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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인생은조연] 제18편. 오뚝이

나야말로 진짜 주인공

by 김현이

퇴근 후 급하게 저녁상을 차려내며 큰 아이에게 “정우야! 오늘은 학교에서 뭐했니?”하고 묻는다. 건성으로 묻는 것 같아도 진짜 속내는 엄마가 너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마음이 더 크다. “장래 희망 발표 했어!”, “뭐랬는데?” 아이는 전보다 더 무관심하게 “응, 경찰관!”이라고 말하고는 허기진 배를 달래는 듯 허겁지겁 밥을 먹는다. 씽크대 앞에서 막내아이 도시락을 닦다가 콸콸콸 쏟아지는 수돗물이 개수대 안에서 회오리를 일으키며 흘러나가는 물줄기를 보면서 그것이 마치 나를 과거로 데려다 주는 순간이동 통로인 것처럼 10년 전 아주 특별했던 그해 속으로 무심히 빨려 들어갔다.

나는 글재주가 뛰어난 사람이 아니다. 미국작가 호손은 5%의 진실을 말하려면 95%의 농담이 필요하다 했는데 나란 사람은 농담조차 진담으로 여기게 하는 타고남이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글쓰기를 배운 적도, 어떤 상황에 대한 전달 능력도 부족한 내가 이 글을 쓰는 건 기억력의 한계에 대한 일종의 대비와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의 만일의 실패와 좌절 앞에서도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그리고 오래전 그 속으로 돌아가 거기서 함께 했던 사람들을 만나 가슴 뜨겁게 포옹하고 그 순간의 두근거림을 다시 한 번 더 격하게 느껴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과거의 경험을 기록한다는 건 마치 가족들 모두 잠든 시간에 내가 주연으로 나오는 드라마를 보면서 텔레비전 빛에만 온 몸 의지한 채 흐느껴 울다가 웃다가 하는 것과 비슷하단 생각이 든다. 지금 현실은 밤잠 뒤척이는 막내둥이에게 젖을 물리며 궁둥이 토닥여주고 있지만 내 심장은 드라마 시작 전 중간 광고만 나오는 중인데도 설렘으로 두근두근 떨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전에, 간단한 내 소개부터 해 둬야 할 것 같다. 무엇이든지 알고보아야 낯설지 않은 것처럼 내 글을 읽는 분들에게 더 충분한 공감을 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말 그대로 겨울이면 토끼와 발맞추던 산골마을에서 나고 자랐고 스무 살이 되던 해 대학을 들어가면서 거의 처음 도시물을 맛본 완전 시골뜨기 여자다. 집밖 어디를 나가도 산과 들에 둘러싸여 있던 곳, 내 인생의 절반이상을 보낸 곳도 바로 그곳 이다. 어렸을 적에 경찰차도 몇 번 구경 못한 내가 어떻게 여자 경찰관이 될 생각을 했었을까 잠시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대단한 사건의 발단도 대부분 대수롭지 않은 일에서 시작되듯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마땅한 진로를 정하지 못했던 내게 다섯 살 많은 친오빠가 ‘너 그러지 말고 경찰시험 한번 준비해 봐라’하는 거였다. 그게 나와 적성이 맞거나 관련된 전공을 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시험의 기회가 많으니 괜찮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오빠는 내게 영향력이 컸던 사람이었으므로 그 제안이 내 인생의 방향을 어떻게 돌려놓을 거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시험공부를 시작했고 너무나 쉽게 내려버린 그 결정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전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지금은 전형이 바뀌었지만 영어와 법률 네 과목의 필기시험과 체력검정, 직무적성검사와 면접까지 몇 단계를 순차적으로 통과해야 최종합격을 할 수 있던 게 당시의 경찰관 공개채용 시험이었다. 컴퓨터를 전공했던 내게 법률이라는 것은 전혀 생소한 분야였지만 무슨 고집이었는지 학원한번 갈 생각도 없이 그날부터 밤낮의 똑같은 반복으로 두 달여간의 시간을 보냈고 첫 시험을 보았다. 낙방이었다. 당연한 결과였고 나부터도 시험의 유형이나 한번 알아보자 식의 가벼운 마음이었기 별다른 실망감도 없었다. 그렇게 독학을 통해 다음번의 필기시험에서 마침내 합격한 기쁨도 잠시, 미처 계산하지 못했던 변수에 직면하게 된다. 나의 발목을 잡은 건 바로 100미터 달리기!!, 아니 시골에서 산들로 뜀박질하며 자라던 내가 100미터 달리기 커트라인에서 떨어질 줄 몰랐지만 나는 선천적으로 빨리달리기 보단 오래달리기가 더 맞았고 밖에서의 체육보다 안에서의 책읽기가 더 좋았던 아이였다. 그러니 내가 계산하지 못했다던 결과는 어쩌면 처음부터 예견됐던 사실이었고 이제 내 상대는 몇 백대 일의 경쟁률을 뚫어야 하는 필기시험이 아니라 100미터 커트라인과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싸움에서 두 차례 더 패배하게 된다.

