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우리 집에 들어와 함께 살게 된지도 어느새 3주가 되었지. 너는 몸집도 작고 겁도 많아서 한번 만져볼 수조차 없었어. 물론 나 또한 낯선 너를 처음 만났을 때는 솔직히 겁이 났던 것도 사실이야. 너를 내가 감당해낼 수 있을까 그리고 너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으로 품어 줄 수 있을까. 내 마음속에 질문을 던지게 된 거지. 어쨌든 그 때 당장은 너를 버릴 수는 없었어. 첫날 밤, 너는 작은 목소리로 거의 밤새 울었어. 나도 네 목소리에 하도 긴장을 해서 시간마다 너를 살펴보러 일어났었지. 어둠속에서 별처럼 빛나던 너의 작고 단단한 까만 눈동자가 내 인기척에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을 보았어. 한 번, 두 번, 세 번, 나도 솔직히 말하면 너처럼 겁이 났던 거야. 너처럼 나도 너를 잘 모르고 너를 어떻게 대해주어야 네가 편안할지도 잘 몰랐고 솔직히 급하게 공부를 하긴 해서 아주 조금 너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뒷감당에 자신이 없었지.
그날 새벽 나는 너를 처음으로 만져보았어. 이상하게 너도 나에게 몸을 순순히 맡기면서 눈을 조심스럽게 감는 것을 보고는 네가 이제 좀 지쳤다고 여겼어. 사실 나도 밤사이 온통 너의 울음소리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서 피곤한 상태였거든. 너를 불러야 하는데, 너에게 이름을 지어줘야 하는데 어떤 이름이 좋을까. 평생 함께 다녀야 하는 이름을 잘 져주고 싶었지. 동그랗고 통통한 몸집에 가을철 밤 껍질을 닮은 진한 갈색의 털을 가진 너에게 어떤 이름이 어울릴까. piggy, brown. 그래! 너의 이름은 이제부터 피기부야. 피기부! 그래서 너는 이름은 피기부가 되었고 너의 나머지 형제들도 너를 피기부라고 부르기 시작했어.
그런데 나는 아직도 네가 여자애인지 남자애인지 잘 몰라. 너의 약점인 배를 좀체 볼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우연히 네가 몸을 길게 늘이면서 스트레칭 하는 걸 보고 말았지. 그때 우리 큰 아이가 보았다고 확신에 착 목소리로 말하길 네가 분명히 여자애라는 거야. 그래서 나는 너에게 나의 아이들을 오빠라고 부르라고 했어. 정우 오빠, 선우 오빠, 단우 오빠. 얼마나 잘 된 일인지 너는 모를 거야. 왜냐하면 한참 전부터 막내 오빠가 나에게 여자 동생을 갖고 싶다고 얼마나 졸랐었는지를 안다면 네가 여자애 인 것을 알았을 때 나의 마음이 조금은 더 안심이 되었다는 걸, 막내가 오빠라고 불릴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에 마음이 기쁘기까지 했다는 걸 짐작도 못했을 거야. 새벽에 물을 갈아주고 먹이를 주고 오빠들이 먹는 간식을 나눠줄 때 너의 행동이 조금씩 차분해지는 것을 보았어. 나는 그걸 네가 나에게 조금씩 마음을 여는 것이라고 느꼈어.
고기를 좋아하는 나와 달리 너는 채식주의자이고 변비의 고통을 비웃기라도 하듯 맘만 먹으면 언제라도 응가를 누었어. 솔직히 그것이 나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였었지. 나는 상당히 깔끔한 사람인데 정말로 상식이 부족해 보이는 너의 행동들을 견뎌낼 수 있을지 받아들일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이제야 겨우 거의 10년 동안의 기저귀 뒷수습에서 해방된 상태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네가 이해한다면 나에게 그렇게 서운한 마음은 들지 않을 거야. 우리 서로에 대해 마음을 터놓지 않았으니 너는 너대로 나는 또 나대로 오해하고 지내면서 어떻게 마음을 나눌 수가 있겠느냐고.
