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언제나 같은 시각 5분을 앞뒤로 하고 막내를 데리러 유치원으로 간다. 아이는 그 때가 언제인지를 알고 있다는 듯, 꼭 비슷한 자리에서 기다렸다가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면서 엄마 품으로 달려든다.
“엄마! 오늘은 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 놀이터에서 딱 다섯 번만 놀다 가면 안 되나요?”
작고 동그란 손가락을 쫙 펴 보이며 엄마에게 조른다. 배웅하는 선생님은 오전에도 이미 세 번이나 나가서 놀지 않았느냐며 동그란 유치원 책가방을 아이의 동그란 양쪽 어깨에 걸어주신다. 아이는 계속 엄마의 팔을 잡고 동그라미보다 더 동그란 얼굴로 엄마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애원한다.
“엄마! 그러면 딱 두 번만 놀아도 되죠?”
엄마는 아이가 미로모양의 미끄럼틀을 두 바퀴 도는 동안 가방을 한쪽 팔에 걸고 건물 귀퉁이 동쪽으로 드리워진 그늘로 들어가 서서 아이의 모습을 본다. 아이는 엄마의 시선을 놓치지 않고 정확히 두 바퀴 미로미끄럼틀에서 돌아온다.
그렇게 신나게 놀 던 아이는 자동차를 타더니 평소처럼 창문을 내려달라고 성화도 대지 않고 왠지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 앉아있다.
“엄마! 오늘 달래반 누나가 나보고 쇠똥구리라고 놀렸어요.”
달래반이라면 아이의 유치원에서 7살 아이들이 다니는 교실이었다.
“그래? 쇠똥구리?”
“그래서 속상했어요. 나도 그래서 꿀벌이라고 놀려줬어요. 그 누나는 꼭 꿀벌처럼 줄무늬 양말을 신고 왔거든요.”
나는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지면서 웃음이 나왔지만 아이의 표정 때문에 웃지 않고 이야기 했다.
“쇠똥구리! 너무 귀엽다! 그런데 단우야! 쇠똥구리라는 별명이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사실은 그 누나도 친구들도 잘 모르는 사실이기는 한데 쇠똥구리만큼 훌륭한 곤충도 없어. 생김새도 우리 단우처럼 동글동글해서 귀엽기도 하지만 단단한 몸 껍질은 또 얼마나 튼튼한지 몰라. 그리고 있지. 힘은 또 얼마나 센줄 아니? 자기 몸집 보다 몇 배는 더 크고 무거운 쇠똥을 굴릴 줄도 알고 등에 지고 걸을 수도 있어. 그런데 정말로 신기한 건 뭔 줄 알아? 그 누구도 쇠똥구리처럼 쇠똥을 그렇게 단단하고 동그랗게 빚을 줄 아는 곤충이 없다는 사실이야. 정말로 신통하지? 그러니까 쇠똥구리는 훌륭한 곤충이고 쇠똥구리라는 별명이 우리 단우한테도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엄마는 단우를 쇠똥구리라고 불러준 달래반 누나한테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 걸?”
엄마의 말을 차분히 듣고 있던 아이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갑자기 고양이도 참 훌륭한 동물이라고 말했다. 나쁜 병균을 퍼트리는 쥐를 잡아주고 깜깜한 밤에는 눈에 불까지 켤 줄 아니 얼마나 훌륭하냐며 엄마 말 흉내를 내면서 논리를 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급기야 한 달 전에 만난 이모의 말까지 떠올랐던지 뱀도 아주 훌륭한 동물이라고 칭찬했다. 이모네 아파트 근처에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개구리들을 뱀들이 무찌르니 이모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냐는 거다. 사실 아이가 이런 말까지 하는 건 특별히 이모를 좋아하는 데서 온 이유도 있다. 두 형들이 이 다음에 커서 엄마와 결혼한다고 말한다면 언제나 자기는 이모와 결혼할 거라고 말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날 밤 언니에게 아이와의 대화를 이야기 하는데 언니는 단우 앞에서는 말도 조심해서 해야겠다면서 웃던 게 기억난다.
그리고 엄마도 단우에게 붙여진 쇠똥구리가 정말로 잘 붙은 별명이라고 생각했다. 쇠똥구리처럼 내 아이도 훌륭한 아이라고 여겼다.
두 번째 대화. 콩쥐와 신데렐라
“엄마! 엄마는 콩쥐와 신데렐라 중에서 누가 더 힘들었을거라고 생각해?”
“음, 글쎄. 콩쥐가 더 힘들지 않았을까?”
“아니야, 콩쥐는 깨진 항아리에 물을 채울 때 두꺼비가 도와주었고, 넓은 밭을 갈 때는 황소들이 도와주었잖아. 그런데 신데렐라는 계모와 언니들이 심부름을 많이 시켰어도 도와주는 친구들이 없었어. 설거지도 혼자서 다하고 집안 청소도 혼자서 다 해야 했으니 신데렐라가 콩쥐보다 더 힘들었을 거야.”
아이의 결론은 상당히 논리적이고 명료했다. 그런데 다음 질문에서는 처음보다 더 대답하기가 곤란했다.
“엄마! 그러면 콩쥐와 신데렐라 중에 누가 더 외로웠을까?”
“음. 글쎄. 잘 모르겠는데? 단우는 누가 더 외롭다고 생각해?”
