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나무, 벚나무도 결국은 항복하고 말았다. 더 버텨보았자 하루 이틀 늦출 수 있을 뿐이다. 4월 4일 아침 출근길, 정확하게 14시간 전만해도 기세가 등등하던 나무는 밤사이 무슨 결단이라도 내린 듯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있던 몸에 힘을 빼고 딱딱하고 거친 껍질을 부드럽게 벌려 주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사이로 진분홍 복사꽃과 연분홍 벚꽃이 고개를 내밀어도 되는지 눈만 살짝 내놓고 지나가는 사람들, 자동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어김없이 나를 붙잡는 사거리 신호기 옆에 서 있던 벚꽃 잎과 눈이 마주쳤을 때 이제 나와도 된다고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주었으므로 안심하고 기지개를 펴고 속도를 낼 것이다. 아마도 10시간 더 흐르게 되면 눈만 보였던 꽃잎들은 입술까지, 목까지 그 고운 얼굴을 완전히 내 놓고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자동차, 그리고 주변 경치들을 바라보면서 작년과 변한 것이 있는지 생각해 볼 것이다. 나는 그럴 것을 짐작하고 초록신호 때문에 벚꽃나무를 등지로 돌아섰다.
지난 금요일, 3월 29일, 파출소 화단에 있는 세 그루의 백목련은 오후 3시경, 보기에 가장 예쁜 꽃을 피우고 있었다. 문득 그 아래 앉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전 여고생이던 시절이 생각났다. 학교 화단에 줄지어 서 있던 백목련은 한꺼번에 꽃을 피우고 나면 해가 저물어가면서 하나 둘, 셋, 꼬마전구를 켠 듯 뽀얀 빛을 밝혔다. 둥그렇게 둘러 서 있는 목련꽃은 은근하게 향기를 흩날렸는데 인생에 가장 순수한 순간의 정점에 서 있던 우리의 모습을 닮아있었다.
‘이른 봄철 나무그늘에 앉고 싶다면 꼭, 어느 나무도 아닌 목련꽃 나무 그늘에 앉아라. 여고생은 그래야 한다.’고 말했던 수학선생님한테 반해서 우리 반 수학 수업을 들어오지 않던 선생님이었는데도 나는 그렇게 그 선생님을 따라다녔었다. 학급 실장이던 내가 수업 시간을 아프다는 핑계로 빼먹고 그 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러 다른 학년 다른 반 교실에 몰래 갔었다는 사실을 비밀처럼 희미해진 추억으로 간직하며 살고 있지만 매년 이렇게 목련이 피는 때가 되면 이름도 잊지 못하는 그 수학 선생님, 하필 이름도 수학선생님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처럼 ‘수열’이던 김 수 열 선생님이 생각난다.
오늘은 4월 4일, 아침 출근길에 우리 파출소 화단에 핀 목련은 시커멓게 시들고 있었다. 꽃이 지는구나. 그 아래 한 번 앉아 보지도 못했는데...... 그래서 나는 일부러 자동차를 목련꽃 그늘이 드리워지는 그 바로 아래 댔다. 이제 앞으로 연두색 이파리가 나오기 전까지는 계속 서운할 것 같다.
자연은 순조롭다. 질서를 잘 지킨다. 그리고 생각이 있는 듯 양보할 줄 안다. 사람처럼 무엇을 거스르는 법이 없다. 꽃이 피었다가 질 때 되면 또 다시 다른 꽃이 피어난다. 문득 인간은 왜 저렇게 모든 것이 저절로 지나가도록 가만히 있지 못하는 걸까, 눈앞에 걸림돌이 보이면 꼭 치워내고 가려고 하는 이 마음은 무엇일까, 그냥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게 되더라도 돌아서 가면은 될 텐데, 자연의 순리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매번 그렇게 감탄하고 본받고자 하면서도 실천하지 못해서 어긋나게 될까.
