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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가정-아들셋]
제9편. 8살 나에게 쓰는 편지

30년 전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

by 김현이


2016. 6. 5. 일요일. 서른 여덟개의 촛불


" 얘들아 모여봐~ 아빠 쳐다봐야지"


아이들 사진 찍을 때마다 세 아이들의 시선을 한데 집중시키려고 내가 하는 말이다. 그러면 각자의 개성대로 어색한 포즈와 표정을 짓지만 그 중에 유난히 꽃받침을 잘하는 아이가 바로 둘째아이 선우이다. 손바닥 컵속에 담은 두뺨을 흘리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양손으로 감싸쥔 볼이 귀여워서 계속 셔터를 눌러 사진을 찍어주고 싶은 아이다.

지난 일요일이 나의 서른 여덟번 째 생일이었다. 남편은 나와 아이들에게 기념이 될 만한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던 건지 때마침 뒤따라온 현충일 연휴에 맞추어 1박 2일 단촐한 여행을 다녀오자고 말을 해왔었다. 미리 준비를 했더라면 더 훌륭한 숙소를 예약할 수 있었겠지만 이미 황금연휴가 예고되어 있던 터라 전화를 걸어본 모든 곳이 우리가 떠나려는 날에는 예약이 완료된 상태였고 당일이 되기 이틀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방 한개를 잡을 수 있었는데 하루 묵을 수 있는 곳을 정했다는 만족감으로 갔던 그곳은 우리 가족 - 어느 곳에서든 우선 뜀박질부터 하고 방을 운동장 쯤으로 여기는 에너지 넘치는 남자이이 셋-에게 최적화된 숙소였고 방 양쪽으로 나 있던 큰 창문을 열어놓고 산속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시원하게 마음껏 맞을 수 있던 곳이였다. 우리 다섯 식구들은 이불을 아주 널찍하게 펴 놓고 가운데 엄마인 나와 둘째 선우를 중심으로 양쪽에 나란히 나란히 발은 발끼리 얼굴을 얼굴끼리 서로 마주대하고 편안한 하룻 밤을 보낼 수가 있었다.


가끔 남편이 어렸을 적 이야기를 하는걸 듣고 있자면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살았던 사람처럼 느껴져 서툰 감정이 생길때가 있다. 남편은 유난한 어려움없이 유년기를 보냈던 걸로 짐작이 되지만 나는 지금 50이 넘어선 선배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서로 공감이 되고 충분한 풍경이 상상되는 걸 보면 산골마을에서의 나의 어린시절은 지금의 내 또래의 아이들이 자랐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30년 전, 큰 아이와 내 나이가 같은 지금의 그때-, 나는 내 생일케이크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비단 내 생일뿐만이 아니라 나의 가족-할머니, 할아버지, 아빠, 엄마, 삼촌, 오빠, 언니 그리고 나 이렇게 여덟 식구-의 누구의 생일이 되더라도 케이크에 촛불을 켜 놓고 "생일축하합니다" 노래를 불러본 적이 없었다. 그냥 생일미역국을 끓여주시고 넓은 양은쟁반을 얹어 놓고 직접 쪄 주시던 솥뚜껑만한 술빵을 내 친구들한테 나누어 주었던 것이 전부였고, 한 두어번쯤 나름대로 멋을 알던 아빠는 읍내에서 과자 한박스를 사다가 내 친구들 전부 불러다 놓고 내어 주며 내 기를 살려 주시기도 했었다.


