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가족학 전공생의 글쓰기_가족관계_영화평
<What’s eating Gilbert Grape>는 길버트의 가족 이야기를 담은 영화이다. 영화 속 가족은 그들이 사는 집과 같이 위태로워 보인다. 영화 초반에 가족이 대화하는 장면을 통해 가족 구성원의 특징과 더불어 그레이프 가족이 건강하지 않은 상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니의 생일 파티를 의논하는 과정에서 당연한 듯 케이크를 만들어준다는 장녀 에이미, 지칠 대로 지쳐 보이는 길버트, 불평불만으로 그를 더 피곤하게 만드는 막내 엘렌, 자기도 무언가 하고 싶은지 자꾸 보채는 어니, 어니를 보듬어주면서 사이좋게 의논하지 못하는 나머지 자식들은 꾸짖는 어머니. 이들의 대화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갑갑함을 유발한다. 이는 집에서 가장 많은 책임을 떠안고 있는 길버트가 이 영화의 화자이기 때문이다. 다른 가족 구성원이 자기 할 말만 하는 상황 속에서 카메라는 대화에 잘 참여하지도 않는 길버트를 담고 있는데, 가족들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서 드러나는 ‘벗어나고 싶음’, ‘답답함’과 같은 감정에 시청자는 몰입하게 된다. 영화 제목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길버트를 갉아먹는 무언가’이다. 그렇다면 제목에서 ‘무언가’는 과연 가족을 의미할까? 그레이프 가족을 분석해봄으로써 질문의 답을 찾고, 나아가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발견해볼 것이다.
가장 먼저, 가족 관계에서 기본이 되는 가족 구성원의 역할과 규칙에 대해 논해보려 한다. 역할 분담은 다음과 같다. 에이미는 요리를 비롯한 집안일 대부분을 책임지고, 길버트는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경제활동을 하며 어니를 돌본다. 구체적으로는 어니의 주 양육자가 되어 어니를 씻기기, 어니를 데리고 다니면서 가스탱크에 오르지 못 하게 하기 등, 어니에게서 눈을 떼지 않기를 요구 받을 정도로 과도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 엘렌은 막내딸로, 에이미의 부탁에 집안일을 보조하고 어쩌다가 길버트가 없을 때 어니가 가스탱크에 오르지 않게 하기도 한다. 어머니는 집안의 최고 권위자로서 자식들의 갈등을 중재하거나 그들을 꾸짖는 역할을 맡는다. 어니는 때때로 가족들을 지치게 만들기도 하지만 천진난만함으로 가족들에게 미소를 선사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역할 분담은 길버트에게 너무 가혹하다는 점에서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경제활동과 형제 돌봄 모두 막중한 부담이 되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가족들이 어니와 관련된 사항을 전적으로 맡기는 경향이 있어 어니가 사라지기만 하면 질책의 화살이 항상 길버트에게만 돌아가는 장면도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내가 발견한 그레이프 가족의 규칙은 크게 3가지이다. 첫째, 어니에게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 길버트가 이 규칙에 가장 민감했던 편으로서 누군가가 어니를 건드렸을 때 화를 내며 어니를 지키고자 했다. 둘째, 어머니와 어니 앞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 어머니에게 아직 남편을 잃은 사건이 여전히 트라우마로 남아 있고, 어니에게도 그 사건이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서인지 아니면 상황의 엄중을 따질 능력이 부족해서인지 관련된 이야기가 들리면 어니는 장난스럽게 ‘아빠는 죽었다!’를 여러 차례 외치거나 목을 매는 동작을 반복한다. 그러한 반응은 어머니를 괴롭게 만들어 재앙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셋째는 어머니를 남들의 놀림 대상으로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초고도 비만이 되어버린 어머니는 주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이자 조롱 대상이 되고, 이러한 사실은 어머니의 수치심을 자극하여 그를 더욱 집 안으로 몰아넣는다. 이 규칙은 길버트의 이유 모를 반항 심리로 깨지기도 했으나 어머니가 죽자 그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지켜졌다. 그 외에도 어니의 숨바꼭질 놀이에 항상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는 그들만의 귀여운 규칙을 찾아낼 수 있다. 이는 길버트와 어니가 화해하는 데 중요한 해결책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문제라고 생각되는 규칙은 두 번째이다. 다른 규칙들은 결과적으로 가족을 지키고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일정 부분 이바지하지만, 두 번째 규칙은 그렇지 않다. 아버지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고 해서 슬픔이 치유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작정 그와 관련된 대화와 감정을 억압하는 방법이 당장은 아픈 기억을 떠올리지 않는 데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내면의 응어리를 키울 뿐이기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특징을 가진 그레이프 가족은 변화에 어떻게 반응해 왔을까? 이번 단락에서는 가족 내외적으로 발생한 변화로 인한 어려움이 발생했을 때 가족 항상성이 유지되었는지 살펴보려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 속에서는 항상성 유지의 성공과 실패 양 측면이 모두 등장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남편의 죽음 이후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결국 자식들에게 짐이 되어버린 어머니의 모습은 항상성 유지에 실패한 사례이다. 길버트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어니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했음에도 가족 구성원 내에서 길버트의 역할 부담을 줄이려는 시도가 없었던 점 역시 항상성 유지 실패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레이프 가족이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어니가 또 한 번 가스탱크에 올라가 파출소로 연행되었을 때, 어머니가 어니를 데려오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7년 만에 집을 나오는 장면은 충분히 항상성 유지 성공 사례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는 위 내용을 기반으로 그레이프 가족의 기능에 진단을 내려보도록 하겠다. 우선, cohesion 측면에서 그레이프 가족은 enmeshed 한 상태에 해당한다. 그렇게 판단한 근거로는 래리를 제외한 가족 구성원 모두가 어릴 때부터 살아온 집에서 함께 사는 점, 길버트가 어딜 가든 어니와 함께한다는 점, 길버트와 어니를 제외한 가족 구성원이 집 밖에 나오거나 가족 외 사람을 만나는 장면이 거의 없는 점, ‘다신 어머니 눈앞에서 사라지면 안 돼’, ‘사라지는 거 정말 싫다고.’와 같은 어머니의 대사에서 알 수 있는 자식들을 향한 집착이 있다. 남편과 사별한 후 몇 년간 바깥 생활을 아예 하지 않고 일상생활이 정지해버린 어머니를 보고 부부 관계 역시 enmeshed 한 상태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남편을 잃은 기억이 자식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이어지면서 아이들에게 엄마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사고를 주입함과 동시에 가족 전체의 응집력이 과도하게 높아진 것이라고 판단했다. 어머니와 어니의 관계가 특히 enmeshed 한 편으로,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된 coalition 역시 확인이 가능하다.
