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것도 우연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할머니께서 영원한 세상으로 떠나기 전 날처럼 온 종일 날씨가 우중충했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떨리던 엄마의 목소리를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것 같다고.’
엄마가 그 당시 그렇게 말을 애매모호하게 하였던 것을 짐작해 보면, 50년 가까이 모시고 사셨던 분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는 점, 마지막 가시던 일주일을 한 지붕아래서 함께 하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불과 하루 전만해도 정정한 모습으로 엄마와 전화통화를 꽤 오래 하셨다는 점에서 할머니의 죽음을 엄마조차도 믿을 수가 없는 현실로 다가왔던 이유라고 생각한다.
어제는 할머니의 기제사였다. 나는 어린 세 자녀를 데리고 조금은 멀다 싶은 거리를 다녀올 수 없다는 이유로 지난 주말에 미리 할머니를 찾아뵈었다. 마땅히 어제 집으로 내려갔어야 하는 것이 도리였으나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에게는 핑계와 이유가 너무나도 많았었다. 많은 친척들과 여러 가지 준비로 분주할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누구한테도 전화를 걸어보지 않았다. 다만, 오후 나절 엄마에게 전화로 준비하느라 애쓴다고만 했을 뿐이었다. 지금쯤 절을 하고 계실까? 아니, 모두 엄마가 싸준 음식을 챙겨서 각자 집으로 돌아갔을까? 이런 저런 생각에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이미 자정을 지나서 새벽으로 가고 있는 시간이었다.
어제 내가 조금이라도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 마침 퇴근길에 마주친 옆집 부부가 아이들과 저녁을 먹어도 되느냐고 하셔서 워낙에 옆집 부부를 좋아하고 따르는 아이들인지라 폐 끼친다고 말려도 아무 소용도 없이 저녁을 나 혼자 먹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10시가 다 된 시간에 집에 돌아온 애들에게 너무 늦게까지 있지 말고 오라고 했던 말을 기억시켜 주면서 왠지 옆 집 부부에게 쉬는 시간을 빼앗았다는 죄송한 마음이 들어 조금 나무랬다. 내 말에 아랑곳없이 아파트 장터에서 사온 떡볶이와 튀김을 먹고 이모가 호박죽을 쑤어 주셨다고 자랑하듯 말한다. 매운 음식을 못 먹는 막내한테는 닭고기 맛이 나는 동그랑땡을 부쳐주셨다고 했다. 세 아이 모두 기분이 정말로 좋아보였다. 한 번씩 옆 집 부부는 내 아이들을 전부 불러다 저녁도 먹이고 함께 놀아주시기도 한다. 이런 이웃을 만난 건 정말로 큰 복이라고 항상 생각하고 있다. 나만의 시간 – 내가 꼭 이 표현을 쓴 이유는 우리 집 상냥한 둘째가 옆집으로 가면서 나에게 하였던 말이기 때문이다.
‘엄마! 우리 가면 엄마도 밥 먹으면서 엄마만의 시간을 좀 가져! 알았지?’
둘째, 그 녀석은 참 자상하다. 엄마에 대한 마음씀씀이는 단연 최고인 얼굴의 외모조차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이다. 어쨌든, 그 시각에 애들은 목욕을 하고 미리 펴둔 이불속으로 들어가 바로 잠이 들었다. 이렇게 모든 것들이 평소대로 제자리로 돌아온 시간, 나도 내일을 위해 잠을 자둬야 할 것 같았다. 막내의 동그란 배가 고른 숨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다가 몸을 고쳐 누웠다. 오른쪽 어깨가 아프기 시작한 건 벌써 몇 달 째지만 9개들이 파스만 한 봉 붙여보았었지 아무런 치료를 받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른쪽으로 돌아누워서는 잘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적응되지 않아 어색한 자세인 왼쪽으로 돌아눕거나 반듯하게 천정을 마주 보고 잠을 자려고 노력해야 했다. 오른쪽 어깨가 아픈 이유는 아마도 내가 오른손잡이 인 것, 그러니까 항상 글씨를 써도 오른손으로 많은 양의 글씨를 매일매일 쓰는 것, 청소기 손잡이도 오른 팔을 이용하여 사용하는 것, 무거운 짐을 들 때도 거의 오른 손을 많이 쓰는 것,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약 7년간의 모유수유 기간 동안 오른쪽 몸을 주로 사용해서 아이들을 보듬었던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왼쪽에 비해 오른쪽을 현저하게 많이 사용한 탓으로 기능이 약해진 것이며 정형외과 치료를 받기엔 내게 시간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파스를 붙여본 것이었다. 그러나 박하사탕을 물고 들숨을 쉴 때 느끼는 청량감같이 마치 통증을 없애주는 약처럼 착각하게 만들어줄 뿐이었고 파스를 떼어낸 자리에 남은 파스모양 그대로의 하얗게 변한 쭈글쭈글해진 피부를 볼 때마다 왠지 쓸쓸한 기분이 들기도 했었다. 그러니까 파스의 효능은 붙이고 있는 시간동안에만 통증 부위의 감각을 둔하게 만드는 속임수로 마치 실제로 치료가 되고 있는 것으로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어쨌든 머릿속에 상념이 가득차서 쉽게 잠을 들 수가 없었다. 거실로 나와 베란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피기부가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잠이 든 것으로 보였고 모처럼 밤중에 잠을 자고 있는 아이의 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역시나 예상대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할머니의 장례의식 기간에도 내내 비가 내렸었다.