엄마가 나를 낳으신때가 25살의 나이로 시골에서는 한창 모내기로 바쁜 5월 1일이였고, 그래서 산후 조리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고 하신다. 옛날에는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37일을 문밖에 나가지 말라고 했고 대문에는 빨간 고추를 중간중간에 꽂은 새끼로 꼰 금줄을 걸어놓고는 가족이외의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엄마말은 나를 낳으시고 일주일만에 논에 모심는 사람들한테 밥을 지어 새참을 날라다 주고 다시 나한테 젖을 물리시고 하셨다는데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다섯살이 될때까지 지금의 막내 단우처럼 엄마 젖을 빨고 잠을 잤다고 하셨다. 그런데 내가 아이를 셋을 낳아 젖을 먹여서 키워보니 그 말이 꼭 거짓말은 아니겠단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하루종일 엄마품에서 떨어져 지내던 아이가 엄마품에 안기면 혀짧은 말로 "엄마 쮸쮸"하고 젖무덤에 동그라미보다 더 동그란 얼굴부터 파묻고는 어린냥을 하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온종일 엄마를 얼마나 그리워 했을지 아이의 마음이 느껴지고 엄마는 안타까운 미안함때문에 차마 그런 아이를 떼놓지 못하는 것이며 그런날이 하루이틀 반복되며 아이가 점점 커가 이제 젖을 뗄 나이가 지나가는 줄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 두고 싶은 마음이 들기에 단 한번의 강한 마음을 먹지 못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뭐야~ 이제 그만먹여!" 이렇게 쉽게 할 수 있는 말에 엄마는 '이제는 떼어야지' 하고 젖은 레이스 천 조각처럼 손 쓸 방도없이 흔들리던 마음도 풀먹인 모시옷감처럼 다시 곧아지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릴적에 엄마가 쪄주시던 그 술빵이 좋았다. 맨들맨들한 껍질부터 벗겨먹던 그 꼬마의 모습이 그리워져 가끔씩 길가에서 파는 옥수수 술빵을 사서 한입 떼어 먹어보면 그때 맛과 다르단 걸 미리 알았으면서도 집앞 삽짝거리에서 이웃집 친구와 나누어 먹던 그 모습이 자꾸만 아련해지는건 다시는 되돌아가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남기에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지는게 아닐까싶다. 집앞에서 몇걸음 나가면 얕고 넓다른 내가 흐른다. 그 아랫땀 큰 할아버지네 막내 손녀 꼬마는 그 냇가에서 소꼽장난을 하느라 반나절을 도둑맞기 일쑤였다. 같이 놀던 친구는 아빠하고 나는 엄마하고 부드러운 돌도 빻아 밥도 짓고 찱흙도 파서 접시도 만들고 거기에 송편 떡도 빚어 담았다. 아빠를 하던 친구는 지금 생각해보면 다섯손가락이 전부다 엄지손가락인가 싶었다. 어쩌면 발로 주물거려도 그보다는 잘 만들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도무지 반달의 모양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흙덩어리에 불과했는데도 우리는 그게 송편이라면서 냠냠냠 먹는 시늉까지 하면서 참 잘 놀았었다. 봄에는 빈 밭가에서 쑥을 뜯어다 엄마 저녁 밥상 쑥국 끓이라고 가져다 주고 여름에는 팬티만 입고 멱감으며 더위를 식히고 가을에는 잡은 잠자리 날개 잘라서 암탉에게 가져다 주고 겨울되면 큰 오빠는 밧줄로 꽁꽁 묶은 비료푸대 자루에 볏단 넣어 푹신한 썰매 만들어 막내 동생 꼬마 태어주며 그렇게 계절을 온몸으로 맞으며 한살한살을 완성해 갔다. 어쩌면 일생에 가장 순수했었던 다시 그런 시간 만들 수 없다는 걸 추억으로 잘 알고 있기에 지난 시절이 더 없이 아련하고 소중하게 여겨지는게 아닐까.


