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똑같은 잠자리에 거의 비슷한 형태로 잠이 드는 그 시간, 거의 특별한 날을 빼고는 힘들이지 않고 잠에게 내 모든 분노에 대항하는 피로감들을 내려놓고 항복했다. 비록 그것은 나에게 감정상의 굴욕감을 가져다주기는 했지만 꼭 필요한 일이었고 점점 마음에 들기까지 했다.
그 후로, 그런 시간들이 지속된 후에야 모든 선택과 판단과 결정들이 조금씩 희미해지면서 나로부터 흩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어차피 사는 동안 갈림길에서 선택의 과정이란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만이 남아 있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현재의 나라는 사람이 이런 처지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도 하루아침에 된 것은 아닐 것이다. 40년을 넘게 살면서 아주 어릴 적부터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결정을 하고 그 선택에 맞춰 살아왔을 것이다. 물론 바르지 못한 선택으로 보다 나은 처지에서 살아오지 못하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결정과 선택의 과정에서 비록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일들이 수두룩하지만 당시에는 나름의 근거를 갖고 그러한 길로 들어섰을 테니 후회의 감정은 별로 들지 않는다. 솔직히 기억나는 건 굵직굵직한 몇 가지 사건들 외엔 거의 모든 일들이 잊혀진지 오래다. 그래도 현재 내 자신이 대단한 불행하다거나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거라면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후로, 지나고 보니, 어쩌면 지금까지 걸어 온 길이 평지가 아니라 가시덤불로 가로막혀 있던 길이었을지라도 덤불을 치워냈었기에 지나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지금의 나는 보통의 생활은 유지하고 살고 있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어쩌면 아직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큰 역경을 만나지 못한 것일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별로 내세울 것은 없지만, 요 며칠간의 시간들을 지난 날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어 보는 것으로 쓰게 되었다. 그 이유는 갑자기 격에 맞지도 않은 ‘작가’라는 별칭이 따라 붙으면서 내게 관심을 갖는 동료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내가 정말로 그럴만한 말을 들을 만한 사람인지가 부끄럽고 이미 써진 글을 읽어봄으로써 과연 내가 그럴 만한 사람인지를 앞으로 그럴 만한 가능성이 있는 사람인지를 점검해 보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놀라웠다. 나의 문장력과 내용, 그리고 전체적인 글의 구성에 놀란 것이 아니라 ‘어떻게 저렇게 썼지?’, ‘어떻게 항상 모범생처럼 다짐하고 계획하고 실천하려는 의지들이 하나같이 비슷할까.’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솔직하게 고백하건대, 나라는 인간은 그다지 계획적이지도 모범적이지도 글 속의 느낌처럼 착하고 순한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다. 불편한 상황에서 욕도 하고 싶고 입바른 말도 하고 싶고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표출하고 싶은 욕망이 내면에서 강하게 솟구치는 사람이니까. 마치 나는 위선자고 거짓말쟁이가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글을 읽는 내내 기분이 나빠졌다가 다 읽어갔을 때쯤엔 우울해졌다. ‘내가 글을 계속 쓸 수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남들이 알아봐 주길 바랐던 내 검은 마음에 한없이 초라해졌고 ‘잘 써봐야지’하는 다짐보다는 본연의 나보다 부풀려질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지금, 지나치게 감상적인 글보다는 다소 진부하게 느껴지더라도 사실 있는 그대로를 써보기로 했다. 어쨌든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볼 필요가 있을 테니까.
