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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아 May 24. 2023

⟨입학식 축사⟩에 대한 답사

대학 생활 적응기_대학 글쓰기1_'대학 글쓰기에 묻고 답하다'

넷째, 대학시절은 씨앗을 땅에 뿌리는 계절입니다.
오늘은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도 새봄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추운 겨울을 지내고 농사를 시작하는 정월보름에 오곡밥을 지어먹습니다.
오곡밥을 먹는 풍습은 땅에 씨앗을 심기 전에 먼저 씨앗을 확인하기 위해서 입니다.
겨울동안 곡간에 갈무리했던 씨앗이 건강하게 살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오곡밥을 지어 먹습니다.
봄은 꽃의 계절이 아니라 씨앗의 계절입니다.
여러분의 오늘이 아름답고 빛나는 날임에 틀림없지만 오늘은 결코 찬란한 꽃의 날이 아닙니다.
씨앗의 시작입니다.
아름다운 꽃도 결국은 씨앗을 위한 것입니다.
미련 없이 떨어져 씨앗을 영글게 하는 멀고 먼 여정의 어느 길목에서 꽃은 피었다 집니다.
그래서 꽃을 찬란한 슬픔이라고 노래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오늘이 저마다 씨앗을 땅 속에 묻는 날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땅 속에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잎을 틔우는 긴 여정의 시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신영복, 2006년 서울대학교 입학식 축사 中


꽃을 피우리라는 기대와 함께 시작된 대학 생활의 첫 학기가 어느새 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 달 남짓한 시간 동안 끊임없이 실망을 반복했던 까닭은 씨도 미처 뿌리지 못한 채 꽃을 열망했기 때문임을 이제서야 깨닫습니다.


이번 학기에 거의 유일했던 낙은 글쓰기였습니다. 나름대로 만족할 수 있는 글을 완성해낸 기쁨은 제가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성취감이었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든 상관없다는 생각에 두 가지 공모전에 응모했습니다. 두 글을 쓰는 모든 순간 행복했고 완성한 글들을 너무 좋아하게 된 나머지, 좋은 결과를 기다리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당선작 공지에서 제 이름을 찾을 수 없자 저는 이전 생각과는 다르게 정체성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까지 받았습니다. 고작 공모전 결과 2개로 말이죠. 한창 남들과 저를 비교하며 알 수 없는 패배감을 느끼던 시기였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그러던 중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아나운서이자 작사가로 활동하는 분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채택되지 않은 300여 건의 가사에도 불구하고 가사를 쓰는 시간이 행복하기에 자존감을 지킬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를 보고 깨닫습니다. 좋아하는 일로 성공을 거둔 사람도 여전히 수없이 거절당하고 있음을, 거절을 두려워하지 않고 행복하게 글을 쓸 수 있음을, 성공은 뿌려놓은 수백 개의 씨앗 중 피었다 지는 일부의 꽃일 뿐임을.


지금도 저는 봄의 씨앗을 뿌립니다. 씨앗을 뿌리는 지금이 빛나는 까닭은 피어날 꽃 때문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씨앗 덕분임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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