우리집 앞문 기둥옆에는 누렁이 덕구라는 개집이 있었다. 덕구는 멀리 할아버지 발소리만 들어도 우리집 식구인지 다른집 사람인지 알아차리고 꼬리를 흔들거나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대거나 할 수 있었고 마당에서 우리집 닭들과 한데 뒤얽혀 모이를 쪼아 먹던 다른 집 닭을 골라서 몰아낼 수도 있었던 똑똑한 개였다. 심지어 개의 영특함을 시험해보려고 일부러 싸우는 척을 하면 다른 사람한테 죽자살자 달려들려고 묶인 목줄이 팽팽하게 당겨질때까지 뛰어와 뒷다리로만 서서는 사나운 얼굴을 하기도 하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아빠가 없을때 나를 지켜줄 수 있는 키 큰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었다. 한번은 한참 아랫쪽 집에 살고 있던 언니가 우리집앞을 지나면서 덕구한테 돌을 던졌는데 들마루에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내가 화가나서 덕구한테 그러지 말라고 대들자 나보다 6살이나 많던 그 언니는 큰 소리로 나를 나무랬는데 개집에서 앉아있던 덕구는 쏜살같이 튀어나와 그 언니의 맨 종아리 하얀 살속에 이빨을 박고 말았다. 순식간이라서 나도 말릴 틈이 없었고 설령 그럴만한 상황이 되었더라도 나는 팔짱끼고 모르는 척 했을 것이다. 덕구는 그 언니 종아리에 선명하게 붉은 이빨자국을 냈고 순식간에 유난히 깊게 박힌 송곳니 자리에서는 금새 두개의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날밤에 엄마는 장독대에서 한 밥그릇 된장을 퍼다가 그 언니네 집에 가져다 주었고 그날 이후로 그 온순하던 덕구는 성질 사나운 개로 평이 나서 우리집 앞을 지나던 꼬마들은 아예 다른 길로 멀리 돌아가거나 나보고 개를 붙들고 있어달란 부탁을 하기도 했었다. 가난하던 우리집에 강아지 새끼 많아 낳아줘서 우리 엄마 살림살이 보태주었던 덕구, 여덟식구가 남긴 잔반만 줘도 내가 마음속으로 셀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꼬리를 흔들며 맛나게 먹어주던 우리 덕구가 우리집을 떠나가던 날 엄마가 부엌 아궁이 앞에서 눈물을 훔치던 모습을 보고 그 모습 나에게 들키지 않게 해 드리려고 나는 나무로 되어 있던 부엌 문옆에 몸을 숨기고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고 서서 있었다.


나는 참았다. 입술을 깨물고 참았다. 우는걸 들키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얼마나 참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내 눈썹 아래 있는 두 개의 우물은 계속 솟아나는 샘물을 더 이상 가둬두지 못하고 미세한 속눈썹의 떨림에도 그 진동을 이겨내지 못했고 양쪽에 파인 좁은 모서리로 그 짠물을 줄줄줄 흘려내 버릴 수 밖에 없었다. 보가 무너지듯 한번 넘쳐버린 샘물은 마치 양수발전기를 돌려 물을 퍼 올리 듯 더 굵어진 물줄기를 점점 더 빠르게 내 뿜어내고 있었고 꼬마는 쭉 나온 입으로 그 짠물을 맛보면서 훌쩍거렸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떠난 덕구와의 이별, 그 어릴적에 이별이라는 걸 나는 알았을까? 지금은 짐작도 할 수 없지만 아마도 그 꼬마는 덕구와의 이별을 엄마의 우는 모습에서 보았고 그래서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한테 혼이나지 않아도 넘어져 피가 나지 않더라도 그렇게 저절로 눈물이 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강한 아이였고 조숙한 아이였다. 그 상황에서도 스스로 지나친 감정에 빠져들지 않도록 마치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인 것처럼 울지 않으려고 얼마나 한참을 저항했는지 심장이 딱딱하게 굳어져 가슴에 통증이 느껴질 정도 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끝내 나는 울고 말았다. 잠들기 전까지 들키지 않으려고 이불속에서 눈이 퉁퉁부을때까지 울었다. 눈물샘이란 표현이 지극히 상투적이지만 그 쓰임이 돌고돌아 변함없이 쓰이는건 여태까지 그만한 표현도 없어서란 생각이 들었다. 땅속의 샘물이 어지간한 가뭄에도 끄떡없 듯 꼬마의 눈물샘은 그칠줄도 모르고 계속 솟아났기 때문이다.