절망적이었다. 내가 가진 책에서는 더 이상 배울게 없다는 자만이 들 때마다 더 없는 슬럼프에 빠지지 않으려고 두껍고 어려운 책들을 독파해 나가며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부단히 노력했고 그렇게 되면서 처음 별다른 마음이 없던 시작도 경찰관에 대한 간절함으로 점점 바뀌게 되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학교 고시원 입실 시험을 보게 된다. 그 건 넉넉하지 않았던 형편에서 대학까지 졸업한 자식 뒷바라지를 바라는 게 죄송스러웠고 고시원에 들어가면 일단 책값을 받아가며 공부할 수 있었기에 부모님 부담도 덜어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고 나서 며칠 뒤에 전화 한통을 받게 되는데 고시원 실장이라는 분께서 법대 교수님 중 어느 분이 나를 만나보자 했다는 거다. 의아했지만 매일 학교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었던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그 교수님을 찾아뵈었고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된다. 그 시험의 형법에서 1등을 했다며 공과계열 학생이 법률을 잘 알고 있으니 자기와 변리사 시험을 준비해 보자는 말씀이셨다. 말이 20대 아가씨였지 늘 티셔츠와 바지차림으로 고등학생 책가방을 매고 다니던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던 초라한 여자아이에 불과했는데 교수님의 제안은 뜻밖의 또 다른 내 발견과도 같이 느껴져 잠시 솔깃하기도 했었지만 사실 변리사가 구체적으로 뭐하는 사람인지도 몰랐고 너무나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하여 부모님과 상의를 해 보겠다고 말씀드린 후 그 자리를 나와 버렸다. 정말 그랬다. 그 당시 본인도 자각하지 못할 만큼 내 실력은 월등해져 있어 더 이상 필기시험은 두려운 상대가 되지 못했지만 그와 반대로 100미터는 점점 내속의 트라우마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매서운 시련이 닥치게 된다. 엄마의 백혈병 진단! 그랬다. 그해 내 나이 25살, 엄마는 48살, 내가 막내라기에는 무척 젊은 엄마였는데 계절이 막 여름으로 들어서려는 그 맘 때 엄마는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으로 시한부 3개월 선고를 받으셨고 나와 단둘이 백혈병치료로 유명했던 여의도 성모병원 혈액암센터에 들어가 기약할 수 없는 또 다른 싸움을 시작해야만 했다. 그건 마치 어떻게 될지도 모르면서 내가 경찰의 길을 준비했던 것처럼 엄마도 어떤 일이 기다리는 줄 모르지만 어떻게든 건너 갈 수밖에 없는 외나무다리를 탄 것과도 같은 것이었다. 마땅한 직업이 없었던 내가 그 순간 이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엄마의 병간호를 맡았고 나 역시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엄마와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혈액암병동 무균실에 남겨지게 됐을 때 내 인생에서 가장 무섭고 감당하기 힘든 슬픔을 맛보았고 그 고통이란 어떤 위로도 진정시킬 수 없는 것이었다. 엄마가 머리를 삭발하던 날 소리 없이 흘리시던 눈물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엄마를 지켜내겠다는 결연의 의지처럼 허리까지 길던 머리카락을 잘라내던 날 밤, 입원하던 날 ‘내가 이 신발을 신고 다시 걸어서 나갈 수 있을까’하시던 엄마의 혼잣말에 겁을 먹은 내 잠은 점점 멀리 달아나 버리고 병실 내 환자와 보호자 모두가 잠든 적막속에서 뚝! 뚝! 뚝! 플라스틱 간이침대위로 떨어지던 내 눈물 방울소리만 커다란 울림이 되어 퍼져나가고 있었다.

