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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 Apr 24. 2024

크리스마스와 패션쇼와 스파이더맨

 크아, 카트라이더, 바람의 나라... 다들 해 보셨나요? 나는 당시에 유행하던 대부분의 온라인게임 뿐 아니라 CD게임까지 섭렵한 게임 키드였다. 좋게 말해 게임 키드지, 게임 중독 테스트를 했다면 '심각' 이 나왔을 수준이었다. 동네 친구들과 만나서도 온라인 게임을  변형한 오프라인 놀이를 하고 놀았으니 말 다 했다. 뭣이 그렇게 재미있던지. . .  하루 컴퓨터 이용 시간이 1~2시간을 넘어가면 엄마의 팔자 눈썹을 보며 하이톤의 꾸지람을 들어야 했기에, 대학생이 되어 집을 나왔을 때 컴퓨터를 하루종일 해도 아무도 꾸중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가장 행복했다. 이렇게 유년시절동안 컴퓨터를 끼고 살았는데, 나의 긴긴 게임 히스토리 중 크리스마스 하면 꼭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있다.   


 문제의 게임은 출시 초반에는 '방송 게임' 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참으로 직관적인 작명이다. 추후에 '스타 메이킹'으로 바뀌긴 했는데 이름에 나와있는 것 처럼 방송을 하는 게임이었다. 자세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체험 삶의 현장' 스튜디오에서 조개껍데기 따위를 줍는 등 각종 미니게임 노가다를 통해 돈을 벌고 레벨업을 해서, 레벨 20이 되면 20만원이라는 거금을 내고 가수, 배우, PD 중에 직업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 때 그 시절 게임이 다 노가다판이었기에 군말 없이 100원 200원씩 모았으나 고작 하루 1시간 플레이만으로 20만원을 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대충 이런식으로 생긴 게임






 그러던 어느날,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해의 크리스마스 저녁에 나는 초보답게 대머리에 내복차림으로 광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조개껍데기를 주워서는 옷과 헤어를 장만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의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는데, 광장 바닥에 코디 세트 아이템이 떨어져 있었던 것. 엥! 나는 보자마자 바로 줍줍했고 그 의상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핑크빛의 '힙합 소녀'로 코디해주는 황홀한 아이템이었다. 바로 착용했던 걸 보면 레벨 제한도 없었던 것 같다. 노가다 게임을 많이 해본 어린이들은 알겠지만 공짜로 그런 풀 치장템을 얻는 것은 엄청나게 희귀한 일이었으므로 나는 무척 들떠버렸고,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만끽하며 신나게 돌아다니는데 광장에서 어떤 남자가 크리스마스 기념 이벤트를 열고 있었다.





대머리에 내복 차림







남자 : [전체] 크리스마스 기념 패션쇼가 있으니 신청하세요!! 상금은 2억 원

나 : ???




 지금 생각해도 웃긴데 무슨 상금이 2억원 씩이나? 너무 터무니없어서 당시에도 황당해 했던 것 같다. 어쨌든 믿거나 말거나, 돈과 가오는 없어도 바닥에서 주운 옷은 있었던 나는 잽싸게 참가 신청을 했다. 패션쇼장에 들어가니 참가자가 꽤 많았는데, 관객석에 있다가 자기 이름이 불리면 런웨이로 올라가 워킹을 한 후 마지막에 관객들을 향한 한 마디를 날려 자기PR을 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주최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호응을 잘 해주는지도 점수에 포함된다고 해서 나는 다른 참가자들의 쇼가 끝날 때마다 '짝짝짝~' 또는 '00님 넘 멋지당~~>ㅁ<' 등의 채팅을 치며 실재하는지도 모르는 2억원을 얻기 위해 손가락을 분주히 놀렸다. 그러다 드디어 마지막에 내 이름이 불렸고, 난 바닥에서 주워 입은 핑크 힙합 소녀 코디를 컨셉으로 무대에 올라 열심히 매력을 뽐냈다. 




나 :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000입니다!!! 비록 저는 레벨도 낮고 어쩌구 저쩌구 하지만 어쩌구 저쩌구 이쁘게 봐주세용~~*^0^*


  


 대충 이런 식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너무 긴장해서 손을 벌벌 떨며 타자를 쳤던 것 같다. 