지금도 시골집에 내려가면 우리집 마당까지 발을 뻗은 옆 동산에 오를 때가 있다. 벌써 몇 십년이나 지나버렸지만 그곳에는 마치 시간이 멈춰져 버린 공간처럼 어김없이 나무들도 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서 있으며, 주저 앉아 있는 커다란 바위들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는지 모양하나 흐트러짐이 없다. 벌집을 키우던 늘씬한 키를 자랑하던 나무는 지금도 자신의 무릅에 기꺼이 벌집 자리를 내어주고, 내가 예쁜 리본을 묶어주며 소원을 빌던 뚱뚱한 떡갈나무도 여전히 뚱뚱한 그 모습 채로 철마다 많은 도토리로 우리 엄마 맛있는 묵을 만들어 자식들 먹여주도록 도와주고 있다. 나는 왜 어릴적에 동산에 올라와서 이 뚱뚱한 떡갈나무한테 소원을 빌었을까. 자연을 대하는 자세는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언제나 겸손한 마음부터 그 관계를 시작한다. 최고 5천년이상을 살 수 있다는 은행나무를 대할 때 우리는 말못하는 한낮 미물이라 업신여기기 보다는 그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인간의 하찮음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하고 심지어 상대방에게 압도되어 존경심까지 생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무는 중력을 거슬러 하늘을 향해 자란다. 어지간한 나무들은 직선본능을 가졌고 어떻게하면 더 가까운데서 뜨거운 볕을 쐴까하는 마음으로 서로 머리를 앞다투어 가며 뻗어나간다. 산속에 사는 나무들도 직선으로 곧게 자라기는 매 마찬가지지만 자기에게 자리를 내어준 땅과는 절대로 직각으로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지 않으며 오히려 그 모양은 유연하게 느껴질 몸을 땅에 맞춰가며 자라난다. 생존을 위해 경쟁만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자칫 이기적으로 보일 수 도 있지만 나무는 결코 자신을 위한 그늘을 만들지 않으며 오히려 자리를 내어준 땅에게 공손하게 보일 정도로 몸을 맞춰준다. 유년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읽고서 나무가 소년에게 아니 소년이 노인이 될때까지 무조건 아낌없이 주기만 하는 나무의 헌신적인 사랑에 감동을 받았거나, 혹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져가기만 하는 인간의 독선적인 이기심이 얼마나 잔인한 건지, 반대로 끝없이 주기만하는 너무나 바보같은 나무의 이타심에 안타까운 마음을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지금에 와서 생각을 해보면 나무와 소년의 관계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자연스레 나와 내 아이들과의 관계를 되돌아 보게 되었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내가 어떤 부모로서 아이들을 행복한 삶으로 이끌어 줄 수 있을까 고심할 때가 많다. 나는 엄격한 편이기는 한데 마음도 약해서 강단있게 지도하지 못할때가 있다. 그냥 해달라고 하는대로 들어주고 싶은 게 부모라면 같은 마음이겠지만 막상 모든 여건과 상황은 그렇지가 못하고 설령 그런 여건이 갖춰져 있다고 하더라고 그렇게만 해줘서도 훌륭한 부모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무가 부모이고 소년이 자식이라기 보다는 그 자리를 내어준 땅이 부모이고 그곳에 뿌리를 내린 게 자식이라고 봐야 올바른 관계정립이 될 것 같단 생각이 든다. 내가 비록 비옥한 토양이 못되더라도 내 몸에 뿌리를 내려 자라는 나무들은 산자락에서 커가는 나무들과 같이 예의와 고마움을 아는 그런 자식으로 커 가길 바라는 마음이며, 나 또한 끊임없이 물과 양분을 축적시켜 놓고 한결같은 나이테를 가진 나무로 자라날 수 있도록 끝없이 바라봐주는 땅이 되어야 한다고..