혈액암병동의 무균실은 본인의 몸 외에는 책이나 기타 개인 소지품을 휴대할 수가 없었고 환자뿐만 아니라 보호자도 위생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해야 해서 오직 양쪽 두 눈만이 자유로운 마치 수용소의 재소자들처럼 개인의 일거수가 철저히 통제된 그런 곳이었다. 밤 열시 소등이 되면 엄마의 고른 숨소리를 확인한 후 병동 옥상에 올라가 그곳에 있던 좁다란 평상에 누워서 이리저리 뒤척이는 옥상 철창문의 잠꼬대를 엿듣기도 고인 눈물 탓인지 꼬리가 길어진 별들을 올려다보곤 했다. 하루의 고비를 잘 넘겼다는 안도감으로 갓난아기처럼 온 몸을 치마폭이 넓은 밤바람에 안겨 있다가도 어느 순간 미친 듯이 공부가 하고 싶단 생각이 들 때 면 벌러덩 누워 컴컴한 밤하늘이 검은색 종이인 냥 하얀색 연필로 글씨를 써 내려가 듯 외우고 있던 것을 하나하나 꺼내 보기도 했었다.

백혈병! 어릴 때는 영화 속 청순한 여자 주인공한테만 걸리는 병인 줄로만 알았던 생소한 병명, 앞서도 말했지만 무균실안은 개인 소지품 관리가 매우 철저한 곳이다. 환자에게도 간호를 맡은 보호자에게도 마치 언제든 미련 없이 떠날 수 있게 준비해 둔 것처럼 모든 게 간소하다. 한편 그곳도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라 웃음소리도 피어나고 서로의 생활들을 이야기하며 관계를 만들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와중에도 병실 밖 어딘가 갑작스런 통곡소리라도 들리는 날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말이 없어진다. 그건 이곳의 누군가가 이제는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막 떠났다는 의미였고 그 속에서 단 일주일이라도 살아본 사람은 직감적으로 그런 것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혈병은 누구한테나 올 수 있는 병이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한테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연세 높은 어르신한테도 말이다. 나는 그곳에서 별의별 사람을 만나봤지만 엄마 옆 침상의 막 스무 살이던 지금은 별이 돼버린 꽃다운 민영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옷섶에 길 다란 고무호수를 달고 급하게 몰핀 주사를 찾던 앳된 아이가 나와의 첫 대면이었고 꼬마인줄만 알았던 민영이는 한창 멋을 낼 스물세 살의 아가씨였다. 이미 6살 때 백혈병을 앓았었고 성인이 되어서 다시 변종된 바이러스로 발병됐다며 사례가 드문 경우라고 했었다. 밥을 먹는 것 보다는 비스킷을 먹으면 구토가 덜하다면서 길고 가느다랗던 집게손가락으로 과자를 한 개씩 집어 먹으면서 언니도 한번 먹어보라며 동그란 검은 눈망울을 순식간에 예쁜 반달로 만드는 재주가 있던 민영이는 나와 겨우 두 살 차이였는데도 한참 어린 동생 같았다. 제주도가 집이라 바닷가 해변이야기를 자주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미소 짓게 할 줄 도 알았고 속으로는 자기가 결국엔 죽는단 걸 알았을 텐데도 밝은 모습이었는데 며칠간의 요양 차 퇴원한 게 민영이의 마지막 모습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사람이 살고 죽는 것도 다 사람의 일인지라 며칠 뒤 엄마 옆 침상에는 다른 환자가 들어왔고 그분과 다시 생활하면서 민영이에 대한 기억은 점점 엷어져만 갔다.