Flexibility 측면에서 그레이프 가족은 rigid 한 편에 속한다. 거주 환경과 생활 방식에 있어 변화가 거의 없으며, 가족 구성원 간의 역할 분담도 철저한데 누군가가 자칫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을 때 대안이 없어 발생하는 문제 상황을 통해 해당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어머니의 일방적인 꾸짖음에 변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길버트나 식사 자리에서 어머니 눈치를 보기 바쁜 자식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어머니의 권위도 rigid 한 가족 분위기의 원인이 된다. 이에 따라 길버트는 마음 깊은 곳에서 자유를 갈망하는데, 영화 초반부에 나오는 ‘항상 떠날 수 있는 그들이 부럽다.’라는 독백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부인과의 성적인 관계, 여유롭고 자유로운 삶을 사는 베키에게의 끌림 모두 길버트에게 잠시간의 일탈이자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틈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가족 분석은 여기에서 마치고, 이제는 그레이프 가족이 더 건강하게 기능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안이 필요할지 고민해야 할 때이다. 분석을 바탕으로 내가 그레이프 가족에게 줄 수 있는 현실적인 조언을 3가지로 정리해보았다. 첫째는 ‘역할 교체의 시간 혹은 돌아가면서 구성원 중 한 명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시간 마련하기’이다. 그레이프 가족의 경우 각자의 역할이 고정되어 있다. 이가 문제시되는 이유는 그 때문에 각자가 역할 수행에서 경험하는 어려움을 서로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누군가의 희생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지적 장애인인 어니를 돌볼 책임이 길버트에게 쏠려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한 사람이 맡는 역할이 특수적일수록 역할 교체나 자유시간을 마련하여 가족이 어려움과 책임을 나누는 방책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둘째는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 봄으로써 남은 가족이 함께 추억이나 슬픔을 나누고 건강한 관계로 발돋움하기’이다. 아버지의 죽음이 그레이프 가족에게는 너무 큰 사건이었기에, 그 이후 가족 기능이 일정 부분 멈췄고 가족끼리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는 것 역시 금기시되고 있었다. 가족의 죽음은 누구에게나 감당하기 버거운 경험이지만 모든 사람이 가족의 죽음으로 인해 자기 삶 역시 정지시켜버리는 것은 아니다. 가족 탄력성 개념을 적용해볼 때 가족의 죽음은 가족 내외적 요인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 가족 내에서의 회복이 힘들다면 외부 치료의 도움을 받아 살아있는 사람들은 제 기능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 마지막은 ‘가족회의 시간 가지기’이다. 그레이프 가족은 가족끼리 진솔한 대화가 부족했다. 가족이 모인 시간에는 다 같이 밥을 먹거나 텔레비전을 볼 뿐, 일상을 공유한다거나 자신이 겪은 어려움을 솔직히 털어놓는 시간이 없었다. 따라서 회의를 통해 가족 내에서 느낀 불편함, 바꿨으면 하는 역할이나 규칙, 요구 사항 등을 대화로 풀어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길버트를 갉아먹는 무언가’에서 ‘무언가’는 정말 ‘가족’을 의미할까? ‘예, 아니요’로만 대답해야 한다면 나의 답은 ‘예’일 것이다. 길버트의 고통은 가족이 지닌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족이 고통만 주는 존재였을까?’라고 묻는다면 나의 답은 단연코 ‘아니요’이다. 줄곧 가족들에게 잔뜩 질린 듯한 얼굴을 했던 그이지만 그 내면에는 사랑이 뿌리 깊이 박혀있었다. 은근슬쩍 어머니를 놀림거리로 만들었던 길버트는 어머니가 죽어서까지 놀림거리가 되는 일을 막기 위해 과감한 결단을 내렸으며, 어니라는 족쇄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으면서도 어니를 욕조에 방치한 후, 그리고 분노를 참지 못해 어니에게 손찌검한 후 누구보다 괴로워했던 그이다.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 어니가 보여준 행복한 미소는 끝내 그를 녹였다.
‘가족이 없는 길버트’는 정의할 수도 없을뿐더러, 애초에 무의미한 가정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가족이 짐과 같은 존재이더라도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길버트가 있는 것이니까. 이야기의 시작을 알린 길버트의 독백 ‘항상 떠날 수 있는 그들이 부럽다.’는 이야기를 끝을 알리는 독백 ‘어니가 우리는 안 떠날 거냐고 묻길래 원한다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했다. 어디든 떠날 수 있다고.’로 끝난다. 길버트는 결국 고통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은 게 아닐까? ‘그레이프 가족’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이 영화가 세상의 모든 ‘길버트’에게 자신과 가족을 되돌아볼 기회와 따뜻한 위로를 주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이 변화를 향한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