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일 년 전 그날에는 화단에 눈꽃이 쌓이고 있었다. 아직 철모르는 가녀린 나뭇가지 사이사이에 입속 가득 물을 물고 있던 눈송이가 급하게 제자리도 못정하고 무질서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가 그 날의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보라고 말해도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기억해 낼 수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 때 근무지였던 사무실의 출입구부터 순서대로 말로 해 내라고 한 대도 아주 명확하게 묘사해 낼 수 있다. 그건 내게 여느 사계절과는 다른 또 하나의 다른 계절로 다가왔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일 년이 지난 오늘, 그 계절이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다시 찾아 온 춘분, 그 건 나에게 또 다른 계절이었다.
낮과 밤의 똑같은 길이, 사이좋게 추위와 더위를 균등하게 나눈 춘분은 신선한 공기와도 같이 새로운 것에 대한 충분한 자극제로 우리들 마음속에 용기라는 작은 씨를 뿌려준다.
이른 새벽, 문득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첫 쌍둥이 조카들에게 이모로서 무언가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천재적인 시인이 금방 떠오른 착상을 즉흥시로 쓴 것이 명작으로 남았다는 일화처럼 그와는 비견될 것은 아니었지만 보낸 문자부터 기록하고자 한다.
<독의 가치>
모든 씨앗에는 자기만의 독특한 독을 갖고 있다.
그것은 싹을 틔워 하나의 객체로 성장하기 위한 방어력이다.
나에게도 독이 있다.
거친 세상 속에서 난관에 맞서고 개척해 나아가 본연의 나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나를 독하다고 비난하는 것에 분개하지 마라!
그건 그들보다 내가 한층 더 발전될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거북의 등껍질>
거북이는 죽을 때까지 등껍질을 업고 살아간다. 거북이가 딱딱하고 무거운 등껍질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숙명이라고 여기고 체념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 안에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몸이 거북이의 진짜 모습이며 어쩌면 용이 되고자 하는 이무기의 또 다른 모습일련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한 그 안쪽에는 수 백 년 동안 묵은 진주가 붙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벗어던지려는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채 모르는 상태로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에 불평하며 사는 것, 사실은 현재에 안주하고 싶은 안일함이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 혹은 안이함이며, 본심은 그것을 깨고 나올만한 시도조차 못하는 소심함과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진실로는 외부에서 시작된 것에 문제를 삼기보다는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족이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자신을 오해하는 데서 오는 오류가 외부 탓만을 하는 심각한 역설적인 부조리를 낳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보다 객관적인 상태에 두고 논리적으로 생각해 봄으로써 콤플렉스로 가득 찬 세계를 깨뜨리고 갈라진 틈으로 새어드는 빛을 통해 비로소 본연의 문제를 직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리라.
물가에 사는 나무보다 척박한 땅에 뿌리내린 나무가 더 활발하게 증산작용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자기가 흡수한 물보다 더 많은 양을 수분을 발산한 다는 것을. 즉, 발상의 전환 – 외부의 여건도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알아야 하고 찾아내야 한다. 문제점을 똑바르게 볼 수 있는 사람은 한 층 더 높고 더 넓은 공간에서 더 많은 양의 빛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힘든 처지의 누군가에게 조언을 할 때는 대책 없이 막연히 ‘다 잘 될 거야.’라고 무조건식의 긍정적인 말보다는 현재의 문제를 똑바로 볼 수 있도록 그 방향을 안내해 주는 것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반드시 발전하고 성공하는 것만이 가치가 있는 인생인 것 만은 아니다. 비록 조금은 비관적일지라도 외압에 휘둘리지 않으며 확실한 주관으로 꾸준히 나아간다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훌륭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삶의 여정이란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세우기 위한 일련의 과정일 것이다. 고난의 연속일지는 모르나 시행착오를 통해 인내하는 것을 훈련하고 배워나가는 단계를, 바로 그런 단련을 통해서 그동안 잃어버린 자신감을 찾게 되고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 말로써 입으로만 떠들어 대는 자존감, 즉 단련되고 훈련되지 않은 자존감은 허영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서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아픔을 겪은 직장의 선배로부터 우연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동안 외모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살다보니 전 남편의 행동에 수치스러움을 느낀 적이 있었다고 하면서 뷰티 숍에 다닌 지 몇 개월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선배의 행동을 칭찬했었다. 하나는 용기를 주고 진심으로 수긍할 수 있는데서 온 의미였고 다른 한 가지는 예뻐져야겠다고 다짐한 뒤 노력한 행동들을 높이 평가할 만한 이유는 바로 그녀의 삶에 대한 자세가 비로소 적극적인 방향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삶에는 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숫자만큼 다양한 서로 다른 길이 존재할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각자의 정당함의 근거가 되는 정체성에서 우리가 서로 서로 통하는 길이 열려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갈 때 가능해 진다고 본다. 그 책임의 본질 또한 외부 압력에 밀려 떠안고 가기 보다는 스스로 부과할 때 비로소 가치가 생기며 오래갈 수 있고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란 바로 자기만의 훈련을 통해 확립될 수 있는 정체성과 같기 때문이다.
