 지금의 나는 엄마를 전혀 원망하지 않아. 오히려 당시의 엄마를 걱정해. 지금의 내가 10년 전의 엄마와 대화할 수 있다면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꼭 말해줄 거야.

  학년이 높아지면서 엄마가 왜 그렇게까지 나를 걱정했는지 체감할 수 있었어. 내 눈에도 내가 친구들 사이에서 두드러지기 시작한 거야. 주변 친구들은 다 아이 티가 나는데 혼자서 성숙해 보이는 게 싫었고, 내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숨기기 바빴지. 4학년 때 가방에서 생리대를 꺼내기가 어찌나 부끄러웠는지 몰라. 나 혼자서 겪는 이차성징에 혼란스러워 한껏 의기소침했던 게 기억나. 4학년 때가 친구도 없고 자신감도 가장 낮았던 시기였던 듯해. 아마도 그때부터 나라는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가 어둡게 형성되지 않았나 싶어. 그래도 지금의 나는 완전히 밝지는 않더라도 건강한 분위기를 풍긴다고 자신할 수 있지. 물론 이렇게 변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말이야. 지금에서야 ‘11살이 성숙해봤자지’라고 생각해. 11살의 나에게는 모두가 언젠가 너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될 거고, 너와 그 경험을 공유할 날이 온다고, 언제나 자신에게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해주고 싶어.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엄마가 나한테 해줬던 말이기도 하네. 어두워진 나를 지켜보고 이렇게 말해줬을 때 엄마도 나만큼이나 힘들었겠다는 생각을 이제야 하게 돼.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던 엄마에게

  아기 때부터 엄마가 눈에 안 보이기만 하면 울던 내가 13살, 14살이 되어서도 그럴 줄이야. 13살은 그야말로 우울의 극을 달리던 시기였어. 나도 내가 왜 우는지 모르게 울 때가 많았지. 지금은 그 시기 감정 조절의 어려움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그때는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었어. 그래도 내가 울었던 핵심적인 이유는 엄마에게 과의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일상생활을 하다가도 느닷없이 엄마의 죽음과 남겨진 나를 상상하게 됐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엄마의 죽음이야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하고 슬퍼해 본 일이겠지만 나의 상상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지. 내가 고등학생이 돼서 집에 늦게 들어온다면? 대학교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엄마를 볼 수 없게 된다면? 결혼해서 엄마 말고 다른 가족을 만든다면? 일어날지 말지 알 수도 없는 미래의 일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가슴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을 매일같이 느꼈어. 말 그대로 엄마는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던 거야.

  내가 우울 상태에 빠지게 된 원인은 청소년기 뇌의 변화로 인한 감정 조절의 어려움일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 내가 처한 상황도 나의 불안에 한몫한 것 같아. 본격적으로 엄마와의 분리를 상상하고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나기 시작한 시점은 6학년 겨울방학이 다가올 때였어. 원치 않았던 수학여행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초등학교 졸업과 중학교 입학이 먼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느새 내 눈 앞에 펼쳐질 일이 되어버린 상황이었지. 변화에 원체 예민하게 반응했던 나는 차라리 시간이 멈춰버려서 나도, 우리 가족도 평생 변치 않았으면 했어. 그런데 야속하게 시간은 잘만 갔고, 점점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린 나에겐 버거웠나 봐.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눈물이 엄마 앞이라고 안 났을 리 없지. 내가 울 때면 입을 꾹 닫고 이유도 말하지 않아서 엄마를 얼마나 답답하게 했을지 모르겠네. 엄마의 답답함을 헤아리면서도 엄마가 ‘또 왜?’라고 말했을 때 솔직히 조금 섭섭했다? 엄마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다 알아줘야 한다고 생각했었던 걸까. 하여튼 내가 생각해도 난 너무 키우기 어려운 딸이었던 것 같아.

  인생에서 가장 우울한 시기를 보내고 중학생이 되었어. 학기 초에 반에 친구가 단 한 명도 없었는데 나랑 초등학교 때 친했던 같은 반 친구는 나를 두고 다른 친구를 사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어찌나 비참하던지. 슬픈 상황에는 항상 엄마 얼굴이 떠올라 또 눈물이 나고. 그해 3월은 하루하루가 견뎌내기 힘들었어. 그런데 있잖아, 내가 어느 순간 친구들과 웃고 있더라. 시간이 나를 괴롭게 했는데, 모든 걸 해결해주는 것 역시 시간이었어. 몇 년이 흐르고야 깨달았지. 14살의 나도, 새 친구를 사귀려고 노력하던 친구들도, 엄마도, 그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는 걸. 나는 그저 적응하는 데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아이일 뿐이었다는 걸.     


