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읽는다는 것 -, 결코 자신과의 대화만은 아니라는 사실
2019. 8. 20.
읽는다는 것, 본질은 고독한 행위임에도 그 속에서는 대단한 소통이 일어난다. 따라서 혼자라고 해도 혼자가 아니며 궁극적으로는 자신과의 투쟁이라서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프루스트는 괴짜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대단히 사물과 사람과 환경에 대해 민감한 통찰력을 가진 작가였다. 무수히 많은 작가조차도 프루스트에게 풍덩 빠져서 허우적대며 질식할 뻔해서 결국은 자신의 작품조차 써 내려가지 못했을 정도라고 고백했고 특히 버지니아는 프루스트에게 굴복해서 한동안 더는 한 줄도 쓰지 못할 것 같은 절망에 빠지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물론 이미 죽은 자들의 기록으로 나는 그들의 일기를 훔쳐보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 조마조마하게 읽지만 어쩌면 그것은 글이란 것은 작가의 영혼이 깃들어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 숨을 쉬는 생명체와 같아서 그것을 읽는 독자들에게 떨림의 경험을 안겨준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만났던 카스트로프에게서 나는 상당히 남성적인 매력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세상과 동떨어진 요양소에 사촌을 문병하러 갔다가 정작 자신이 그곳에 오랜 기간 머물러 있게 되면서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고 그들을 통해 일종의 정신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는 토마스 만의 소설이다. 사실은 마의 산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문장의 미묘한 특징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을 해 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소위 늘여 쓰기의 대가라고 하면 만과 프루스트를 꼽는다. 반면, 줄여 쓰기를 대표하는 사람으로는 엘리엇, 그리고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헤밍웨이를 말한다. 헤밍웨이가 젊은 시절 작문을 배울 때 스승으로부터 ‘단문’에 대한 충고를 들었던 것이 오늘날 우리가 읽는 그의 문장의 특징을 있게 해 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한편, 이런 일화도 있다. 여섯 글자로 가장 긴 글 만들기 내기에서 헤밍웨이가 이긴 적이 있는데 그때의 문장이 바로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이었다. 단순하지만 그 의미는 절대로 단순하지 않은 여섯 글자. 이 짧은 문장에서 우리는 누구나 아주 긴 이야기, 어쩌면 단 여섯 글자로 많은 연관 이야기를 상상하고 그려낼 수 있다는 데 있다. 바로 글자 사이의 여백의 미를 제대로 살린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었다. 또 한편으로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대단히 방대한 분량이다. 심지어 끝까지 제대로 읽어내려면 2년은 걸릴지도 모른다는 말처럼 쉽사리 도전하기 어려운 두꺼운 책이다. 단순히 사진 속의 강아지 한 마리를 두고 이야기 한 개는 써 낼 수 있었던 엄청난 상상력과 관찰력이 있었고 그만큼 모든 전반에 대한 통찰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영국에서는, 프루스트가 프랑스인이었음에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15초로 줄여 말하기 대회가 있을 정도로 그 방대한 길이는 처음 접해본 사람이라면 시작하기도 전에 겁을 낼지도 모를 정도이다. 언젠가 대화와 독서의 차이에 대해 언급했던 적이 있었다. 그 본질의 차이는 어쩌면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줄 아는 능력을 좌우한다는 생각이 왠지 틀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바로 이런 이유가 작은 아이가 절대로 저렇게 그냥 성장하면 안 되는, 내 아이들이 읽는 것을 멀리하면서 멀티미디어에 노출되어 쉬운 방식으로 성장하도록 놔두어서는 안 되는 이유라는 것을 절감했다.
작은 아이가 진단을 받은 지 한 달이 넘어섰지만, 난독증 치료 교실에 나간 건 사실 두 번밖에 는 되지 않는다. 치료 교실의 선택부터 혼란한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안정을 찾아야 무엇이라도 결정을 하고 시작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난독증에 관한 많은 책도 찾아보고 읽었고 또 읽고 있지만 지금 내 선택이 아이를 좋아지게 해 준다는 데는 담보와 같은 보증 물은 없다. 그저 희망을 품고 해 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 사실이 이따금 나를 좌절시키고 슬프게 한다는 것이 여전히 마음이 아프고 힘들다. 그래도 나는 선택했고 시작했다. 기관에 돈을 주고 아이를 맡기는 것 말고 나 스스로 엄마로서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 표현의 방식이 책을 읽어주는 것이었는데 그 방법이 꽤 괜찮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묵독만 할 때의 느낌보다 낭독을 함으로써 알게 되는 내 어조, 억양, 그리고 내용의 논점에 주의를 한 층 더 집중시킬 수 있고 아이들이 함께 듣게 됨으로서 우리만의 공간에 감정의 교류가 가능해져서 더 효율적으로 공감할 줄 알게 된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바로 낭독이 깊이 읽기의 표본처럼 여겨지는 순간들이었다.
진도는 더디다. 이제 겨우 제제는 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여운만큼은 어느 때보다 길고 진하다. 그리고 우리는 가족의 일원을 떠나서 타자로서, 혹은 타자가 되어 서로의 감정에 이입할 줄 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큰아이가 영화 알라딘 OST 중 ‘A whole new world’를 엉터리로 따라부르면 스스로 매우 잘한다는 생각에 취해 있다가 형의 코 밑에 앉아서 그 노래를 듣던 막내에게 무심코 손짓을 해서 눈두덩이를 잘못 맞게 된 적이 있었다. 물론 큰아이는 호되게 야단을 맞았고 막내를 보듬어주면서 형의 실수를 이해시킨 적이 있었다. 자세히 보면 알 수 있을 정도로 눈썹 언저리에 붉은 자욱이 생겼는데 그다음 날 유치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아이는 심각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 만약에 선생님이 어떻게 다쳤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해요?”
잊혔던 큰아이의 경솔함, 순간 다시 화가 났지만 나는 침착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냥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된단다. 형이 노래를 너무 진지하게 부르다 그만 잘못해서 그런 거라고. 사실이잖니.’
그리고 교실로 데려다주기 전 아이의 맑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단순히 형한테 맞았다고 말한다면 무언가 커다란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서린 눈망울이 촉촉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 아이를 끌어안아 주고 걱정하지 말라고 괜찮을 거라고 도닥여 주었다. 그 눈빛은 비록 형이 잘못해서 얻어맞기는 했지만, 형을 먼저 생각하는 아이의 마음 때문에 돌아가는 내내 내 마음은 자꾸만 뭉클해져 계속 코를 훌쩍거리면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참아내야 했었다.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기엔 막내는 어리고 작지만, 어느새 훌쩍 자라 있는 것만 같은 아이의 생각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아려오고 아팠는지는 엄마라면 당연히 느낄 수 있게 되는 그런 애잔함과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날 이후로 아이들을 안을 때 더 힘을 주어 안아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