<이모가 쌍둥이 조카에게>
P.S. 반드시 자신을 발전시켜가면서 사는 인생만이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만의 주관을 가지고 꾸준히 나아간다면 그 자체로도 충분히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비가 오는 춘분이구나. 작년 춘분에는 눈비가 섞여 내렸단다. 춘분이 왔다는 건 다시 이 계절을 활기차게 시작해봐야 한다는 것과 같다고 여긴단다. 지금 생활이 힘들게 느껴지더라도 지나보면 기억도 나지 않게 될 날들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힘들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순간순간 최선을 다했다고 느껴질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이모가.
또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 왔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고 나는 일터에 있었다. 서류상의 작별은 그다지 최근이었지만 우리는 벌써 오래전부터 단지, 누가 먼저 말하기 어려웠을 뿐, 심각하게 이별을 고민해 왔는지도 모른다. 나는 우리의 이별을 하나의 거점이라고 말하려고 한다. 종착역까지 함께 가야 하는 우리들은 이제 각자의 선로를 탄지 오래되었고 그것은 이제 난관을 함께 극복하지 않아도 되며 급기야는 같이 손을 잡고 뛰어내릴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거점의 의미가 사실은 매우 하찮은 쉼, 사소한 호흡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일상의 모든 일들에 그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다보면 이미 그 자체로도 너무나 복잡해져서 정말로 중요한 것을 놓쳐 버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실패라는 말은 쓰고 싶지 않다. 단지 고통을 함께 감내할 준비가 어느 한 쪽에 덜 되어 있었던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의미 있는 인생으로 살고자 한다. 높은 이상이나 가치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뉘우침과 무력함에 대한 극복의지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추위와 더위를 나란히 나눈 춘분, 역시나 해와 구름과 바람이 서로 번갈아가면서 자기주장이라도 하는 듯 반짝하고 해가 나오는가 하면 금방내로 바람이 구름의 등을 떠밀어 해를 가로막아 땅 전체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곤 했다. 작년에는 눈과 비와의 향연이었다지만 날씨가 급하게 변한다는 것은 똑같았다.
공존, 나는 그래서 춘분을 평행선상의 대립이 아닌 병행, 바로 함께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낮과 밤, 추위와 더위, 그리고 좌절과 희망의 대조적인 모든 것들이 평행선을 타고 그 길을 나란히 함께 가는 것이라고 여긴다. 모든 관계는 이러하듯 같은 방향을 보고 나아가야 오래가는 법이다. 관계의 각, 그러니까 틈이 생기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만큼씩 가까워지기는 하겠지만 결국 만남의 지점, 그 거점을 시작으로 조금씩, 점점 더, 영원히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함께 간다는 것의 의미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리라.
그러나 나에게는 결국 거점이라는 것이 찾아왔다. 벌어진 틈, 그러니까 각이 평행선을 흔들어 놓았고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점점 멀어지고 영원히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한편으로는 별일 아니라고 여긴다면 그럴 수도 있다. 문득, 카뮈의 뫼르소가 왜 살인을 저질렀느냐는 판사의 질문에 했던 대답이 떠오른다. 해가 너무나 눈이 부셔서 사람을 죽였다고.
오늘 아침에 세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오는 데 유난히 큰 북서풍이 불어왔다. 서풍이 강하게 불어오는 날엔 인근 달걀농장에서 풍기는 특유의 불쾌한 닭똥냄새가 특히 코를 푹 찔렀다. 저절로 인상을 찌푸린 아이들은 서로를 지적하면서 방귀를 낀 것이 아니냐고 장난을 쳤다. 그래서 나는 오래되고 낡은 지금의 아파트에 살기 시작하면서 부터 동풍이 세게 부는 날을 좋아했다. 그 바람은 닭똥냄새를 우리 집 반대쪽으로 멀리 날려 보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대부분 날씨가 추운 겨울철에 잠깐씩 불었으므로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런 날에는 날씨가 춥긴 했었지만 산책하는 것도 좋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