나는 물티슈와 기저귀를 거의 10년 동안 사들이고 세 오빠들의 모유수유를 7년이 넘도록 하는 동안 가슴의 모양은 거의 납작해져버리고 솔직히 처음 얼마동안은 오버 사이즈의 외투로 몸매를 감추기도 했을 정도였으니까. 아무튼 여전히 우리에겐 시간이 필요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너도 아직은 내 눈치가 보이지? 그런데 있잖아. 어느 날부터 딸기를 씻으면서 일부러 꼭지를 따지 않고 몇 개 남겨놓는 버릇이 생겼어. 네가 딸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았으니까. 너는 착하게도 파란 딸기 꼭지까지 다 완전하게 먹었잖아. 사실 오빠들은 딸기를 먹을 때 덜 익은 부분을 처음부터 베어 버리고 아예 먹지도 않거든.
참. 그리고 어제는 너를 위해 몇 가지 쇼핑을 했어. 네가 좋아하는 사료와 너의 잠자리를 푹신하게 해 줄 티머시 건초, 그리고 특별히 좋아하는 해바라기 씨까지도. 기니피그, 피기부 너! 전체 수명을 따져 보았을 때 너의 나이는 아마도 단우 오빠보다는 위 일거라 짐작되지만 그래도 일단 우리 집에 가장 늦게 들어왔으니 막내로서 대우해 줄 테니 너 또한 우리 집의 막내로서 단우 오빠처럼 귀여움과 애교가 넘치는 사랑스러움을 조금이라도 보여주길 바래. 그건 함께 같은 집에 사는 가족의 일원으로서 마땅히 져야하는 의무이자 너의 특권이야. 알아들었지!
3주전, 선우는 학교 공중전화로 회사에서 일하는 내게 열 번도 넘게 전화를 했다. 쉬는 시간이 되면 1층 북쪽 끝 출입문에 설치된 콜렉트콜 전화기로 달려온 것이다. 기니피그를 집으로 데려가면 안 되느냐고. 선우가 방과 후 수업으로 듣고 있는 과학탐구 시간에 특별히 기니피그 세 마리 중 선착순으로 한 마리씩 분양한다는 말을 일주일 전부터 들었기 때문에 나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거부도 해 보았고 지금보다 넓은 집으로 옮겨가게 되면 그때는 정말로 강아지, 고양이 중 원하는 동물을 키우자고 달래보기도 했었다. 그런데 선우는 당일 교문에서도 끝까지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나 또한 아이와 끝까지 대치 상황에서 합의를 보지 못한 채 그대로 각자의 생활 터로 돌아갔던 것이다. 나를 설득하기 위한 열 번이 넘는 전화, 허락을 해 준다면 엄마의 요구대로 밥도 잘 먹고 말도 잘 들으며 언제나 착한 아이가 되겠다는 회유, 만일 허락하지 않으면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협박까지 아이 입장에서 해 볼 수 있는 모든 걸 다 하는 것 같았다. 결국에 나는 아이에게 져주기로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다. 아이가 나를 이긴 것이다. 그렇게 해서 피기부는 우리 집에 왔다. 정우 말이 선우는 그 날 아침 울면서 교실에 들어갔다고 했다. 큰 아이 작은 아이 둘 다 그날 저녁 집으로 오면서 책가방을 태권도 도장에 두고 왔을 만큼 온통 신경을 그 녀석에게 집중한 상태였다. 나는 또 앞으로 얼마나 오래 배변 판을 갈면서 톱밥을 사들여야 할지 모른다. 그날 밤 잠을 자려고 누워 있는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나는 기저귀 갈아주는 일을 어쩔 수 없는 생활의 일부로 인정하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인걸까. 그냥 피식 웃음이 난다. 여전히 반갑지도 그렇다고 염려했던 것보다 거창하지도 않은 그 소일거리가 왠지 나를 허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이 귀여워~’ 계속 그 말을 반복하는 세 꼬마는 아무 걱정도 없이 잠이 들었는데 또 나 혼자 앞으로 저 아이를 어떻게 보살펴야 할지 모르는 데서 오는 막연함에 벌써 잠들었어야 할 시간을 한참이나 지나쳤는데도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아! 너 피기부! 앞으로 생리현상을 조절 못해서 네 멋대로 똥오줌을 싼다면 분명히 내가 화난 모습을 보게 될 거야. 이건 너에게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말하는 나의 제안이기도 하면서 우리 집의 실세인 나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경고이기도 해! 알겠지? 난 이제 잘 거야. 네가 우리와 달리 낮밤이 다른 건 알겠지만 생각이 있다면 너도 좀 이제 밤에 잠을 자도록 노력해봐. 적응해야지 이제부터도. 나 정말로 잔다. 잠 들 거야. 먹이도 충분하고 물도 밤새 마셔도 남을 만큼 넘치도록 꽉 차 있고, 또 핑크색 이불도 줬잖아. 이불은 그만 좀 물어 뜯어. 이갈이라도 하는 거야? 만일에 너도 다람쥐처럼 이빨이 점점 길어지는 것이 무서운 거라면 특히 딱딱한 간식을 주도록 할 테니 오늘 밤은 제발 조용히 잠 좀 자자.