[지극히 사실적인 몇 가지 이야기]
그 첫 번째. 개 1,500마리가 불타 죽을 뻔 한 일
112를 누르고 신고를 하면서 도대체 누가 ‘지금 내가 신고하는 일이 과연 경찰관이 주도적으로 맡아서 적극적으로 나서 줄 수 있는 일일까?’ 고민을 할까 생각해 본다. 사는 지역이 시골이라며 사무분장이 불분명해지는 일은 더욱 더 잦다. 농사철이 시작되고 농부들은 겨울철을 넘긴 병해충을 방제하고 볏짚, 비닐 등 영농 잔재물을 정리한다는 의미로 논 밭둑가에 불을 놓는다. 하필이면 그 시기가 꽃샘바람이 한참 불어대는 그 시기라서 불꽃이 다른 곳까지 번질 위험이 많은 시기다. 내용은 그랬다. 옆 집 아주머니가 밭두렁에 불을 놓았는데 바람에 불꽃이 자기네 개막사로 번져서 개 천오백마리가 모조리 불타죽게 생겼다는 다급한 신고였다. 상식적으로 도둑을 잡는 건 경찰관, 불을 끄는 건 소방관, 119다. 그런데 여기 시골 사람들은 불이 나도 무조건 파출소에 전화를 건다. 개가 다 타죽을 판이라니 안 나가고는 못 배긴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주인 부부가 마침 긴 호수를 끌어다 불이 번지지 못하도록 불길을 거의 다 잡아 놓은 상태였다. 우리가 한 일은 필수 탑재 장비 중 하나인 소화기로 잔불정리를 한 것으로 다행히 개가 한 마리도 불타죽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문제는 최초에 불을 놓은 아주머니를 만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시골 사람들의 특성상 경찰관이 물어보면 ‘나는 잘못 없다. 나는 잘 모른다.’ 식으로 그 아주머니도 그 동네 이장 탓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기는 멋도 모르고 이장이 오늘 불 놔도 된다고 해서 밭두렁에 불을 지른 것뿐이라고. 그러니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아예 못 박아버린 것이었다. 잘못이 있든 없는 인간적인 도리로라도 최소한은 놀라지는 않았는지 괜찮은지 물어봐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그 아주머니는 처음부터 모르쇠로 나오는 걸 보니 개 주인은 조금씩 부아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아니, 우리가 마침 여기에 있었으니 망정이지 만일에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으면 아주 큰 불났어요. 우리 개 천 오백 마리 한꺼번에 다 타 죽을 뻔 했다고요.’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양측 감정이 상해가는 도중 우리는 아주머니에게 다소 사무적인 투로 불길은 잡혔어도 기록할 사항이 있으니 오후 몇 시쯤 파출소로 나오시라고 안내를 하는데 이번엔 그야말로 뭐 낀 놈이 성낸다고 목소리가 더 커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급기야 우리는 ‘실화죄’를 언급했다. 시골사람들의 또 다른 특징, 구체적인 죄명을 들이대면 기세가 꺾이면서 죄송하다고 조금은 비굴할 정도로 급하게 사과를 한다는 것이다. 그 날 오후 그 아주머니, 개 집 주인, 우리들 이렇게 삼자대면을 통해 큰 무리 없이 마무리 지어졌다.