 그리고 대망의 우승자 발표.




남자 : 오늘의 패션쇼 우승자는....

남자 : 000님!!



 오 마이 갓...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내가 우승자라니! 그렇게 사람들의 축하를 받은 후 믿을 수 없다는 말투로 수상소감까지 완료. 그리고 남은 것은 2억을 받는 일 뿐이었다! 2억이라니... 이 돈이면 더이상 체험 삶의 현장인지 삶은 현장인지에서 껍데기 따위는 평생 안 주워도 된다! 꿈에 부풀어 있던 나에게 남자는 상금을 주기 위해 교환을 걸었고, 난 기다렸던 터라 번개같이 수락했다. 그런데 남자는 교환 창에 2억 대신 스파이더맨(남자용) 옷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당황하며 교환을 취소했고, 남자는 다시 교환을 걸어 스파이더맨 옷을 올렸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되었다. 화가 난 나는 남자에게 따져 물었다. 참가할 때만 해도 2억은 믿거나 말거나였지만 우승자가 되고 나니 2억을 못받으면 주최자를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 : 님-_- 아까 2억 주신다면서요?? 왜 자꾸 스파이더맨 옷만 줘요ㅡ.ㅡ 그것도 남자껄루...

남자 : 그거 팔면 2억 나와요. (침착)




  네...?





 그리고 남자는 나에게 다시 교환을 걸었다. 자세히 보니 스파이더맨 아이콘 위에 약 '8000' 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보통 아이콘 위에 쓰인 숫자는 아이템의 갯수를 말하는데, 남자는 스파이더맨 옷을 8천개 주려고 올린 것이었다. 헉. 한 번의 교환이 끝나고는 두 번 더 교환을 걸어 8000개씩 총 3번, 약 2만 4천개의 스파이더맨 옷을 줬던 걸로 기억한다. 이렇게 황당무계한 일이 있나! 2만 4천개라니... 나는 감사 인사를 대충 하고 당장 상점에 달려가 스파이더맨 옷을 다 팔았다. 다 팔고 나니 진짜 2억이 넘는 돈이 생겨 있었다. 크리스마스인 데다 그렇게 큰 돈이 생긴 게 너무 기뻤던 나는, 사람들이 보통 '백만장자가 되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생각할 때 떠올릴 만한 일들을 모조리 다 했다. 


 상점에 있는 옷을 다 사고, 머리도 다 사고, 모든 아이템을 다 사서 써본 후 껌값(20만원)을 주고 배우로 전직도 했다. 그래도 돈이 너무나 남아돌아서 광장에다가 옷을 뿌리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교환을 걸어서 아이템이나 돈을 거저 주었다. 그래도 돈이 남아서 같은 계정으로 아이디를 2개 더 만든 후 각각 가수와 PD로 전직시켰다. 근데도 돈이 또 남았다. 아마 1억 9천만원 정도가 남지 않았을까?(추측) 그러고 나니 돌연 게임이 몹시 지겨워졌고 3일 만에 접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큰 돈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할 수도 있다는 게 사실이었다. 심지어 그 이후로 그 게임을 다시 들어가 보지도 않았다. 패션쇼라도 다시 열었어야 했나. 2억이라는 터무니없는 상금을 걸고 패션쇼 이벤트를 열었던 주최자의 마음이 백번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스타메이킹이라는 게임과의 인연은 그걸로 끝이었다. 별 내용도 없는데 학생들한테 얘기해줄 때마다 다들 깔깔 웃는다. 특히 스파이더맨 옷 2만 4천개 부분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웃는다. 나는 너무 많이 얘기해서 이제 안 웃긴데 우째 그렇게들 웃는지! 올 해 애들한테는 '돈이 많으면 행복한가?'를 주제로 토론할 때 썰을 풀었다. 내년에도 또 얘기할 거다. 비록 스타메이킹은 망했지만 1년에 30명씩 내 얘기를 듣고 있으니까 우리들의 마음 속에는 살아있는 것이다. 뭔 소린지... 아무튼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어김없이 떠오른 기억이었다.


2021. 12. 25. 토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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