그렇게 우리 집은 다시 다섯 식구가 되었고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
A 2. 서툰 이별처럼 그 결말을 모르는 것
서재의 구석(세실리아와 로비 - [어톤먼트] by 이언 매큐언), 모스크바 기차역, 기차역 플랫폼 자살(안나 카레니나와 브론스키 - [안나 카레니나] by 톨스토이), 해바라기, 태양, 옐로우 그리고 동생 태호(빈센트 반 고흐), 사과착즙기와 울타리 아래에서 키스와 첫 사랑(한스와 엠마 - [수레바퀴 아래서] by 헤르만 헤세), 담수욕과 크네히트, 그리고 너무나 황당한 결말, 죽음([유리알 유희] by 헤르만 헤세), 전쟁, 진정한 우정과 사랑(한스와 콘라딘, [동급생] by 프레드 울만), 지하실의 압축기계와 책, 그리고 집시 여인(화자 한탸, [너무 시끄러운 고독] by 보후밀 흐라발), 새, 금지된 사랑, 베아트리체 초상화(싱클레어와 데미안, 그리고 그의 어머니 에바 부인 [데미안] by 헤르만 헤세)......
기억은 퇴색하기 마련이다. 나의 연관 기억으로 떠올려 보는 주인공 운명, 연결고리이자 사랑의 매개체인 설정과 대상들.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문득 들었던 생각은 헤세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담수욕을 즐겼다는 점, 결국 한스 기벤라트는 강가에서 빠져 죽는다는 것과 요제프 크네이트가 새벽 강가에서 막 제자가 된 티토와의 수영 시합을 하던 중 심장마비로 황당하게 죽게 되는 결말만 보더라도 헤세의 강, 물에 대한 남다른 철학이 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게 된다. 헤세의 또 다른 작품 [싯다르타]를 보면 동방 철학에 상당한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의 조부와 아버지도 동양 철학에 남다른 조예가 있었다고도 하고 실제로 인도 여행을 하였던 것은 아니나 약 석 달 정도 인도차이나 반도 여행을 한 경험으로 [인도기행]을 쓰기도 하였다. 사실 나는 헤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삶과 전체의 작품의 토대가 된 그와 연결되고 있는 그 무엇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슬픔이 남은 책 [속죄]의 씨와 로비의 서재의 구석은 둘만의 단 한 번의 사랑의 의식, 그러나 죽기 전까지 고통을 견뎌낼 수 있도록 지탱해준 삶의 원동력이자 안식처,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는 둘만의 교신약호같은 것이며, 간접적으로 엿보기만 했을 뿐 나는 둘의 관계에서 전혀 상관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지만 이런 나조차도 가슴 뛰게 만드는 그 서재의 기억이 없었다면 씨와 로비의 운명은 더 비극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꼭 반드시 힘들 때 쓰러지지 않도록 부여잡을 수 있을 만한 버팀목이 있어야하는지도 모른다. 또 다른 독자들은 내가 끌어다 붙여 놓은 것을 억지라고 비난할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나는 그들에 대한 권위자도 학자도 아니며 수많은 독자들 중 한 사람일 뿐이다. 또한 스스로 글을 쓰고자 열망하는 사람으로서 전문가가 알아듣기 쉽도록 설명하고 이해를 도와주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나는 다만 묘사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거의 다섯 달 만에 아빠를 만난 아이들은 무척 들떠 있어 보였다.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내 자신이 또 다시 죄를 지었다는 생각에 아이들을 보는 내 마음은 편하지는 못했다. ‘거봐라! 내가 어디 잘 살아보라고 했지? 두고 본다고 했잖아!’라는 말을 또 다시 듣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그래서 온 종일 마음이 괴로웠다. 지금 무엇보다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마음을 비우는 것일까. 일체의 감정 상태로부터 가능한 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슬픔도 멀리하고 기쁨이나 괴로움도 줄여보는 것, 또 다른 길에 마음을 열어 놓아 다른 길을 걸어가는 것이 필요한 때인가를 느꼈다. 멀리하기, 조금은 모르는 척하면서 무관심해지기, 이렇게 한 발작 물러나는 나의 태도에 대해 소극적으로는 ‘더 이상의 절망과 원망의 감정으로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다른 방향으로 마음을 열어 놓고 누구라도 사랑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까 졸음이 쏟아졌다. 끝이 보이지 않은 상태는 여전했지만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으므로 피로와 고단함이 나를 덮친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인공들이 죽는 다소 비극적인 결말을 보면 하나의 공통된 이유가 있다. 가끔 본인조차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떠밀려 죽음까지 이르게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결국은 삶의 균형을 잃었기 때문에 스스로 죽음으로까지 몰리게 된 것이다. 균형을 잃었다는 것, 중심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며 중심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방황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삶을 영위하는 우리의 태도 앞에서 말보다는 행동으로 실천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말로는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로써 버리고자 마음먹은 것이라면 마땅히 행동으로도 버려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할 줄 알아요. 기다릴 줄도 알아요. 그리고 이제는 선택할 줄도 알았어요. 앞으로는 더 잘 행동할 줄도 알겠지요.”