아주머니는 먼저 떠나고 난 뒤, 개 집 주인은 소장님을 뵙고 간다고 남았고 어쩐지 낯이 익은 사람이었다. 바로 파출소장 고등학교 동창으로 전번에도 파출소를 찾아와서 안면이 있던 사람이었다. 더욱 인상에 남은 이유는 자식이 넷이나 되었는데 나와 십 오년이나 차이가 나는 소장님의 친구 분의 막내 자녀가 우리 집 큰 아이보다 두 살이나 더 어렸고 무엇보다 그 아저씨의 행동과 말투, 전체적인 인상에서 풍겨지는 소박함과 선한 모습이 매우 인상적으로 남았기 때문이었다. 삼자대면을 할 때도 편을 들어주고는 싶었으나 치우치는 업무로 인해 자칫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었기에 우리는 냉정한 태도를 유지했었다. 소장님의 말씀으로는 어릴 때 양쪽 부모를 여의고 누나 손에서 자랐는데 혼기를 놓치는 바람에 베트남에서 온 아가씨와 국제결혼을 했다고 하셨다. 그래서 자녀를 늦게 보게 되었고 자녀들이 어리다는 것이었다. 아저씨를 키워주신 누나는 여태 결혼도 하지 않고 동생을 자식처럼 키웠다고 하시는데 그 분의 연세가 일흔 중반을 훌쩍 넘겼고 지금은 부모님처럼 그렇게 가까운 곳에 모시고 살고 계신다는 거였다.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1톤짜리 봉고트럭을 몰고 온 소장님 고등학교 동창, 누나 손에 자란 그 아저씨, 열 살보다도 더 어린 베트남 아내를 둔 네 아이의 가장, 천오백 마리가 넘는 개 농장주인, 그리고 그동안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오면서 만들어 낸 20억대의 자산을 가진 아저씨. 소장님과 한참 말씀을 나누시던 그 분이 돌아가실 때쯤 나에게 조금은 조심스러운 어투로 혹시 사진을 세 장만 출력해 주실 수 있느냐고 하셨다. 5학년이 된 딸애가 전교 부회장 선거에 나가는데 벽보에 붙일 사진을 좀 출력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그날 열 장의 사진을 뽑아 서류 봉투에 담아 돌아가시는 아저씨의 손에 들려 드렸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무엇이 저 분의 삶을 저렇게 흘러가도록 했을까. 한참 내 인생에 불만을 품고 지내던 무렵, 나는 요란하게 시끄러운 엔진 소리로 파출소를 빠져나가는 포터 트럭이 길모퉁이를 돌아설 때까지 한참을 서서 바라보았었다.
‘불을 낸 아주머니가 청심환이라도 사다 드렸을까? 불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잖아. 봄 불은 여우 불이라고 했는데. 하기야 나도 어릴 때 이맘 때 쯤 남의 집 삼밭을 절반이나 태워먹은 적이 있었잖아. 봄 불은 날아다닌다는 말이 맞는가봐.’
그 두 번째. 원동기 운전면허 갱신.
아무리 국가공무원이래도 경찰관은 지역마다 조금씩 업무 방식에 차이가 있다. 이가 다 빠져 양쪽 볼이 홀쭉하게 들어간 깡마른 할아버지 한 분이 오셨다. 내 앞으로 오시더니 신용카드 크기의 플라스틱 증명서를 내 보인다. 면허 갱신을 하고 싶다는 거였다. 우리 경찰서는 일선관서에서 면허증 갱신 서류를 접수 받지 않고 있다. 그 말이 목 끝까지 차고 올라왔지만 할아버지가 내민 원동기면허증의 생년월일을 보자마자 그 말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본래 원동기면허 갱신은 신체검사가 따로 필요 없지만 어르신의 연세로 보아 신체검사를 필수적으로 받으셔야 했다. 나는 더 안내할 필요도 없이 갱신에 필요한 서류와 금액, 절차를 안내해 드리고 어르신에게 전화번호와 집 주소를 여쭤보았다. 대신 접수해 드리고 발급이 되면 다시 찾아다 드리겠다고 말씀드렸다.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정확히 일주일 뒤에 그 어르신이 파출소에 오셨다. 서류를 나에게 주고 가신 뒤 정확히 7일이 지났다고 하시며 발급까지 일주일 정도 걸린다고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시고 그날부터 숫자로 세고 계셨던 모양이었다. 나는 컴퓨터 모니터 모서리에 붙여놓은 메모지의 연락처를 큰소리로 읽으면서 다시 확인시켜 드렸다. 어르신은 이제 내가 연락을 드릴 때까지 파출소에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 연세에 총기가 대단하신 분 같았다. 근무를 하다보면 언제나 원칙대로 할 수는 없다. 예외적인 경우가 있어야 원칙도 지켜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세 번째. 팡파르의 의미
지방청장 초도 순시는 경찰관 업무 중 큰 행사에 속한다. 이 말은 처음 부임한 지방청장은 각 경찰서를 한 번씩은 방문하게 되는데 우리들이 그것을 두고 초도 순시, 또는 초도 방문이라고 거창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올해로 그러니까 나는 경력 13년 차의 경찰관이지만 이런 경우 요즘 세대라고, 그렇다고 선배세대라고 말하기가 참 곤란하다. 어느 쪽에도 명확하게 낄 수 없는 신임도 아니고 그렇다고 선배도 아닌 조금은 애매한 위치이기도 하다. 지금 이 야이기는 며칠 전, 서장님께서 점심식사로 파출소에 과장님들과 한 차례 다녀가신 뒤 소장님께서 들려주신 경험담이다.
