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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3편. 힘이 센 땅

슬픔도, 미움도 가버리면 왜 그랬는지 모를때가 있다.

by 김현이

“땅이 말라붙었어. 비가 왔어도 몇 번은 왔어야 하는데......”


아버지는 물이 지나가는 호스가 파묻힌 땅을 직선대로 곡괭이질을 하며 혼잣말을 하신다.


엄마는 작은 손가방에 참외 둘, 물 두병, 애들이 먹을 만해 보이는 귀퉁이를 조금 맛 본 크림빵을 담고 계셨다. 그리고 주머니가 빨간 칼을 마당 끝 지하수를 파서 만든 수도꼭지를 비틀어 모터의 반동에 따라 펌프 식으로 짧은 고무호수를 타고 콸콸 넘치는 물에 칼을 헹궜다. 아버지는 연장통을 1톤 트럭 적재함에다 옮기고 계셨는데 원투쓰리는 외할아버지가 만든 야외 흔들의자에 나란히 앉아서 하드를 빨고 있었다. 그것 말고도 지난 3주 기간 동안, 집에 마지막으로 다녀간 것이 3주 전이므로, 광한루 춘향이가 타던 그네와 아주 흡사한 모양의 그네를 만든 모양이었다. 도움이 없이도 막내가 혼자 앉아서 다리를 굴러 그네를 탈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한 사이즈였지만 어른이 타고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아주 견고하게 균형이 잘 잡힌 그네였다. 아버지는 언제나 솜씨가 좋았다. 손으로 만드는 것이라면 못 만들어내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나 어릴 때는 온 동네 사람들 도장까지 파출 정도였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자기 목도장을 가지고와 뒷면에다 안식구 이름까지 파 달라고 하던 사람들까지 있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낮에 그렇게 고된 일, 그때도 석재광산에서 돌 캐는 일을 하고 계셨으므로, 하시고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가족들이 모두 잠든 어둠속에서 백열등 스탠드 하나 밝혀놓고 그 도장에 이름들을 새겼다. 아버지가 갖고 있는 도장 파는 칼은 정말로 종류가 많았다. 아마도 아버지가 새긴 이름들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을 것이리라. 나는 엄마 옆에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잠을 자면서도 스탠드 아래 수고비 한 푼도 받지 않고 딴 집 사람 이름을 새기고 있는 아빠가 안타깝기도 하면서 아빠의 밤 휴식을 빼앗아 가버린 도장을 부탁하고 간 이웃 집 사람들을 원망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툭하면 정전이 돼서 불이 안 켜지는 집을 가서 두꺼비집을 열어 보고 어디가 고장이 났는지 알아봐주고 고쳐주는 일까지 해 주셨다. 나는 엄마가 막 저녁상을 내와 하필 아버지가 첫 술을 드셨을 때 우리 집에 전기가 나갔다고 지금 좀 가보자고 말하던 아저씨나 아줌마가 가장 미웠다. 그 어린 나이에도 전기 작업은 전문 기술자들이나 하는 일이며 자칫하면 감전으로 크게 다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무슨 부탁보다 전기를 좀 봐달라고 말하는 동네 사람들이 가장 미울 수밖에 없었다. 아빠가 다치면 엄마가 두 배, 세배 이상으로 일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슬픔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꼬마들은 트럭의 안쪽 의자가 남았는데도 기어코 트럭 적재함에 올라타서는 각자의 자리를 잡고 앉아서 외할아버지가 트럭에 시동을 걸고 출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적재함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올라타서 각자 가장 안전하게 붙들 수 있는 지지대를 잡도록 일어둔 후 덜커덩 농로 길을 타고 갔다. 지금 우리들이 가고 있는 그곳은 어느 해에는 흰 쌀이 나왔고 어느 해는 달콤한 당근이 나왔고 또 맴맴 고추가 나오기도 했고 뭐 하나 버릴 것이 없는 마늘이 나오기도 했다. 내가 내 큰 아이 나이보다도 더 어린 시절부터 생각해 보자면 그 땅에서 나온 것을 일일이 다 열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단지, 나는 그 땅에서 무엇이 나오든지 간에 꼭 그 땅에서 그 생산물을 손으로 만져보았다는 것, 함께 새참을 먹으면서 일을 해 보았다는 것, 8월의 뜨거운 볕 아래에서 온 종일 고추를 몇 포대씩이나 따 본 적이 있었다는 것, 그 땅에서 나온 쌀이 내 대학 한 학기 등록금이던 적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월경을 막 시작했을 무렵 생리통으로 배가 몹시 아팠는데도 온 가족들이 모여 타작을 하는 것이 미안해서 한꺼번에 진통제를 몇 알을 먹으면서 볏단을 나르던 것을 돕던 날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 시절부터 나는 땅은 참 힘이 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모두를 모으고 움직이게 할 정도로 큰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땅에 묻힌 호스에서 물이 줄줄 샌다면서 마른 땅을 파내기 시작했다. 엄마는 부쩍 통증이 심해진 어깨통으로 거들지 못하는 미안함에 저렇게 물이 잘 올라오는데 어디가 새느냐고 괜히 핀잔을 주었다. 꼬마들은 논두렁 밭두렁을 거닐면서 풀벌레를 잡고 개구리를 잡고 흑개미를 곤경에 빠뜨렸고 급기야 손바닥 만 한 도마뱀까지 잡고서는 난리법석을 떨었다. 나는 아버지가 쉬면 그 곡괭이를 들고 파던 자리를 이어서 땅을 파냈다. 내 머리만한 돌덩이가 나오고 주먹크기 자갈도 수북이 나왔다. 길옆이다 보니 돌밭이라고 투덜거리셨다.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아직 모내기를 하지 않은 물댄 논에 반사된 햇볕이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에 눈이 부셔 멀리까지 보이지도 않은 강한 날이었다. 어느새 콧등에 땀방울이 맺혔다. 3미터가까이 땅을 파 나가자 정말로 말라있는 땅에 축축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 말대로 중간에서 물이 새 땅속으로 흘러나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호스 끝으로 올라오는 물의 양을 보고 양수기 모터의 압력을 감안해 보았을 때의 끌어올려지는 물의 양을 육안으로도 거의 정확하게 가늠하고 계셨던 것이다. 어느새 흰 머리카락이 절반이 넘을 정도로 예순 절반이 넘은 나이가 되었음에도 그 총기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구나 싶었고 어쩌면 그동안의 경험이 아버지를 더 지혜롭고 총명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지름 10센티미터 정도 두께의 딱딱한 플라스틱 재질의 호스의 두꺼운 금이 간 곳을 방수테이프로 때우자 새던 물줄기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호스의 길대로 잘 흘러가는 것 같았다. 이제 파낸 호스를 다시 묻어야 한다. 흙을 다시 덮는 일은 적어도 다섯 배는 쉬운 일이었다. 왜인지 그것은 오랜기간 다툼을 끝으로 마침내 화해를 결심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 그 이상의 과정과 의미와 비교해도 될 것 같았다. 장시간의 미움과 원망에서 오는 슬픔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왜 슬퍼했었는지 조차도 불분명해질 만큼 감정을 자극할만한 힘을 잃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는 동안 꼬마들은 할머니가 챙겨간 얼음물로 목도 축이면서 모자도 안 쓰고 들을 뛰놀던 아이들의 얼굴은 금방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땀을 흘려 머리카락이 반쯤 젖어 있었고 숨이 차는지 헐떡이고 있는 붉게 부어오른 얼굴이 어찌나 건강하고 귀엽던지 문득 동네를 막 들어설 때 막내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엄마. 엄마가 살던 동네는 정말 예쁜 마을이야. 꽃도 나무도 집도 참 예쁘다.”


