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책으로 느끼는 정서적 충만감

이제 독일에서도 취미생활 해보자!

by 팬지

어렸을 때 난 참 책을 좋아했다. 그무렵 엄마가 출판사에 다닌 덕분에 집에는 늘 책이 많았다. 다른 애들이 책을 가지고 집을 지을 때 나는 책 속의 그림과 얘기를 나눴다. 초등학교 때는 엄마가 글짓기 그룹 과외를 시켜줬는데 정말 재밌어한 기억이 있다. 학교 도서실에 가는 걸 즐겼고 특히 '콩순이의 일기'라는 일기 형식의 어린이책이 기억에 남는다. 나는 참 책과 가까이 지내는 어린이었다.

하지만 성과주의의 집안 분위기, 아니 더 나아가 성과주의적 사회 분위기 때문에 나는 점점 책과 멀어졌고 그나마 이야기로 된 역사 과목을 좋아했다. 심지어 나는 영어 문법이 늘 어렵고 멀게 느껴졌지만 고등학교때 이야기식으로 적힌 영문법 누드교과서를 만나면서 영어 문법과 가까워졌다. 나는 이렇게 이야기를 참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난 추리소설이 아니고서는 참 책을 끝까지 읽는 게 어려웠다. 하지만 여전히 책을 좋아했다. 글자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래서 번역가가 되었지만 난 책의 종이 냄새가 좋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면서 마음이 힘들 때면 난 서점을 찾았다. 거기서 이 책 저 책 뒤적이며 종이 냄새도 맡고 좋은 글귀를 읽으면 뭔가 마음의 안정이 찾아왔다. 사실 그게 나의 유일한 취미생활이자 마음의 안식을 주는 종교였다.

독일에 살면서 참 안 좋은 점 하나만 꼽으라면 언어장벽으로 인한 문화생활이라 할 것이다. 문화생활은 내 인생에서 뗄려야 뗄 수 없는 활동인데도 말이다. 연극과 영화와 맛집이 한데 모여 있던 혜화역에 살 때가 이직도 가장 내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취미가 없는 것 같은 나에게 취미 같은 존재가 영화, 음식, 연극, 그리고 그를 모두 아우르는 정취이다.

하지만 독일에 오면서 나는 넷플릭스 같은 OTT에서 제공하는 콘텐츠를 제외한 콘텐츠는 접할 수가 없게 됐다. 내가 좋아하는 계절인 가을 초 한층 선선해진 저녁 공기와 함께 즐기던, 내 생일무렵 열리는 썸데이 페스티벌도 즐길 수 없게 됐다. 가끔 종이 냄새 맡으러 가는 서점이나 도서관에서도 나는 그야말로 까막눈이라서 책 표지 디자인 정도만 구경하다 나오게 되었다. 서점에 영어책 코너가 있긴 하지만 번역가임에도 부끄럽지만 영어원서를 끝까지 읽어본 적이 없어 선뜻 구매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지난번에는 정말 충동적으로 구매한 게 아니고 한 번 구경하고 집에 와서도 계속 읽어보고팠던 일본 소설 영문 번역본이 있었는데 그 다음번인 지난달에 가서 결국 구매해 왔다. 'Strange Pictures'라는 작품이었는데, 추리소설이 다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문장들이 간결하고 어렵지 않아서 술술 잘 읽혔다. 나는 책을 빨리 읽는 편인데 특히 뒷내용이 궁금한 추리소설의 경우 1시간에 80-100쪽 정도는 처리하는 것 같다. 하지만 영어로 읽으니 시간을 재 보진 않았지만 당연하게도 그 속도가 현저히 느려 100쪽 읽는 데 대충 5-6시간은 쓴 것 같다.

어쨌든 완독에 성공했고 그 시간이 한 달이 걸리지 않았으며, 200쪽 좀 넘는 책이었는데, 남은 100쪽은 몰아치는 전개에 하루 만에 다 읽었다. 뭔가 성취감이 올라오면서 종이 냄새를 맡으며 내가 원하는 그 정취를 느껴서인지 오랜만에 충만함을 느꼈다. 그러면서 '영어 원서로도 이제는 이런 충만함을 느끼는 책을 만날 수 있구나' 싶어서 더없이 기뻤다. 내가 이제 어디에 살든 지역에 구애받지 않거 이런 정서적 충만감을 느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일단 쉽고 재미있고 나를 완주하게 하는 추리소설부터 섭렵해봐야겠다.

그나저나 독일어 소설은 언제 읽을 수 있을까...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