지방청장 초도 순시하는 날, 경찰관은 군인의 의전 행사처럼 청장님이 입장하는 동안 팡파르를 울려한 한다는 규정은 없다. 그 날에는 계급으로 보아 팡파르를 두 번 울려야 하는데 그날은 팡파르가 단 한 번 만 울려지고 곧 바로 거수경례로 진행이 되었다는 것이다. 첫 인사말부터 ‘오늘 행사는 완전 엉망이다.’는 시작으로 주무 과장은 행사장에서 끌려나다시피 쫓겨나게 되고 그 자리에 앉은 이백 명이 넘는 사람들은 한 시간이 넘는 내내 공포분위기에서 굳은 자세로 인사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일정에 따르면 바로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순서로 되어 있었는데 팡파르를 한 번밖에 울리지 않는 것 때문에 기분이 상한 신임 지방청장은 그날 점심도 안 먹는 것으로 일정을 취소하고 청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행사장에서 온갖 창피를 다 당한 주무과장은 구내식당에 모인 직원들에게 호탕하게 웃으며, ‘높은 사람도 없는데 우리끼리 편하게 밥이나 먹읍시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단순한 일화이기도 할 테지만 만일 지금 그런 일과 똑같은 일이 생긴다면 대서특필될 만한 일이다. 나는 그날 그 현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좀 기가 막혔지만 재밌는 일이라며 함께 웃었었다. 경찰관이 아닌 사람들이 씹고 뜯고 험담하기 딱 좋은 일이 아니던가. 내가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주무과장님의 구내식당에서의 말씀 때문이었다. 그 날의 심술궂은 분위기를 단 번에 날려 보낸 그 얼마나 통 큰 한방이었던가. 왠지 그 날의 주인공은 청장님이 아니라 과장님이 아니었나 싶었다.
그 네 번째. 외모에 관한 시답지 않은 대화
지금 이야기는 어느 배우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을 글로 쓰는 것이다. 이언 매큐언의 원작 <속죄>의 영화 [어톤먼트]의 로비를 맡은 나와 동갑내기인 1979년생 영국 배우, 제임스 맥어보이다. 평균에 미치지 않은 작은 키, 푸른 눈동자, 그리고 왠지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분위기 때문이 아니라 속죄의 로비를 어톤먼트에서 연기했다는 이유에서 나는 제임스 맥어보이한테 한동안 마음을 놓친 적이 있었다. 그러다 한 달 전쯤, 구독하는 신문에서 넉 달에 한번 꼴로 사은품으로 끼워 보내는 책자에서 제임스가 유명한 명품 의류 브랜드 옷을 차려입고 나온 사진이 표지로 된 것을 받아보게 되었다. 정말로 푸른 눈빛의 사진을 보는 누구라도 빨려들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할 정도의 분위기로 나를 매료시키고 있었다.