내 고향을 그렇게 칭찬하는 내 꼬마가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그 순간의 그 말이 아마도 평생 잊히지 않을 것 같았고 그 말을 하던 그 꼬마는 지금 개구리를 잡고 도마뱀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면서도 소리를 지르면서 도마뱀이 사라진 풀 섶을 헤치면서 볕에 그을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하도 예뻐서 볼에 뽀뽀를 하고야 말았다.


챙겨간 준비물과 연장으로 예정했던 일을 마치고 우리들은 타고 갔던 트럭에 올라타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맞는 바람이 한결 더 부드럽고 시원하게 느껴진 것은 땅에서 흙을 만지고 볕에 달아오른 풀들을 헤치고 미지근하게 데워진 논물에 손을 담가보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작년까지 흰쌀이 나던 그 땅에서 이번 해는 맴맴 고추가 나올 것이다. 고추는 쌀보다 사람 손을 많이 탄다. 자칫 병에 걸리기도 쉽고 자주자주 눈 맞춤도 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사람을 더 성가시고 고단하게 만든다. 쌀보다 훨씬 일거리가 많다. 하지만 고추는 쌀보다 힘이 세다. 그 땅에서 고추 몇 포대가 나올지는 따져볼 수는 있겠지만 쌀보다 더 많은 돈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어지간한 농사꾼이라면 당연히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번 해는 쌀을 쉬고 힘 센 고추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저녁이 되자 곡괭이질 몇 번으로 팔에 근육통이 올라왔다. 팔꿈치를 굽힐 때, 어깨를 움직일 때, 만세를 부르는 모양으로 팔을 올릴 때 느껴지는 근육의 당겨짐, 당겨질 때 느껴지는 긴장된 간지러움을 동반한 통증이 왠지 나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정우야! 엄마 어깨 좀 주물러 줘 봐라.”

