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도시연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시연필 Sep 21. 2017

매력 없는 절호의 기회

매력 있는 질문의 속박

이수역 서가앤쿡. 그녀는 하필이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옷차림에 머리스타일을 하고 나왔다. 오랜만에 본 반가운 사람의 밝은 미소로 서로 인사를 나눴고 이야기를 했다. 아무리 집중하려고 해도 그녀의 목으로 시선이 갔다. 집중해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야 했다. 내 이야기를 시작했고, 이야기의 중간쯤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녀는 내쪽으로 몸을 기울였고 나는 장난스럽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친구로 지내자고 했으니까 너가 좀 도와줘야겠어."

"그게 뭔데?"

"나 소개팅 시켜줘."

"싫어."


찰나의 고민도 없이 그녀는 말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했을 정도로 빠른 대답. 정말 싫다는 기분이 표정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났다. 나는 당황했다. 고민해보겠다는 대답을 예상했고 나름 내 조건도 생각해왔지만, 단호한 거절을 당한 나로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왜?"

"그냥 싫어."

"야 그래도 고민하는 척이라도 하고 말해줄래?"

"나랑 만나"

"... 누굴 만나는데?"

"나랑 만나자고"


주고받았던 대화가 다시 끊겼다. 그녀를 바라보던 내 시선은 그녀의 왼쪽 어깨너머 허공으로 이동했고 잠시 생각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었으나 무슨 상황인지 생각했다. 이 날은 친구로 지내자는 그녀의 무리한 요구에 그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실험적인 마음으로 나온 자리였다.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마지막이 될 수 있는 만남. 그 만남에서 그녀는 제안을 했다. 침착하게 마음속으로 심호흡을 하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나를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이 차분함에서 답답함으로 바뀌었다.


"모르겠어. 그런데 만나면서 알아가고 싶어"


충격에서 나온 실소인지, 생각하는 시간 동안의 무표정과 정색을 감추기 위한 예의상 미소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최대한 이 상황에 대한 정리를 목적으로 나는 생각했다. 그 와중에 알게 됐다. 그녀의 불확실한 무엇이 항상 내 안에 남아있었지만, 그냥 내 생각이겠지 하고 넘어갔던 그 물음표에 대한 답을 알 것 같았다. 조금 차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두려워."

"뭐가?"

"내가."


짧은 대화에서 명쾌한 답변을 얻었다. 그녀가 긴 일정을 떠나기 전, 내 고백을 거절했던 이유와 소개팅 부탁을 거절하는 이유. 이 두 상황에 대한 대답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무너졌다. 이 자리에 나오기까지 만들었던 나는 사라지고 고백했던 순간의 나로 돌아와 버렸다. 다른 것이 있다면, 나는 많이 지쳐있었다. 내 감정은 분명하지만, 그녀의 감정은 분명하지 않은 도전이고 모험이었다.


"술좀 먹어?"

"잘 안 먹어."

"그럼 차 마시자. 자리 옮겨서 서로에 대해 솔직하게 얘기 좀 하자."


그녀와 나는 사당역 방면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대로변 큰 카페에서 12시가 넘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나에겐 기회라 불리는 순간들이 많았다. 안타깝게도 그 기회들은 정당하지 않았다. 비합리적인 기회들이 많았다. 난 부끄럽게 살고 싶지 않고,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이 모두를 위해 좋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기회들에겐 제의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함께 거절을 드리곤 했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수 없이 많은 질문을 나와 타인에게 던지곤 한다. 덕후스러운 면이 필요한 세상. 그런 면에서 나는 '질문' 덕후인 것 같다.


어떠한 기회, 선택들이 나에게 올 땐 항상 나에게 질문을 한다.


부끄러워?


질문을 하도록 만든 상황이나 순간마다 나에게 질문했다. 만약 그 기회들이 부끄럽지 않고 당당했다면 1초도 고민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이 간단한 질문이 내가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준다. 그래서 무엇이 옳은 것인지 깊게 파거나 고뇌하기에 힘이 들 땐, 이 질문만큼 쉽게 나를 잡아주고 유지하게 해 준 것이 없었다.


이런 와중에 내가 항상 가지는 두려움이 있는데, 만약 부끄러움이 소모되는 것이라면 언제 이것이 다 소모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힘들 때마다 지칠 때마다 도와줬던 이 질문이 소용없게 되는 것이다. 뭐 다른 질문을 찾겠지만, 아직은 이 질문에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기에 항상 두렵다. 내가 부끄러움을 모두 소진한 순간이.


그녀의 제안은 순전히 나만을 생각했을 땐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는 기회였다. 하지만 버릇처럼 나는 나에게 질문을 했다.


'이 기회를 잡는다면 부끄럽지 않겠어?'

'부끄러워'


간결했다. 그녀의 마음은 도전과 같았다. 자신의 이기적인 면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용기를 담은 모험과 같았다.


나는 그녀를 좋아하게 됐고, 거절을 받았고, 정리를 했지만, 단번에 무너졌다. 그만큼 그녀에 대한 내 감정은 생각보다 강했다. 그래서 연애를 시작했을 때 나에게 있어서 손해 보는 것은 없었다.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나에게 큰 장애물이 아니었다.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가 옆에 있는 것으로 얻는 기쁨이 그 아픔을 잊게 해주는 것에 익숙했다. 그래서 나에겐 전혀 손해 볼 것 없는 기회였다.


그러나 나는 나였다. 그녀가 나에게 던진 열쇠를 보면서 부끄러웠다. 이것이 그녀의 사랑에 있어서 좋은 선택이고 기회인지 질문했다. 그녀에겐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모험을 하기 전 준비해야 하는 것들을 챙길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면서 그 모험이 정말 원하는 것이지 생각할 시간도 필요했다. 그렇게 카페에서의 긴 대화를 끝으로 나는 다시 열쇠를 그녀에게 줬다.


'오늘 솔직하게 말해주고 나에게 많은 질문 해줘서 고마워. 내 모습을 엄청 들여다보게 된 것 같아.'


그녀는 집에 도착하고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진심을 담은 그녀의 메시지는 쓴 미소를 짓게 했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보는 나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정말 부끄럽지 않은 선택이라 만족하는데, 짜증이 섞 만감이 서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람인가 의식인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