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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 Apr 23. 2024

아무것도 모르는 밴드

 밴드 음악을 좋아한다. 고등학교 야자시간은 마룬 파이브와, 대학 시험기간은 오아시스와 함께 보냈다. 취업 후에는 작고 소중한 월급을 공연 티켓에 꾸준히 투자했다. 집채만 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뒤통수가 짜릿할 만큼 벅찬 느낌, 관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 소리에 중독된 나는 결국 그 일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드럼과 일렉 기타, 베이스 기타를 몇 년에 걸쳐 차례로 배웠다. 악기를 배우는 일은 무척 즐거웠다. 특히 베이스는 화려하진 않지만 밴드에 꼭 필요한 악기다. 또 배우는 사람이 적은 편이어서 나는 그런 베이스를 배우는 내 자신에 꽤나 취해 있었다. 하지만 1:1 레슨만으로는 나의 락스타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기에 합주를 할 방법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초보 음악가를 찾아 주변을 기웃거리던 어느 날, 직장 동료가 일렉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려주었다. 나는 음흉한 미소와 함께 "난 베이스 칠 줄 아니까, 언제 한 번 가볍게 합주나 해 보자."라는 유혹의 말로 대망의 첫 멤버 영입에 성공했다. 그리고 드럼의 '드'자도 모르지만 사람은 무진장 좋아하는 후배에게 "드럼은 내가 가르쳐 줄 테니까 넌 따라 하기만 해. 합주 끝나면 무조건 회식이다!"라는 말로 즉시 섭외 완료. 그 후에는 노래방에서 입이 떡 벌어지는 노래실력을 보여준 동료를 보컬로, 그 옆에 앉아있던 후배를 키보드로 영입했다. 이렇게 엉겁결에 만들어진 우리 5인조 직장인 밴드의 이름은 '아무것도 모르는 밴드', 이름 하여 아모밴.


 일주일에 한 번 있는 합주 날이 되면 아침 출근길에 악보와 베이스를 챙겨 나온다. 자, 이때부터 시작이다. 어깨에 베이스를 비스듬히 걸쳐 메고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나는 그저 그런 피곤한 직장인에서 벗어난다. 음악인, 밴드, 락스타, 힙, 뭐 그런 단어들이 돌연 내 자아의 90%를 차지하고 왠지 발끝에서부터 힘이 솟는다. 그냥 등에 악기만 멨을 뿐인데! 나는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음악인으로서의 나를 잠깐 만끽해본다. 그리고는 이 자아를 숨긴 채 조용히 일을 마치고, 퇴근 후 다 같이 만나 합주실로 향한다. 


 ‘악기를 멘’ 멤버들과 옹기종기 모여 합주실로 가는 길은 왠지 홍대 거리 같기도 하고 평소랑 좀 다르다. 합주실이 지하에 있는 것도 은밀하게 느껴지고, 습하고 퀴퀴한 냄새조차 우리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비로소 직장에서 벗어났다는 게 실감난다. “친구한테 코딱지 묻히지 마라!”따위의 얘기를 하지 않아도 되고, “누구랑 누구랑 싸워요!”같은 말에 점심을 먹다가 뛰쳐나갈 일도 없다. 이곳은 직장인으로서의 시간이 끝나고 여유가 자리한 그 틈에 방문할 수 있는 오직 우리만의 세계다. 코딱지도 콧물도 말대꾸도 없는 어른의 세계.


 합주 전 먼저 각자 연습 시간을 갖는다. 이때도 물론 음악인의 자아는 계속해서 불타오르고 있다. 복잡한 장비 사이를 요리조리 걸어가다가 전선에 걸려 넘어지고, 등 뒤로 스피커가 쏟아지고, 악기 세팅을 잘못해서 귀 째지는 소리가 나도 괜찮다. 지금 이 모습은 그저 청춘영화 또는 '새내기 밴드의 우당탕탕 성장기' 영상 속의 한 장면이니까. 나는 그 주인공 역할에 걸맞게 악기 가방에서 베이스를 꺼내어 스탠드에 세우고, 부드러운 헝겊으로 악기의 몸체와 줄을 닦는 일련의 과정을 정성스레 수행한다. 잘 닦인 악기를 메면 4kg의 묵직한 감각이 나를 편안하게 눌러준다. 전원을 연결하고, 검지와 중지 끝으로 줄을 튕기면 굵은 쇠줄이 부드럽고 빠르게 진동한다. 바닥까지 울릴 정도로 두우웅- 하고 퍼지는 낮은 소리를 들으며 합주곡을 연습한다. 


  그 후에는 드럼 연습을 돕는다. “맞아 그거야. 잘했어.” 시범도 보여주고 악보 읽는 법도 알려주며, 레슨을 따로 받지 않는 후배의 드럼 실력을 한껏 업그레이드 시킨다. 합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음정이나 박자가 안 맞는 부분을 기억해 뒀다가 악기별로 피드백을 해 준다. 그러면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던 멤버들은 안대를 벗고 발맞춰 달리기 시작한다. 따로 놀던 소리들이 톱니바퀴 맞물리듯 점점 맞아가며 합을 이룬다. 창문이라도 깰 듯한 드럼 비트와 묵묵히 낮은 소리로 전체를 받쳐주는 베이스. 떨어지는 꽃잎 같은 피아노 멜로디와 이리저리 변주하며 전체를 가로지르는 기타 소리. 거기에 힘 있고 청아한 목소리가 합쳐지면 나는 속으로 ‘이렇게까지 재미있어도 되는 걸까’하고 생각한다. 반복되는 연습 끝에 마침내 합주가 성공적으로 끝나면 상기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본다. ‘됐다, 됐어.’  


 이렇게 합주를 할 때면 온 정신을 집중하는 동시에 이상한 기분이 든다. 분명 나는 지금 연주를 하고 있는데 마치 유체이탈을 한 것처럼 '내 모습을 보는 나'가 동시에 느껴진다. 멋들어진 무대매너나 화려한 기교는 없지만 나는 끊임없이 '음악인으로서의 나'를 의식한다. 비록 작은 지하 합주실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끼리 아주 쉬운 노래를 연주하고 있지만, 줄을 퉁기는 이 순간에는 내가 오아시스, 그린 데이, AC/DC가 된다. 그토록 열망하던 웅장한 밴드 사운드의 일부가 된 느낌. 관객은 없어도 괜찮다. 내가 나를 보고 있으니까.


 합주가 끝나면 함께 저녁을 먹거나 술잔을 기울인다. 식당 한구석에 시커먼 악기 가방을 세워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마지막까지 밴드 컨셉은 잃지 않는다. 돈 없는 가난한 밴드도 됐다가, 전세기 타고 해외투어 도는 밴드도 됐다가, 매니저도 있다가 없다가. 우리는 웃고 농담 따먹기를 하며 다음 곡을 정한다. 이 하루 동안은 실수하는 나, 자신감 없는 나, 사랑받지 못하는 나, 아무것도 아닌 나는 잠깐 지워지고 '밴드에서 베이스를 연주하는 멋진 나(심지어 리더!)'만이 남는다. 낮과 밤이 다른 영화 속 히어로들처럼, 합주 날만 되면 다른 사람이 되는 듯한 이 느낌이 나는 마음에 든다. 언제까지 이 우당탕탕 성장기가 계속될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싸움이 나서 갑자기 해체하게 되어도 괜찮다. 전설적인 밴드는 해체로 완성된다는 말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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