며칠 전, 경찰서에 출장을 나갔다가 평소 별로 친하지 않다고 여기던 직원에게 뜻밖의 인사를 받게 된 적이 있다. ‘피부가 좋아 보인다고.’ 간단한 인사치레려니 하고 고맙다고 말하면서 돌아서는 더 말을 이어가는 거다. 혹시 00 직원 보았느냐고. 그 분이 언급한 직원은 최근 아이를 출산하고 육아휴직에 들어가 요즘 출근을 하지 않고 있던 분이었다. 물론 나와 열 살도 더 차이가 나는 젊은 여자 직원이었다. 그 남자 직원분의 말은 아기를 낳고 나더니 얼굴에 있던 그 많던 뾰루지들이 한꺼번에 없어진 모양이더라, 피부가 깨끗해졌더라는 말이었다.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 왠지 그 분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고개까지 끄덕이면서 ‘전보다 훨씬 더 예뻐졌겠군요.’ 하고 후배 외모를 칭찬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서장실 직제표에 걸린 내 사진을 얼마 전에 보았다고 말하는 거다. 머리스타일일 바뀌어서 그런지 아니면 안경을 벗어서 그런지 지금이 더 나아보인다고 말했다. 나는 전혀 기분의 동요도 없이 아마 그 사진이라면 15년도 넘은 사진이라며 지금 말씀이 칭찬이신지 하고 웃음으로 대답했다. 대뜸 여자든 남자이든 꾸준히 관리를 받아야 하는 거라면서 애매모호한 말을 남기고 우리의 어색한 대화는 끝이 났다.
사람은 그렇다. 외모가 정말로 중요한 순간들이 있다. 회사에서도 비록 업무 면에서 뒤처지는 사람이라도 외모가 훌륭하다면 어느 정도는 인정을 받는 경우가 있다. 만일 여자라면 그런 경우가 훨씬 더 많아진다. 한 때 나도 조금은 심각하게 코 성형을 고민해 본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웃고 말아버렸지만 나이가 더 들고 난 요즘 가끔씩 그 흔한 쌍까풀 수술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적도 있었다. 외모는 정말로 중요한 요소다. 그래서 나는 그 부족한 면을 만회해 보려고 남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조금은 별다른 일을 하고 사는 건지도 모른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또 몸을 볶아가면서 유난히 부지런을 떨면서.
여자의 외모를 두고 대화를 할 때 주의 할 점, ‘우아하다, 스타일이 좋다.’ 는 등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는 그런 추성적인 말은 피할 필요가 있다. 더욱 더 피해야 하는 말은 ‘착하게 생겼다.’는 말이다. 한 때 ‘착하다’는 ‘잘’의 뜻으로 유행어처럼 돌기도 했었지만 왠지 여자에게 착하게 생겼다는 말은 미모의 상위 기준에서 조금은 떨어져 보일 때 최대한 기분이 좋은 쪽을 부각시켜주려고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성에게 외모에 관해 말할 때에는 ‘날씬하다, 혹은 피부가 부드럽고 희다.’는 식으로 조금은 구체적인 표현을 사용해서 말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시답게 보이지 않을뿐더러 조금이라도 오해를 줄일 수 있다고 본다.
어쨌든, 표지모델로 나온 제임스 맥어보이는 마치 [어톤먼트]의 비참한 운명을 연기했던 로비를 보상이라도 해 주는 듯 화려하고 훌륭한 모습이었다. 정말로 멋있었다.
아! 그리고 참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어릴 때 예쁘다는 말보다 똑똑하다는 말을 듣는 것에 더 기분이 좋았던 조금은 이상한 여자였다는 것을 지금 거의 처음으로 고백한다. 만일에 나도 어느 정도의 미모를 타고 태어났더라면, 물론 글로 쓰는 자유로운 가정일 뿐이지만, 나는 분명히 지금보다는 더 사랑받고 존중받고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리라.
