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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소이 May 31. 2023

먹감색 캔버스

할머니집 냉장고에 방치되었던 그 열매

먹감색 캔버스


노인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두 손 가득 소중히 포개어 가져온다 
주먹보다 작은 한 덩어리


손에서 손으로 슬금슬금 옮겨 잡았으나
물거품 터지듯 톡 무너진다
손녀가 다급히 혀를 날름거린다 
원래 이렇게 형체가 없나요


명절이 지나도 오지 않던 손녀
선물 받은 무화과 열 개 중 한 개만 살아남았다
매일 아침 냉장고 문을 열어

무화과의 생사를 확인하던 노인


뭉클뭉클 물러터진 열매

하나씩 꺼낼 때마다 
노인의 손바닥 위로 쏟아지는 수많은 사체들 
먼 우주의 장미성운처럼
생명의 죽음과 탄생을 관장하는 
달콤한 육신으로 모든 벌레를 유인하는


꽃이 없다고 동정도 연민도 금물

늙은이의 심해에는 뽀얀 생명력과

빨간 정열을 숨겨두었거든
축축하게 스러지는 먹감색의 캔버스  
방울방울 자수 놓듯 알이 꽉 차있거든


손주름 사이사이 들끓는 나비, 애벌레, 꿀벌

진가를 알아보고 빠져 죽었네

기어코 목숨을 갖다 바쳤네


노인이 마지막 무화과를 조우하며
열 번째 사망선고를 준비한다
엄숙한 장의사 손바닥 위로

공명하는 벌레들의 울음소리 윙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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