그날을 회상해보면 바람도 불지 않아서 중력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아 직선으로 내리는 빗줄기 모양으로 세찬 빗방울도 그렇다고 가랑비도 아닌 정말로 지금 내리고 있는 비처럼 단정한 모습 그대로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할머니 생전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고 느낀다. 인정 있고 친절하셨지만 평생 다른 사람 험담 한 번 안하셨고 언제나 사리분별이 명확한 분이시라 조금은 도도하고 새침해 보이시는 모습, 곧게 내리는 비처럼 곧은 성품을 지니 신 분이셨다. 그리고 평생 땅을 파고 농사만 지으며 고된 일만 하시며 사셨어도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허리도 전혀 굽지 않으신 꼿꼿한 여인으로서 자태도 고았기 때문이다.
주말에 할머니를 찾았을 때는 날씨가 정말로 훌륭했다. 미세먼지도 없는 모처럼 청명한 대기를 누빌 수 있었다. 내 꼬마들은 할머니에게 제 각자 인사도 나누고 예의 바르게 절도 올렸다. 그리고 가져간 술도 따라드리고 과일과 음식들도 함께 나누어 먹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봉분 위에 난 잡풀도 뽑았고 흙 한 줌씩을 쥐어 뿌려드리기도 했다. 그건 잔디가 잘 자라라고 퇴비를 주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그리고 우리들은 할머니 앞에 나란히 앉아 할머니가 바라보는 눈으로 주변의 경치를 바라보았다.
둥그런 모양의 복사꽃 밭, 하늘과 경계를 나누고 있는 큰 산 품안에 안겨 있는 작은 산들의 첩첩 쌓인 봉우리들과 골짜기들, 곧 고추를 심을 것으로 예상되는 검은 포장을 씌워 정리 정돈이 잘 된 밭고랑이 긴 밭, 질서정연한 군대식 도열로 배치된 인삼밭, 간간히 차들이 지나다니는 왕복 1차선의 구 도로, 어릴 적 수없이 가 보았던 경험으로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마음속에 그려지는 산자락 아래 도로가 난 방향대로 물이 흘러가고 있을 시냇가, 그 냇가 옆 고추밭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우리 엄마 고추 따고 있을 때 나는 냇가에 발 담구고 작은 돌 뒤집어 가면서 가재를 잡았었던 날들, 새참으로 가져온 밥에다 밭에서 막 딴 풋고추를 된장 찍어 먹으면서도 그 어린 내가 풋고추 맛을 어찌 안다고 매운 입을 호호 불어가며 찬물에 말은 밥이 그렇게도 꿀맛 같았던 그 날들, 그 날에 먹던 구수한 된장 맛, 해가 질 때까지 놀다가 짜투리 밭고랑에 심은 참외, 오이, 토마토를 따고 있는 할머니와 엄마를 보면 이제 하루 일은 끝나고 곧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됐다는 뜻으로 조금은 지루한 하루를 보낸 것도 금방 잊어버리고 당장 그 밭고랑 쪽으로 달려가 오이, 토마토를 만져가면서 ‘할머니! 이건 따도 되는 거야?’ 하고 물어보던 지금 옆에 앉아 있는 내 큰 아이보다 작았던 그 시절의 내 모습이 생생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마치 그 때로 돌아가 있는 것 같은 생생한 기분이었다.