그 다섯 번째. 읽고 나서 말하기 힘든 책
나는 내성적이면서도 상당히 보수적인 사람이다. 어느 땐 책을 읽을 때조차도 19금이라고 표기된 책은 선뜻 선택하지 못하기도 하며 다 큰 성인임에도 외설적인 영화를 보는 것에도 조금은 드러내 놓고 말 못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보았던 책은 소년이 평소 알고 있는 남성으로부터 자위행위를 경험하고 급기야 여동생을 상대로 첫 경험을 하게 되는 이야기, 유명하지만 독특했던 학자가 자신의 페니스를 방부처리 한 유리병에 보관해 유품으로 남겨 두었다가 그 유품이 훗날 공개입찰로 경매에 나오게 되는 등 공개된 자리에서 꺼내놓고 쉽게 말하기 어렵고 그로테스크한 숨은 소재로 써낸 단편 소설집이었다. 나는 몰랐다. 제목에서 내용이 무엇인가 자극적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는 못했었다. [첫 사랑, 그 마지막 의식]
하기야 지나고 보면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까미유 끌로델]을 처음으로 읽었었다. 그리고 그 맘 때 [가시나무새]도 읽었다. 어떻게 기억하는지는 다만 장면들을 그림이나 영화의 스틸처럼 막연히 상상했었다는 것 밖에는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도 지금 생각해 보니 순진함과 순수함으로 대변되는 정숙함의 속성은 내 안에 깊이 숨어 있던 외설적인 본능이 그런 야한 영화나 책, 그림들로 표출됨으로써 부각되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보통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나쁜 행동을 저지르지 않는 것도 타인의 저질적인 행동으로 인해 내면의 악한 본성을 일깨우면서도 동시에 잠재우려는 착한 이성이 지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악행을 비난하는 것은 선한 본성을 더럽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악한 본성을 더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작가의 솔직함에 감탄했으며 왠지 이제와 마흔이 넘은 지금, 사춘기 때나 받았을 성교육을 받고 새롭게 눈을 뜬 기분이 되었었다.
그 여섯 번째. 변명
올 1월에 중앙데일리 일간지에 실렸던 사설에 관해서다. 영국의 52대 총리, 마가렛 대처, 미국의 41대 대통령을 지낸 조지 부시 대통령 그리고 격변의 70년대를 지나와 우리나라의 11,12대의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 전 대통령, 이렇게 세 인물과 알츠하이머를 두고 쓴 글이었다. 물론 영자 신문이었으므로 한글로 써진 글로 읽었더라면 훨씬 더 깊고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위 세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한 나라의 지도자를 지냈다는 것, 그리고 모두 다 치매의 일종인 알츠하이머를 앓았다는 것이었다. 사설을 쓴 기자의 의도는 분명했다. 역사의 심판 앞에서 세 사람의 태도를 비교하는 것이었다.
며칠 전, ‘5·18민주화 운동 당시 헬기사격을 목격했다.’는 심판과 관련하여 재판의 관할 위반여부를 판단해 달라는 전 전 대통령 측의 신청을 두고 광주지법에서 재판이 열렸다. 뉴스에서는 대단한 의전이라도 되는 듯 모든 동선을 생중계 방송으로 내 보냈었다. 그런데 지난 날, 정작 중요한 재판에 임했던 태도는 감기몸살, 치매 등 개인 건강을 이유로 불출석한 경우가 대다수였고 그 후에도 국민들에 안면이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골프를 치는 아주 건강한 모습이 언론에 공개되기도 했던 것이다.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에 당당하게 나서지 못하는 것은 소극적으로 ‘내 잘못이요.’를 인정하는 것과 거의 흡사하다. 그건 나를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일 것이리라. 판결을 받아야 하는 지난 일 앞에서 당사자로서 찾아 먹는 권리라며 침묵하는 것을 두고 그 이외의 사람들이 알아서 판단을 내리는 것을 그 당사자가 비난할 근거는 없어 보인다. 상식적인 행동 앞에서 권리도 정당하게 보장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조금의 변명의 여지도 없어 보인다.