“그건, 아마도 콩쥐일거야. 왜냐하면 콩쥐는 외롭고 엄마가 보고 싶어서 하늘나라로 갔잖아. 신데렐라는 왕자님과 결혼해서 살았으니까 행복하다고 말했거든.”
“그러면 단우야! 콩쥐는 엄마가 보고 싶어서 하늘나라로 간 걸까?”
“음. 콩쥐는 팥쥐와 새엄마한테 괴롭힘을 당했지만 동물친구들 때문에 외롭지 않았었는데 나중에 팥쥐가 콩쥐를 죽였어, 그래서 하늘나라로 간 거야.”
아이는 그렇게 말하고 좀 시무룩해지는가 싶더니 다시 물어본다.
“엄마! 그런데 외로운 게 뭐야? 콩쥐에게는 동물친구들이 많았잖아.”
“맞아. 콩쥐는 친구들이 많았는데도 외로웠는가봐. 엄마가 보고 싶었을 거야. 그래서 친구들이 늘 곁에 있었어도 외로웠는가봐.”
동그랗고 동그란 아이의 생김생김에서 어른이 닿을 수 없는 생각의 규모보다 더 깊고 예리한 생각들이 쏟아져 나왔고 각지고 모난 어른인 엄마인 나는 철학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보다도 더 철학자 같은 아이에게 아무 대답도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했다.
내가 이제까지 살면서 정말로 외로웠던 날이 있었을까. 젊은 연인들, 그리고 혼자인 사람들은 외로워서 사람을 만난다고 한다. 친구도 사귀고 사람들을 만나서 관계를 만들고 시간을 공유한다. 그런데 나는 40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정말로 외롭다고 느낀 적이 있었던 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저기요. 사실은 오늘이 내 마흔 한 번째 생일이에요. 그런데 며칠 전부터 고민 한 가지가 있었어요. 거의 1년 정도 써 온 글을 또 한데 모아서 매년 이렇게 생일을 기념해서 책으로 낼까, 앞으로 1년에 한 번씩 이렇게 하면서 1년씩 내 삶을 쌓아나갈까 하고요. 솔직히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엄청나게 큰 대접을 받고 커다란 선물로 축하를 받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도 생일날이 외롭고 쓸쓸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어요. 솔직히 의미 있게 생각하자면 자신의 생일날만큼 중요한 날도 없을 것 같지만 제게는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무슨 경우든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말하는 가 봐요. 지난번에 엄마를 봤을 때 엄마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어요. ’너는 괜찮아? 아직 젊고 예쁜데.‘ 물론 나는 그 자리에서 반박도 긍정도 하지 않았죠. 아니 못했어요. 엄마의 마음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요. 엄마 말대로 외로움을 느껴서 누군가를 만난다고 해봐요. 그런데 있잖아요. 홀로서기를 하지 못한 사람은 어떤 누구를 만난대도 그 외로움을 채우지 못해요. 아마 간섭이라고 성가시게 느끼면서 또 싸우고 헤어지게 될 테죠. 아마 특별히 노력한 건 없었는데 나는 홀로서는 것을 엄마의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부터 스스로 알고 있었는가 봐요. 마치 숨을 쉬 듯 본능과도 같이요. 나는 외롭지 않아요. 콩쥐는 사실 외로워서 엄마를 찾아간 게 아니지만 엄마 품이 그리워도 이제는 그 마음을 마음껏 표출하지 못한다는 걸 알기에 그저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조금씩 나이를 먹어 가며서 엄마 품으로부터 멀어지는 거, 그립지만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하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 홀로서기 하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런걸 보면 그런 면에서는 나는 제법 잘 자란 사람이구나 생각도 들어요.’
“아이들아! 엄마는 외롭지 않단다. 며칠 전부터 엄마의 생일을 기대하는 너희들, 어떻게 편지를 쓸까, 백 원, 이백 원 심부름으로 모은 용돈을 셋이 모두 합쳐 그 돈으로 무엇을 살 수 있을지 장난감방 구석에서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는 너희들을 보았으니까. 미안하고 고맙고 그래서 눈물이 핑 돌았단다. 엄마는 결코 외로운 사람이 아니란다. 가끔 엄마의 모습이 힘들어 보인다면 지금처럼 어깨 토닥토닥 안마해 주고 손을 잡아주면 충분하단다. 고마워. 이 말이 부족해 보이지만 고맙다는 말밖에는 그리고 이 순간 특별히 그 말보다 들어맞는 말도 없구나. 사랑한단다. 그리고 고맙구나! 내 아가들아!”
나는 오늘도 생각한다. 비록 내 삶이 초라하고 보잘 것 없이 잊히게 된다 하더라도 내 아이들과 똑같은 시간동안 공유하는 생활들을 기록해 놓아 오래토록 기억에 남겨두겠노라고. 한 인간으로서의 삶이 다른 누군가가 바라보기에 조금은 쓸쓸하고 외롭고 힘들어 보일지라도 엄마로서, 또 한 여성으로서 절대로 그들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는 자력으로 너희를 끌어당기면서 지탱할 것을 다짐한다. 아이들이 둘러싸고 있는 이 시간들은 순식간에 공기 중에 번져나가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될지라도 그 순간의 숨결과 마음과 감정만큼은 영원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의 영혼은 전체의 생활을 두고 보았을 때 지극히 적은 부분일지는 모르지만 가장 설명할 수 없는 요체이며 설명이 불가능한 신비로운 부분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가는데 있어서 모든 것들을 정상으로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그 부분, 정신의 영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