나와 함께 성장하고 있는 엄마에게

  나의 다름을 인정하고부터 나는 나만의 삶을 바라볼 수 있었어. 성장의 시작점이었다고나 할까. 여기에서는 엄마가 나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말해보려고 해. 엄마는 나의 버팀목이었어. 언제나 확실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는 않았어도 묵묵히 내가 나의 고통을 나눠주기를, 잠깐 들러 쉬어주기를 기다렸던 나무. 중학교 1학년 때도 그랬지. 네가 더 지내보고 그래도 견디지 못하겠으면 학교를 그만둬도 된다고. 나에 대한 엄마의 믿음을 느낄 수 있던 말이었어. 그 믿음은 어떤 방향으로도 성립돼. 내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일 수도,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어떻게든 잘 살아낼 거라는 믿음일 수도 있을 거야. 엄마의 마음이 나에게도 전달이 되어서 그런 건지, 평범하지 않은 길을 갈 용기가 없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에는 학교를 선택했고 3학년이 되어서는 친구들과 다신 없을 추억도 만들었지. 엄마가 우는 나를 몰아붙였다면 그 추억은 내게 없어.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야. 내가 잔뜩 스트레스를 받고 집에 와서 며칠간 신경질적이었을 때마다 엄마는 화를 낸다거나 서운해하기보다는 딸을 안쓰러워하고 내가 먼저 말해주기를 그저 기다려줬어. 나는 머릿속에서 내 상황과 감정에 대한 정리가 다 끝나고 나면 엄마와 대화했지. 엄마 덕에 내가 고난을 이겨내고 삶을 지속할 수 있었어.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품이 되어줘서 고마워.

  이상하게 엄마가 ‘~하지 않아도 돼.’라고 하는 말은 다 내게 자극제가 되더라.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었다가도 그 말을 들으면 반동형성이라도 되는 듯 도전하고 싶게 돼. 수능이 끝나고 서울대 면접을 준비하기가 죽기보다 싫어서 우는 애는 나뿐이었을까. 다 끝나고 놀고 있는 친구들이랑 울면서 통화할 때 친구들은 다 ‘그래도 어쩌겠어. 해봐야지.’ 하는 식의 반응이었는데 엄마는 달랐어. ‘네가 울 정도로 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아도 돼.’ 이 말이 대체 내 심리에 어떻게 작용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말 덕에 서울대에 왔네.

  물론 서울대에 오고 나서도 어려움이 많았지. 가족들이랑 이렇게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고, 엄마와는 특히나 각별했으니까. 2월 말에 기숙사에 같이 짐을 넣고 역에서 엄마를 보낼 때 둘이서 안고 얼마나 울었던지. 울보 모녀가 따로 없어, 그렇지?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떨어져 보지 않았으면 평생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남았을지도 몰라. 학교 안을 걷고 있다가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어. ‘나, 엄마가 곁에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구나.’ 이전까지는 상상만으로도 슬펐던 미래였는데 막상 현재가 되니까 버젓이 적응한 나와 마주하게 된 거지. 이로써 한 걸음 더 성장한 나를 발견했어. 내가 청소년기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곤 해. 엄마도 이제는 나 없는 생활에 적응했지? 내가 늘 말하잖아. 우리는 독립된 개체이고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엄마도 나와의 의존 관계에서 벗어나 엄마만의 성장을 경험하고 있으리라 믿어.     


다시 현재의 엄마에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내가 나의 삶을 살 수 있게 해준 사람이 엄마인데 정작 엄마는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엄마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거야. 그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아플 때도 많아. 방학 때 우리가 각자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대화 나눴잖아. 엄마는 작은 가게를 차려서 토스트 만들어 팔고 싶다고 했고. 그때 내가 그랬지. 엄마가 원한다면 언제든 휴학해서 엄마 꿈 이루는 데 보탤 수 있다고. 엄마는 나를 그렇게 두지 않겠지? 그래도 엄마의 꿈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내 삶은 잠시 방향을 돌릴 수 있어. 그 또한 나의 행복일 거고, 내 삶의 일부일 거야. 이 사실을 엄마가 꼭 기억했으면 해.

  나의 버팀목이자 자극제로서, 관계성의 변화로서 청소년기의 내가 바르게 성장할 수 있게 한 엄마, 별난 나를 키우느라 고생했어. 미안하고 고마워. 앞으로도 자신의 위치에서 노력하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는 엄마와 딸이 되자. 나의 삶을 위해서, 엄마의 삶을 위해서. 사랑해.     


둘째 현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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