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도시연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시연필 Jul 05. 2017

설마포장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에 대한 기다림과 믿음

감정에 대한 대화를 하는 순간들. 이런 순간은 평소보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농도가 달랐다. 단어 하나하나를 신경 써서 전달했다. 그리고 전달된 상대의 표정과 작은 움직임들을 살폈다. 그렇게 주고받으며 서로의 감정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런 대화의 시간들을 자주 갖길 원했지만, 보통은 절제 능력의 한계가 다가왔을 때,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시작하곤 했다.


진행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무언가를 들킨 것 같은 마음은 창피하면서 두려운 듯 다시 뒤로 숨곤 했다. 그렇게 매번 느꼈었다. 그럼에도 계속 시도했던 이유는, 점점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졌음을 분명히 느꼈기 때문이었다. 물어보고 물어보고 물어보고 물어봤다.


보통은

감정에 대한 질문들이 마음의 거리가 언제든 서로를 만질 수 있는 거리로 좁혀지도록 도움을 줬다. 이런 거리가 되었을 땐 아무런 이유 없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 안정감을 주고받았다. 이것이 안정된 사랑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게 안정된 연인의 모습은 편안했다. 무언가를 보고 있는 옆모습을 보고 있을 땐 그냥 그 옆모습을 보는 것으로 좋았고, 그 무언가를 보며 웃고 있을 땐 바보처럼 같이 웃으면서 뭐가 그렇게 재밌냐고 물어보곤 했다. 그렇게 내가 원하는 모범적인 관계로 발전시켜줬다. 보통은.


이러한 시도들이 항상 같은 결과를 가지고 오진 않았다. 짧게 만났던 한 연인은 좀처럼 그 거리를 좁힐 수 없었다. 시간의 문제가 아닌 마음가짐의 문제 같았다. 감정을 물어보면 대답하지 않고 자리를 피했다. 끝은 참담했다. 때론 진심이었지만 때론이 아닐 땐 의심이었다고, 나를 이렇게 좋아해 주니까 이래도 되겠지 라는 행동들을 했었다고, 번화가 한 카페에서 마지막 고백을 받았다.


고백보다는 자백이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과 점점 무례해지는 표현들이 생각나면서, 내가 왜 이런 사랑을 해야만 하는지 알 수 없는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감정에 대한 질문을 다시 시작했고, 상대는 오랜 시간을 고민했다. 그렇게 받은 자백이었다. 가장 짧은 시간에 좋아했지만, 가장 짧은 시간에 헤어진 연인이었다.


먼저 가라고 자기는 좀 더 있다가 가겠다는 작별인사를 듣고 집으로 왔다. 굉음과 가까운 소나기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나름 착하게 살아왔는데 벌을 받는 느낌이 들면서 그치지 않는 소나기 소리가 무서워졌다. 오랜 시간 동안 소나기가 왔다. 현실감이 떨어지면서 소설 안으로 들어온 느낌이었다.








사귀는 사이가 되는 것. 즉 사랑의 시작을 기준으로 '설마'라는 포장은 긍정적인 사고이고, 상대에 대한 예의이며, 기다림이자 믿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생각-마음-느낌을 믿기보다는 상대의 행동이나 표현이 불편하더라도 설마포장을 열심히 해서 그 사실들을 부정하고 무시했다. 그 효과는 생각보다 좋았다. 조심스럽던 상대의 행동들이 조금씩 진심으로 다가오며 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렇게 더 이상 설마포장을 하지 않는 사랑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내가 간과한 것은 진심이었다. 사랑은 진심의 순간들을 유지하는 것이 전제이며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게 문제가 되는 경우는 없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익숙하지 않아서

잘 몰라서

부끄러워서


이런 이유의 표현과 행동들은 어떤 형태로 다가와도 설마포장이 가능했다. 함께하고자 하는 진심이라는 형태가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에. 그치만 진심이 없는 표현과 행동은 형태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포장 자체가 불가능했다.


기준이라는 것이 점차 사라지는 시대에서, 다른 것 / 틀린 것을 구분 짓는 것은 어려운 것 같다. 나와 다를 뿐이라는 사고는 넓은 이해와 포용, 심리적 위안과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지만, 분명하게 기준이 존재하는 것들과 틀리다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윤리와 사랑이라고 본다.


사랑하는 관계에서 함께하고자 하는 진심이 유지되는 않는다면, 이것을 단순한 사랑의 성향이라고 치부한다면, 나는 사랑에 대해 짐작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싫다에 가깝다. 여러 종류의 사랑이 존재한다지만, 다양성의 관점이 아닌 의미, 정의의 관점에서 난해한 사랑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에 대한 기다림과 믿음이었던 설마포장이, 나에게 허무함과 상처를 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앞으로 만날 새 연인에 대한 조심성과 두려움이 묻은 것 같다.


그냥

설마포장은 사랑의 기준이 동일한, 틀리지 않은 연인에게만 하자는 그런 다짐을 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진심, 진실을 담는 행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