어릴 적 나는 유난히 잠버릇이 심한 아이였다. 바르게 잠자기 시작했어도 어느때는 책상밑으로 기어 들어가서 자다가 일어날때 머리를 찧은 적도 있고 심지어 사촌언니는 내가 잠버릇을 고쳐야 시집을 갈 수 있을거란 말까지 했을 정도였으니 나와 같이 잠을 자던 어른들은 하나같이 같은 말을 했었다. 그런데 그건 나의 못된 잠버릇때문이 아니였고 단순히 나는 어린 꼬마였기 때문에 그렇게 험하게 잠을 잤던 것 뿐이다. 아이들은 잠을 자는 동안 수십번을 방향을 바꿔가며 뒤척인다고 한다. 그래서 어릴적에는 잠을 자다가 침대에서 떨어지기도 일쑤이고 아이 혼자 침대에서 재우는게 위험하기 때문에 난간을 세우거나 아예 어른이 모서리쪽에 자리를 잡아 잠을 자면서 아이의 낙상을 막아주기도 한다. 그런데 아이만 꼭 그렇게 수십번을 뒤척이며 잠을 자는 것일까. 이는 어른들도 마찬가지지만 점점 커가면서 침대에서 굴러떨어지지도 않고 잠버릇이 좋게 고쳐지는 건 잠을 자면서도 균형을 잡으려는 중심력도 함께 자라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도 자기만의 중심을 잡아가는 힘을 키워가는 과정속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잠버릇이 험하다던 나도 지금은 누운자리 그 자세로 아침에 눈을 뜰때가 많을 정도로 아주 예민한 잠버릇으로 바뀌어 갔기 때문이다. 어릴때는 시소를 타면서 수평에 대한 무게 중심을 배워 자연스럽게 균형감각을 익히기도 하 듯, 우리가 점점 어른으로 자라나면서 이리저리 한번씩은 치우쳐져 기울어지기도 할테지만 곧 본인만의 중심점으로 되돌아올 수 있게 만드는 가상의 힘까지 더한 강한 구심력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어릴때도 어른이 되어도 우리는 항상 희망이라는 어떤 바램속에서 살아간다. 내가 어릴 때 옆 동산 떡갈나무한테 작은 소원들을 빌었고 잠들기 전 맛있는 과자를 많이 먹는 꿈을 꾸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었다든지 시험에 합격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든지 내가 긁은 복권이 당첨되기를 희망한다든가 하는 상상할 수도 없는 희망들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희망이라는 걸 미래에 걸고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 우리가 바라는 희망이라는 건 과거와 더 많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그동안 자신이 얼만큼의 정성을 들이고 노력을 쏟으며 만들어온 일과 관계에 대한 일종의 댓가를 기대하며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희망하는 마음의 진정한 뜻이 아닐까. 그래 나는 오늘 눈을 뜬 새벽의 순간부터 시계 바늘이 두바퀴를 돌아와서 또 다시 같은 공간으로 되돌아오기 까지 모든게 전과 같이 평온하기를 바라는, 그렇게 희망하는 마음때문에 이렇게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오늘 바랬던 내일에 대한 희망은 어제의 나의 생활이 없었다면 한낮 꿈에 불과할 테니까 말이다. 우리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단우도 엄마가 빨리 퇴근해서 나에게 맛있는 쮸쮸를 주기를 희망하는 마음도 온종일 어린이집에서 잘 참고 있어준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으로서 바라는 희망일테며, 어른인 엄마와 항상 같은 패턴의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집 작은 두 꼬마도 주말이 되면 아빠 엄마와 신나게 놀며 쉴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일주일을 그렇게 쉼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30년 전 생일을 맞았던 꼬마는 내 생일이라고 선물하나 받지도 못하고 처음부터 받을 기대도 하지 않고 엄마가 만들어 주시던 쟁반만한 밀가루 술빵이 전부였어도 마냥 즐거웠다. 30년이 지난 지금, 초에 불을 붙이다 가장 먼저 불을 붙힌 초가 마지막 초에 불을 붙이기도 전에 벌써 반이나 녹아 내려 세월의 무상함을 느껴져도 남편과 세아이가 불러주는 생일축하 노래에 감동받아 눈물찔끔 흘리고 '뱃살 1키로쯤이야' 하고 케이크 한판이 고마워서 빵조각 하나 남김없이 전부다 먹어치우는 아줌마가 되어버렸다. 지난 30년 동안 기억할 수도 없는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기도 또 많은 것을 얻기도 하였을 것이다.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 버린다는 것, 포기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서운한 일이기는 하지만 다른 편으로 생각해보면 버린다는것, 솎아내 버린다는 것은 그 중에 더 큰 것을 키우려는 속 뜻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살면서 좌절하여 땅에 넘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다시 걷고 있는 걸 보면 분명히 다시 일어났다는 것이다. 극작가 똘스토이는 인간은 분수와 같다는 말이 했다. 분자는 자신의 실제이며 분모는 자신에 대한 평가이고 분모가 클수록 분수는 작아진다고. 땅에 넘어진 사람은 허공을 붙들고 일어날 수는 없을 테고 어차피 땅을 짚고 일어설 수 밖에 없듯 분수를 지키고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내 자신을 잘 알며 중심을 잡아갈 수 있는 마음의 평정을 다져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편협한 생각은 내가 퍼올린 내 그릇 이상의 물은 흘릴 수 밖에 없으니 많이 보고 경험하며 상대의 입장에서 배울 수 있는 배려심을 갖고, 중국 고대 철학자 노자의 [도덕경]의 물의 철학대로 가장 낮은 곳부터 채워져야 더 높은곳까지 오를 수 있는 물의 순리처럼 내 자신도 항상 겸허한 마음으로 이치에 맞춰 세상을 살아가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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