그 일곱 번째. 완전한 남남이 된다는 것의 의미
관계를 맺는 기본은 노동을 전제한다. 대상을 성장시키고 좋은 쪽으로 발전시켜 나가는데 곁에서 쏟는 힘, 바로 그 노동이 필요하다. 바로 관계의 유지에 관한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막내 아이가 유치원에서 월반을 하고 첫 학부모 설명회가 있던 날이었다. 스무 명 남짓 모인 아이들의 각각의 보호자들이 유치원 교실에서 선생님을 기준으로 둥글게 둘러앉아 준비물에 대한 행정사항을 듣고 있는데 거의 내 맞은편에 앉아 계시던 백발의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띄었다. 엄마가 바쁘니 할머니가 대신 와준 것이라 짐작한 나는 ‘그 아이는 좋겠구나.’는 생각을 했다. 나의 경우엔 부모님이 멀리 계시니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어딘가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저 분, 2년 전 쯤 파출소에서 보았던 그 분이다. 정확히 기억이 났다. 며느리가 집을 나갔다며 가출신고를 위해 파출소에 오셨던 분이셨다. 그런 분들이야 흔하지만 내가 저 분을 이렇게 단번에 기억하는 이유는 그 날 그분의 태도 때문이다. 성인의 경우 가출신고는 일정한 거처가 확인된 경우라도 정작 본인이 가족들과 연락을 원치 않으면 신고자에게 가출자의 현재 상황을 알려주지 못하게 되어 있다는 점을 설명하니 무슨 이런 경우가 있느냐면서 자기는 삼백만원도 넘는 연금 수급자이며 현재 나의 위치를 두고 장차 내가 퇴직 후 받게 될 연금의 액수까지 언급해가면서 자기보다 수준이 낮다는 식으로 말을 하면서 모든 사람을 자신보다 깔보는 완전히 막무가내였기 때문이었다. 하나 뿐인 아들이자 가출한 며느리의 남편이라고 함께 온 남자는 한 눈에 보아도 지능지수 세 자리를 넘지 않아 보였고 그 자리에서도 말끝마다 엄마에게 퉁을 먹고 있었다. 아내는 베트남 여자였다. 결국 나는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연락을 해서 아내의 출입국 사실까지 확인 후 가능한 많은 안내를 했던 기억이 난다. 만일을 대비해 베트남어 동시통역을 맡고 있는 단체를 알아봐 드리기도 했다. 그러니까 지금 할머니와 함께 온 내 아이와 같은 반이 된 저 꼬마아이는 ‘엄마와 한 집에서 살고 있지 못하겠구나.’ 싶었다. 아이는 보통의 아이답게 해맑게 웃으면서 또래들과 장난치고 어울리며 소란한 틈 속에 섞여 있었다. 물론 내 아이도 동무들 틈에서 웃고 떠들며 간식을 나눠먹고 있었다.
모임이 끝나고 돌아오면서 이른 이갈이를 시작한 그 아이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굳이 내 아이와 비교하지 않았지만 그냥 엄마 품이 한참 그리울 나이에 함께 지내지 못하는가 싶어 마음속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이는 자기 엄마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고 있을까? 그래, 똑똑하신 할머니가 계시는데 뭐가 문제야. 따지고 보면 내 아이도 반쪽사랑만 받고 있잖아. 더더욱 마음이 안 좋아졌다. 내 아이도 내 아이의 친구인 그 아이도 해맑게 웃으며 놀고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알고 있는 관계, 모르고 있는 관계, 남남이 아닌데도 남보다 못한 사이로 살아가는 관계에서 각자의 의무를 어떤 식으로 완수해야 할까. 단지 함께 살지 못하는 것을 두고 완전한 타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때로 헤어져 있을 기회를 통해 상대에 대한 감정을 일종의 객관적인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 기회로 그동안의 각자의 태도와 실수들이 분명하게 나타나게 되면 현재 곁에 없는 상대에 대한 여러 가지 습성들, 행동, 감정들을 짐작해 보기 곤란하다는 사실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고 비로소 남남이 되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함께 있지 않은 상대가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궁금해지며 그리워하기도 하다가 그만 슬픔까지 느끼게 되는지도 모른다. 함께할 때 사소한 것들을 물어보고 살피는 것을 소홀히 여기고 안이하게 여긴 무관심,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해버린 배려들을 기쁨으로 깨닫지 못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일 수 있다.