이것은 비단 내 자신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를 두고 보더라도 한번쯤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하는 것이 아닐지 그런 생각이 든다. 사실은 어제, 4월 3일, 어제의 일을 다 끝내고 막내를 재우려고 누워 있으면서 휴대폰을 보았었다. 국내 유명 포털사이트(N)를 열자 메인 화면이 싹 바뀌어 있었다. 처음엔 내가 설치하지도 않은 어플리케이션이 설치되어 있다고 착각하고 홈 버튼을 계속 눌렀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오늘, 4월 4일, 신문을 보다가 [Naver news to be run by AI from tomorrow]라는 기사가 4월 3일자 신문에 실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렇지. 나는 전날 신문을 받아보는 구독자 이므로 하루 늦은 소식을 보는 것이지.’ 그러면서 어젯밤 아이를 재우면서 우연히 본 모바일 포털 홈 화면의 변화가 떠올랐다. 신문에 손바닥 크기의 화면캡처 사진이 따라 붙어 있었다. 그리고 다른 말보다 나를 가장 당황스럽게 했던 것은 나의 뉴스 취향, 모바일 구매내역 등을 자료화 하여 AI Recommender System에 의해 뉴스 등을 배열하고 빠른 뉴스를 업데이트 해준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내 빅 데이터를 활용해서 수요자에게 보다 효율적으로 똑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취지인데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Facebook 창업자 Mark Zuckerberg도 개인정보 관리로 인한 문제로 얼마나 오래 긴 시간동안 법적분쟁에 시달려오고 있는지만 보더라도 발달된 기술이 인간에게 가져올 역기능이 얼마나 크게 될지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일이다.
사실, 올 초에 차를 새로 바꿨다. 소형차로 아이 셋을 태우기에는 위험부담이 컸기 때문이었다. 나의 예산을 고려해서 중고차를 구매할까 고민을 해 보았었지만 내달 국내 모 자동차의 신 모델의 출시에 앞서 기존 차량에 대한 프로모션 조건이 좋아서 덜컥 구매를 하면서 나는 비슷한 예산으로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던 비슷한 사양의 차를 새차로 구입할 수 있었다. 새 모델에는 다양한 AI기능이 추가로 지원된다는 이유로 수요자가 많을 것으로 예상하여 기존 차를 재고처분 하듯 판매하는 것이었는데 솔직히 나는 운전을 하는 중에 운전말고 달리 무슨 일을 이중으로 하면서 운전에 필요한 정신의 집중을 분산하면서도 안전운전을 할 수 있다는 이런 취지가 과연 정말로 타당한 것인가를 생각하면서도 그냥 내 관심 밖의 일이니 더 이상의 고민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흥미도 생기지 않았다.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로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작년 말 기사가 아니었나 싶다. 아버지의 주치의가 AI Doctor이었는데 이제 더 이상의 치료가 불가한 상태라고 하면서 ‘사망선고’를 내렸다는 것이었다. 이에 가족들은 인간이 아닌 로봇이 내린 사망진단을 진정으로 수용하고 인정해야 하는지를 두고 다툼이 있다는 기사였다. 가장 최근의 기사로는 발트 3국 중에 한 나라인 에스토니아에서는 몇 년 이내로 7,000유로(약 900만원) 이하의 벌금에 해당하는 사건에 대해서는 AI 판사가 직접 심리하고 판결까지 내려 법원당사자에게 모바일 문자메시지로 판결문을 보내고 재판을 종결할 것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 AI가 재판의 전 과정을 인간없이 진행하게 되면 일자리가 줄어들 것과 기계의 결함으로 인한 잘못된 판결 등 야기될 문제점들에 대한 여론조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것은 ‘앞으로 그렇게 된다면 이러한 혼란이 오게 될 것이다.’라고 예상만 할 수 있는 상황은 이미 지났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역사적으로 이와 비슷한 상황들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제4차 산업혁명의 화두가 첨단기술전략이라고 한다면 18세기 말엽부터 영국을 중심으로 시작된 제1차 산업혁명은 노동의 기계화로 인한 대량생산이 필두가 되었었다. 당연히 대량생산이 가능해짐에 따라 도시의 발달을 이룩하였으나 노동운동도 부수적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기존 수공업 중심 사회에 필요했던 인력이 기계화로 인해 불필요한 것으로 전락되어갔기 때문에 가장들은 실업자가 되고 가정 경제는 궁핍해졌다. 약 한 달 뒤 5월 1일을 ‘근로자의 날’로 지정하여 놓고 일반 기업체는 그날을 대부분 휴일로 정하고 있다. 바로 노동의 중요성의 의미를 되새겨보자는 데 있는 것이다. ‘러다이트 운동’에 대해 많이 알고 있을 것이리라. 5월 1일, 각종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에서 일일 퀴즈로 나올 법한 문제의 해답이다. 바로 일명 ‘기계 파괴 운동’이라고 불리는 러다이트 운동은 방적사업의 기계화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많은 기술자와 숙련공 등 관련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실업자가 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대부분 집안의 가장들이었던 그들이 갈수록 빈곤해지는 가정환경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공장의 기계들을 파괴하기 시작하면서 노동운동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러다이트 운동이 생겼던 것이다.