전국 각지에서 똑같은 목적으로 그곳에 온 사람들, 한 공간에 갇혀 길게는 1년이 넘도록 하루 24시간을 함께하면서 나름대로의 사정과 애환으로 누구는 이번 항암치료가 두 번째인데도 아직까지 머리카락 빠지지 않았다며 보통사람에게는 특별한 이야기도 일상적인 일로 여기며 스스로 용기를 내기도 하고 서로 위안이 되며 지내다가도 11번 침상 환자가 어느 날 갑자기 보이지 않으면 우리들 모두는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더 이상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각자의 제 모습이 될 수도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과 같은 이유였던 것 같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리다고 치자면 25살은 철없는 아이일 수도 있었지만 마치 계절을 앞질러 키가 쑥 커버린 코스모스가 제 고개도 이기지 못해서 꽃도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채 시드는 것처럼 내가 여러 아픔들로 정상적인 성숙의 과정을 건너 뛰어버린 후숙된 25살이 아니었나 싶어 내 또래의 아이들에게 특별한 부러움을 느끼기도 했었다.

그렇게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몇 달 간의 시간이 지나 버렸고 점점 경찰시험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되는 듯 했다. 그러다 우연히 접한 경찰 채용 공고를 보고 망설임도 있었지만 병원생활 중 한차례 더 필기시험을 보게 된다. 며칠 뒤 친구한테서 필기시험 합격소식을 들었지만 주변인의 반응과는 달리 나에게는 별다른 기쁜 일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쉽사리 합격할 수 있었던 시험이 아니었음에도 아무런 준비 없이 시험에 합격했던 내 자신의 억척스러운 정신력이 반갑지 않은 손님처럼 낯설게 느껴지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강해진 내면과는 달리 체력은 점점 나빠졌고 고무줄 바지가 흘려 내려서 다시 끈으로 묶어야 할 정도로 말라서 2리터짜리 생수를 마시고나야 겨우 47킬로의 몸무게 계측도 통과할 수 있었다. 예감대로 나는 100미터 달리기에서 0.02초라는 세지도 셀 수도 없는 찰나의 시간에 발목이 잡혔고, 나의 심리와는 상관없이 또 다시 병원의 일상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 후로 엄마는 4차례의 항암치료를 끝냈으며 쇄골 아래 구멍을 뚫어 심장의 가장 가깝고 두꺼운 정맥혈에 연결되어 각종 항암제와 링거액이 주입되고 피를 뽑아내는데 사용됐던 고무관, 중증 암환자의 상징이기도 했던 히크만 카테터를 완전히 제거했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의 의학적 치료가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런 엄마를 모시고 시골집으로 내려오던 길의 차창 밖의 계절은 가을은 온데 간데 흔적도 없이 벌써 겨울을 향해가고 있었다.

이젠 치료보다도 더 중요한 명현반응 관찰과 철저한 사후관리가 남아 있었다. 그것 또한 내가 풀어야 될 숙제라는 중압감과 집안의 소소한 일들까지도 도맡아해야 했던 생활에서 몸과 마음은 갈수록 더 지쳐가고 있었다. 속눈썹까지 다 빠져버린 엄마의 얼굴을 차마 쳐다볼 수 없다가도 엄마의 상태가 좋아진다는 생각이 들 때는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했었다. 어쩌다 한 번씩 어릴 적 공유의 놀이터였던 뒷동산에서 마을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가장 키가 큰 바위에 올라타 하늘을 등에 지고 앉아 있노라면 홀가분한 마음이 들기보다는 내 안의 이기심이 불쑥 튀어나와 등에 진 하늘의 무게가 한없이 무겁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나는 이대로 어떻게 되는 걸까......