한 번씩 꿈을 꾼다. 꿈이 정신 상태를 반영한다는 것은 이미 프로이트나 융, 아들러와 같은 대단한 정신분석학자들을 통해 자료화되어 있다. 내가 꾸는 꿈도 나의 생활과 마음과 정신을 반영한 것이라는 것을 느낀다. 정말로 터무니없이 ’내가 왜 그런 꿈을 꾼 것일까‘하며 꿈을 꾼 뒤에 적어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었으니까.
내가 비난을 받아야 한다면 도움을 거절한 것, 더 이상은 실수를 만회할 만한 어떤 기회나 가능성을 주지 않았던 것, 그리고 의무와 책임을 부여하지 않으면서 완전한 자유를 허락하게 된 것이 내가 그에게 준 벌이었다면, 일관된 침묵으로 듣기만 하는 것, 그저 지켜보고만 있게 되는 것이 나에게 내려진 벌이라면 벌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열정적인 사랑이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에 아쉬움을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사랑도 슬픔이 지나가면 그것이 정령 사랑이었는지 자신조차도 모르게 될 때가 있다. 그저 떠나가는 구름처럼, 언제라도 쉽게 모양을 바꾸는 구름처럼,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수 있는 구름처럼 그저 소리 없이 자취도 없는 움직임이 되어 떠나갈 뿐이라는 것을 안다. 안부를 물어오지 않는다는 건, 그것은 우리가 지녀온 일종의 감정적인 유대로 부터의 해방과도 같은 것이며 이제 더 이상은 감정의 지배와 예속으로부터 심리적인 구속을 받을 일이 없기 때문에 곧 행동의 자유와도 연결되는 것이다. 또한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그로 인한 초조함과 실망 또한 없을 것이므로 자유로움을 얻게 되는 것이리라. 한편으로는 열정의 소실과도 같으며 결국은 이렇게 관계는 단절되고 만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과 같다.
이 말없는 움직임, 이별, 그렇게 관계는 끝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끝났다는 기분이 들었다. 잊어야지 모두 잊도록 해봐야지 생각했다. '빗물에 먼지가 씻기듯 슬픔도 아픔도 잊어야지. 그동안 말없이 흘린 눈물들이 빗물처럼 모든 것을 씻어 가주기를 바래야지.'
누군가 나에게 무엇을 할 줄 아느냐고 묻는 다면 나는 또 다시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는 생각해요. 말없이 진심으로 기다릴 줄도 알아요. 그리고 숨을 참는 것을 못하지만 조금은 오래 굶을 줄도 알아요. 이제 앞으로는 모든 것을 더 잘 할 줄도 알 것 같아요. 행동하고 싶으니까요.”
"그리고 또, 잘 알고 있어요. 나의 버팀은 내 꼬마들의 성장이라는 것을요. 그래서 더 많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요."
P.S. 누군가 내 글을 읽어주기를 바라고 그래서 공감하고 이해해주기를 바란다면 처음부터 나는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반성이며 이 반성을 통해 나에게로 향하는 길을 찾아가는 시도이기도 하며 최면적인 암시이기도 하다. 솔직히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당당히 선언하듯 밝힐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끊임없이 나에게로 들어가는 길을 찾는 것, 찾도록 노력하는 것, 행동으로 옮기는 것, 이것이 사는 것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