이렇게 앞으로 많은 분야에서 인간이 하고 있는 일이 로봇으로 대체된다고 한다면 또 다시 이러한 일들이 생기지 않는다고 과연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싫든 좋든 AI는 빠른 속도로 우리 생활 속 많은 곳으로 파고들어오고 있는 중이다.
나는 또 다시 아파트 화단에서 붉은 꽃망울을 입속에 꽉 다물고 있는 명자나무를 바라보았다. 바늘에 찔려 피가 막 한 방울 맺혀있는 모습과도 같이 이파리 속에 아기가 주먹을 쥔 모양으로 꽃송이를 꼭꼭 감추고 있었다. 아마도 일주일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꽃을 활짝 피우기까지는 오래 남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이제까지 우리 아파트에 살면서 그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아왔던가. 로봇 의사, 로봇 판사, 로봇 자동차 그리고 로봇이 만들어 내는 음식점들의 햄버거, 피자 등등 투입된 자료로 연산하고 결과물을 산출해 내는 로봇들, 나라면 왠지 뭔가 석연치 않은 문제들로 만족을 느끼지 못할 것 같단 느낌이 든다. 물론 최근 이탈리아에서 여성 법관이 강간사건에 대한 무죄를 내린 판결 – 주문에 대한 이유는 바로 해당 남성이 무척 매력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피해자인 여성이 남성적으로 생겼다는 점을 감안하여 강간을 당했다고만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로 마음속에 완전한 거부감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왜곡된 심리 – 을 내리게 되는 치우친 판결이야 피해갈 수 있더라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진정성 있는 마음으로 내릴 수 있는 그러한 판단을 기대하는 사건들에 있어서는 과연 전부다 납득할 만한 결과로써 도출이 될까 의문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은 신체보다 더 접근하기 어렵다. 이것은 전자를 인간으로 후자를 로봇이라고 정하고 싶다. 그리고 인간은 타고나기를 기계보다는 자연에 더 친숙한 존재로 되어 있다. 어떤 일을 완성하려면 오로지 대상의 일방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바로 상호간의 협조와 배려와 존중, 즉 내면의 교류가 선행되어야 하며 이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힘이란 것은 바로 느낄 줄 알고 감동할 줄 알고 제대로 실행할 수 있는 행동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더 멀리가기 전에 우리는 중요한 것들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깨진 것은 이전대로 돌릴 수 없는 것, 단지 그 상태에서 앞으로 새롭게 나가야 한다는 것이 밀려 쓰지 못한 방학 일기와도 같이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자연에 동화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속에 여유와 편안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렇게 신문을 열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다시 마음이 조급해진다. 그런데도 나는 신문을 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좁은 집이지만 작은 화분이라도 더 키우려고 한다. 어제는 양파를 까다가 유난히 푸른 싹이 길게 나 있는 것을 골라서 유리병에 물을 담고 양파 뿌리를 병 입구에 올려 앉혔다. 하루사이 양파 싹의 허리가 천정으로 곧게 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아! 그리고 오래전 아이들과 함께 재미있게 보았었던 영화 [월E]를 또 다시 봐야지 생각했다. 그 때 느꼈던 감동을 다시 한번 더 느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