관계를 끝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전부다 지난 시간을 회상하는 것과 연관된다. 공간의 분위기를 따져 보았을 때 연관기억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면서 나를 압도할 때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과거라고 말하지 않고 추억이라는 조금은 까다로운 시간 개념을 갖다 붙이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고민들로 괴로워하기도 하는데 그중 하나를 꼽자면 후회하는 감정이다. 돌아보면, 그때의 형편에 따라 지낸 것일 뿐인데도 과거라는 공간속으로 빠져버려 형체가 소멸된 채 감정만이 남은 그 시간들을 다시는 만나볼 수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관계는 비슷한 시공간에서 연결되고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내 아이의 동무인 그 아이의 엄마는 언제까지나 그 아이의 엄마이지만 지금의 관계는 단절되었다고 보는 것이 잔인한 사실이지만 맞을지도 모르니까.
그 여덟 번째. 정반대의 사실은 종종 같은 경로에서 만난다.
육중한 무게는 본래 가벼움의 존재 증거가 되며 요동치는 떨림은 고요함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현상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나는 한편으로는 실패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웬만큼 성과가 있는 사람이다. 우리 부모님의 입장에서 나를 본다면 나는 실패한 자식농사인 것이나 다름없다. 나라는 자식은 언제나 부모의 걱정거리로 남게 되었다는 뜻에서 그렇다. 그러나 나는 나의 선택과 행동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그 선택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거니와 삶을 주인으로서 견뎌낼 의지와 책임을 지고 가야겠다는 결의를 볼 수 있는 것으로 인생의 목적과 목표가 분명하지 못한 사람들에게서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는 언제나 삶에 있어 진지한 태도를 유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인생은 실제 상황이고 예행연습이 없다는 이유이다. 그래야만 최소한 삶의 제 속도를 유지해 나갈 수 있다. 학생 때 어른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아마도 ‘공부도 때가 있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며칠 전 아이들을 태워다 주는 등굣길에서 나는 ‘punctual’이란 단어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다. 공부에도 다 때가 있다는 말도 빼먹지 않았지만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생활 습관이 그 사람의 적당한 삶을 놓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때를 잘 지켜야 한다고 조금은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했었다. 그것이 인생을 잘 살아나가는 비결일 것이라고도 말했다.
내 아이가 엄마의 말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면 나도 때를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안다. 마흔이 넘은 나이라면 아무리 100세 시대라고는 하지만 소설의 기승전결의 단계 중에서 ‘승’을 지나쳐 전의 단계로 향해가고 있는 시기라고 봐도 틀리지는 않다. 점점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 나이의 의미는 퇴색해 가고 있다지만 그래도 그 때의 중요성이란 무시할 수 없다. 소질이 있든 없든 일단 내가 글을 써 보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삶에 대한 나의 자세를 더욱 공고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글을 쓴다는 것은 한 사람의 생각과 경험과 지혜 등을 다소 축약하여 기록할만한 형태인 글자로 지면상에 가두어 놓는 일로서 한 번 갇힌 활자는 좀체 수정이나 가감이 쉽지 않고 글쓴이의 두 번 손대기 꺼려지는 본능 탓과 함께 틀에 박혀 버리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을 쓰는 사람은 말을 할 때의 신중함에 견줄만한 고민과 집중으로 삶에 대해, 인생에 대해 줄곧 진지한 태도를 견지해야할 의무가 더 커지는 것이다.
마무리는 언제나 빨라야 좋다. 끝이 지리멸렬한 것들은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모처럼 하늘이 벗겨졌다. 은근하게 빛나는 태양빛이 막 세수를 끝낸 민낯같이 신선하고 상쾌하게 하늘의 분위기를 바꿔놓았고 저 너머 형체가 불명한 새떼가 그림처럼 도열에 맞춰 날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아래 저 멀리 막 인근 역을 통과했을 전철이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때 이른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