구름 사이에 가려진 햇살이 얼굴을 드민 탓에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섬세한 둘째가 ‘엄마! 울어? 왕 할머니가 보고 싶어서 그래?’ 묻는다. 그렇게 묻는 아이가 하도 예뻐서 머리 한번 쓰다듬어 주면서 왕 할머니는 지금 우리들과 함께 여기에 나란히 앉아 계시는데 왜 보고 싶어서 울어, 그냥 눈에 먼지가 들어간 거야.‘하고 말한다.
솔직히, 나는 아이의 말대로 할머니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정말로 할머니가 그립고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나왔던 거였다.
’할머니, 외롭지 않으세요? 나는 할머니 닮았다고 그런 말 많이 하셨잖아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언제나 할머니 옆에서 잠자고 이른 아침 머리맡에 앉아서 자고 있는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셨잖아요. 그리고 나보고 언제나 참을성이 많다고 참을성이 많은 사람은 참 영리하다고 말씀하셨잖아요. 할머니! 혹시 지금 내 처지 때문에 속상하세요? 만일 그런 거라면 그러지 마요. 생전에 내 새끼들한테도 엄마를 닮아서 다들 그렇게 어쩌면 영리하고 착한지 모른다고 참 많이도 예뻐해 주셨잖아요. 그 착하고 영리한 애들이랑 함께 잘 지내고 있어요. 큰애는 가끔 집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고 왕 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말해요. 나도 그 말을 들으면 그냥 참고 있던 그리움이 한꺼번에 번져 나오는가 봐요. 그립고 돌아가셨다는 게 너무 안타깝고 생전에 잘 해드리지 못한 걸 후회해요. 그래봤자 소용없지만요. 할머니! 다음에 또 올게요. 잘 지내세요. 보고 싶어요.‘
나는 아이들한테도 이제 왕 할머니한테 각자 인사를 드리라고 했다.
’잘 지내세요. 또 올게요, 아프지 말고 지내세요.......‘
조금은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오면서 드물게 올라오는 고사리 순을 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고사리가 얼마나 오래전부터 살았던 식물인지를, 그런데도 멸종되지 않고 여전히 고사리는 피어난다고, 우리가 먹는 어떤 음식에는 고사리가 없으면 안 되는 음식이 있을 정도로 여전히 사람들에게 친숙한 식물이며 생명체라며 많은 대화를 나눴다. 이제 왕 할머니도 고사리같이 우리들 마음속에서 언제나 살아 계실 거라고도.
그러고 보면, 할머니는 내가 가진 실제의 모습보다도 나의 존재 가치를 높여주신 분이셨다는 생각이 든다. 한 여름 가장 뜨거운 날, 군소리 한마디 않고 고추를 따는 나를 보고도 어린애가 어쩌면 저렇게 참을성이 많은지를 칭찬했고 학교에서 돌아와 텃밭에서 뜯은 상추와 부추로 겉절이를 해도 손맛이 참 좋다고 못 하는 게 없다고 칭찬하셨다. 소풍 갔다 오던 날, 용돈이 조금이라도 생겼던 날, 나는 그 돈을 모아서 언제나 달고 사셨던 삼각형 모양의 핑크색 두통약을 사다드렸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 두통약을 보면 할머니 생각이 난다. 문득, 이런 어린 날들을 떠올리다보면 현재의 내 자신을 많이 반성하게 된다. 강하지만 한 번씩은 하염없이 나약하고 거칠고 예민해진 나의 모습을.
엄마와 아버지를 뵙고, 가족들을 만나고 다시 내 본연의 생활 터로 돌아오면서 나는 다시 다짐하게 된다. 나의 사람들을 사랑하니까, 무엇보다 내 아이들을 사랑하니까, 그리고 내 자신을 조금 더 사랑하고 싶으니까 나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단정한 것을 언제나 몸에 익히고 분별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이제는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우리를 비춘다. 정말로 신기한 일이지만 그 날, 할머니의 묘소에 잔디를 심는 것까지 끝나자마자 비가 그치고 밝은 햇살이 내려와 물방울로 덮인 온 세상을 비춰주어 반짝반짝 빛나게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