그렇게 해가 바뀌어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맞았으며 엄마와 내가 온몸으로 겪었던 고난의 순간들은 차츰 일상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사람이 어떤 슬픔까지 참아낼 수 있는 걸까, 얼마나 큰 어려움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내 감성의 최대치가 마비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도 하였다. 엄마는 내가 아깝다며 다시 공부를 시작하라고 말씀하시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 때문에 막내가 희생을 하는 구나 미안해하는 그 마음, 그 마음이 나를 향한 엄마의 죄책감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았고 나 또한 가슴 아팠기에 그해 봄에 있던 시험은 한번 봐 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 나에 대한 엄마의 무거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을 것 같았으며 한편으로는 준비 못한 시험에서는 당연히 떨어질 거라며 나 또한 대단한 상처 없이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시한부 선고를 받던 딱 그맘때의 그 이듬해, 하지만 나는 또 다시 필기시험에 합격하는 시험에 들고 만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불에 데어본 아이만이 그 아픔을 아는 것처럼 나는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시행착오를 반복했어도 나는 안 됐었고 내 여건도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에 이번엔 정말 마지막이라고 또 다시 100미터에서 떨어진다면 깨끗하게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00미터 출발선과 도착선은 마치 내 운명선처럼 보였고, 혼신의 노력 끝에 이제는 셀 수 있을 것 같은 0.02초의 시간은 내 손안에 잡혔고 나는 숙적과도 같던 싸움에서 드디어 이기고 말았다. 아! 10년 같던 지난 1년이라는 시간이 주마등처럼 100미터 트랙위에 걸려있었고, 남들에게는 첫인상이 좌우된다는 0.02초의 짧은 그 시간이 나에게는 1년을 넘게 두고 봐야하는 내 인생 명작영화의 길고긴 상영시간이 된 것이다. 그 여름, 중앙경찰학교에서 내 이름 석 자 “김현이”가 선명하게 적힌 분홍색 명찰을 가슴에 달았다. 엄마는 배웅길에서 내 두 손을 꼭 쥐어주시며 말없이 눈물만 흘리셨고 병원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던 날 밤 아무도 몰래 흘렸던 눈물보다 더 굵고 빛났던 눈물방울 속에서 얼마나 많은 끄덕임을 했는지 모른다. 엄마!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10년도 더 지나버린 지금의 나는 여전히 경찰관이며, 이제 나라는 여자는 오롯이 혼자가 아니라 한 남자의 아내와 아들 셋의 엄마로서 살아가고 있다. 어느 누구는 나를 보고 쉬운 길을 참 멀리도 돌아왔구나 하고 동정할 수도 있고 경찰관이 뭐 그리 대단한 거라며 냉소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남들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외줄타기처럼 외나무다리 위에서의 오도 가도 못하던 공포를 참아내며 한 번씩 다리 밑으로 떨어져도 다시 올라타서 끝까지 건너왔고 이젠 만일의 역경을 만난대도 두 눈 질끈 감지 않고 지혜롭게 맞설 용기가 있으니 되었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5년 전에 완치판정을 받으셨고 이제는 내 아이들의 외할머니가 되셨다.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엄마를 만드셨다고 했던가. 여자는 자식을 낳아보아야 엄마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아이 셋을 낳았어도 여전히 엄마가 필요한 엄마이다. 간혹 사람들은 엄마가 살아계신 게 기적과 같다며 나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엄마의 살아계심, 그 호흡 자체가 나를 그런 사람이 되도록 만들었던 원동력이 됐었다고 생각한다. 남들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 한 시간 늦게 잠들었어도, 어느 때는 잠을 안 잘 수는 없을까 생각했을 정도로 게으름 없이 살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일에도 진심을 다해서 가슴 찡하게 뭉클해질 정성을 쏟아 부었다. 남편은 내가 천성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이라 했지만 모든 습관들이 노력에 의해서 굳어지듯 그 때도 그 상황에 맞게 열심히 살았을 뿐이었고 지금도 현재에 충실하며 살아갈 뿐이다. 생활의 분주함이 가져다주는 약간의 고단함은 언제나 나를 깨어있게 하며 앞으로 10년 후 나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진다 할지라도 내가 살아온 과거가 지금의 내 바탕이 된 것처럼 우리의 삶이란 수없는 마침표로 그렇게 계속 이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끝.


며칠전 사무실에서 찍어본 나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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