“이 녀석아 해주려면 제대로 해봐. 이건 주무르는 게 아니라 그냥 만지는 거나 똑같잖아.”

“아니 됐다. 너는 그냥 놀아.”


아버지의 생신을 핑계로, 어버이날 찾아뵙지 못한 미안함을 핑계로 매년 항상 이맘때면 나는 내 고향집에 온다.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의 생신이라는 것이고 마침 그 다음날은 석가탄신일로 공휴일이기에 언제나 어김없이 올 수 있다. 작년엔 집에 모이지 않고 가족들이 다 같이 바닷가에 갔었다. 올 해는 고등학생이 된 조카들이 시험이다, 학원이다 해서 아예 어른들만 모였기 때문에 여행은 계획하지 않았었다. 꼬마들에게 외갓집은 언제나 신나는 곳이다. 집 앞 도랑에서 손으로 둔한 버들치를 건져 올렸다. 엄마도 어릴 때 두 손을 모아 물고기를 잡았었다고 심지어 새우까지 잡았었다고 말하면 꼬마들은 제 엄마를 대단한 사람처럼 믿어지지 않는다는 식의 감탄사를 보내기도 하지만 나는 정말로 그 어린 시절 지금 내 꼬마들이 버들치를 잡은 똑같은 개울에서 멱도 감고 민물새우도 잡아냈었다. 지금이야 새우도 사라지도 미꾸라지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지금쯤이면 소금쟁이가 물위에서 스케이트 타 듯 미끄러지는 모습, 물방개 잠수하면서 물벌레 사냥하는 모습, 몸짓이 재빠른 물잠자리 나는 장면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곧 잠자리 떼 날아들면 아버지는 우리 꼬마들 몫으로 직접 만드신 잠자리채를 준비해 놓을 것이다. 겨울이 오기 전 스케이트를 손수 만들어 놓고 기다리시던 것과 똑같은 마음으로. 그 옛날 아버지는 나를 위해 잠자리채와 스케이트를 만들어 주시지 않았지만, 만들지 못한 이유를 나는 알고 있어서 그런지 서운하기보다는 왠지 가슴이 아려오는 것을 느끼는 것은 왜 그렇게 살기가 어려웠는지 아마 그런 막연한 서글픔 같은 마음 때문이리라.


시간이 지나고 보니, 아버지에게는 그네와 흔들의자, 잠자리채, 스케이트를 만들어 놓을 만큼의 시간과 여유와 마음이 생긴 것이리라. 사춘기가 된 큰 아이와의 잦은 다툼, 거의 일방적인 훈계로 이어지지만 그래도 여전히 답답한 아이와의 신경전, 그 사이에서 불안해하는 더 어린 아이들, 어쩌면 아버지의 말대로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해결이 될 일일지도 모른다. 조급함이 나를 답답하게 짓누르는 것인지도 모르리라.


이 글을 끝내려니 문득 헤세의 처녀작인 [피터 카멘친트] 중의 대사가 생각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지 아니면 비참하게 하는지 물어도 될까요? 아니면 그 둘 다입니까?’


’아, 사랑이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우리가 고통과 인내 속에서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있는 것 같아요.‘


프로이드는 올바른 어머니가 오히려 아들에게는 더 나쁠 수 있다는 말을 한다. 바르고 정직하고 모범적이고 헌신적인 어머니, 꼭 같지는 않지만 내가 그렇게 되려고 하는 어머니의 이상과 같은 어머니에게 아이들은 어머니의 잘못됨을 알더라도 그 바른 겉모습때문에 쉽게 반항하지 못한다는 취약점이 있다는 것이다. 피터 카멘친트가 연인 에르미니아 알리에티에게서 사랑에 대한 철학을 듣고 가벼운 탄식을 내 뱉었던 것과 같이 나 또한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잠시 자책에 빠지기도 했었다. 또한 내가 추구하는 어머니의 이상향이 틀렸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아버지처럼 그냥 시간이 가는대로 기다리고 바라보고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현명한 지혜일지도 모르리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언제나 북쪽으로 가는 자동차들로 길이 막혔다. 꼬마들은 고개를 제멋대로 떨구고 잠들어 있었다. 많은 생각과 감정이 교차하면서 새로운 다짐도 해 보았다. 아주 멀리 서쪽의 능선을 따라서 해가 산봉우리를 크게 할퀴고 산 아래로 도망 가버리고 나자 그 상처에서는 산꼭대기부터 계곡으로, 나무들 사이사이로, 그리고 바위 틈에까지 굴곡진 골짜기로 뜨겁고 검붉은 피를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에서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냥 눈이 시려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2019. 5. 14. (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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