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독서를 할 줄 아는 것 - , 인간만이 누리는 최고 의미의 선물
2019. 8. 21.
삶이 부당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남 탓을 하지 말고 원인은 나에게 있음을 알기.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타인보다 잘한다고 마치 증명이라도 하듯 무리하게 억지로 타인을 성가시게 하면서까지 요구하는 사람의 내면은 자기애가 부족한 사람일 경우가 많다. 자신을 믿고 당당하게 언제 누구 앞에서라도 나설 수 있는 자는 굳이 타인 앞에서 나를 내세우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스스로 그렇게 노력하게 않더라도 저절로 상대방을 압도하거나 관심을 유도하는 에너지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그 에너지를 감지할 수 있고 또한 느낄 수가 있다. 나는 조용히 생각해 보았다. 나 스스로 타인 앞에서 당당히 자랑이라는 뜻에 걸맞도록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를. 없다. 그러므로 나는 남 앞에 나서지 않는다. 다만, 주도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조금의 도움은 줄 수 있을 정도는 된다고는 생각한다. 예를 들어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외국인에게 그가 처한 상황을 최소한 설명이라도 해 줄 수는 있었으므로.
회의 서류를 말 바꾸기 식의 유의어로 자주 고치는 것운 전적으로 남에게 잘 보이고 인정받고 싶은 열망에 대한 내면의 발현이다. 난 그렇게 애쓰지 않는다. 그저 내 자리에서 나의 행위와 노력을 알아주든 모르는 체하든 상관하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거의 의무와도 같은 직장 일로 상사나 동료들에게 잘 보일 이유는 존재 근거가 되지 못한다. 다만, 나 자신의 꾸준한 성장을 위해 만큼은 언제라도 노력의 끈을 놓지 않을 뿐이다. 궁극적으로 내 삶의 사명을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나를 중심으로 둘러싼 아이들을 위해 그 아이들 각자의 인성과 인품의 중심에 힘을 심어주어 어떤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는 인간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키워내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만큼 여자로서, 아이를 낳은 인간으로서, 엄마로서의 의미 있고 값진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언제나 헌신하고 참여하며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사랑이 빠지지 않도록 내면의 삶을 풍부하고 공고히 해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나의 환경, 일, 사람들을 위해서, 그러므로 나의 삶은 언제라도 최선의 노력 속에 유지되어야 한다.
삶에서 놓쳐서는 안 될 순간, 아이의 눈물이 땅으로 떨어지는 것.
진정으로 강한 힘이란 오히려 너그럽고 부드럽고 관대한 이해와 배려일 것이다. 나는 그 아침, 고개를 조금 숙이고 눈 속에 갇혀 간신히 매달려 있는 작은 아이의 굵은 눈물방울을 보고 나서야 나 자신이 얼마나 과장되고 허영에 찬 사람인지를 느끼게 되었고 참을 수 없는 죄책감으로 내내 아파했었다. 숨이 막혀올 정도로 답답해졌기 때문에 간신히 숨을 들이쉬고 그 숨으로 다시 말을 이어갔고 살포시 아이를 안고 등을 쓸어내리면서 들리는지 마는지도 상관없이 ‘미안하다’를 삼켰다.
유리구슬같이 떨어지던 굵은 빗물 방울은 무엇에든 닿자마자 산산 조각나 깨져버렸다. 그것은 빗방울로서의 마지막 순간임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 닿는 접점에서 빛의 번짐은 마치 밝은 조명 아래 자태를 뽐내는 트리플액설런컷(3XC)의 다이아몬드의 빛보다 맑고 투명해 보였다.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은 빗방울의 마지막 순감임을 아는 데서 오는 감정에 담긴 슬픔 때문임을 짐작했다.
사람들이 내 처지와 불행으로 더 기뻐할수록 그럴수록 나는 나 자신을 더욱더 공고히 하여야 한다. 비록 조금은 슬프더라도 홀로 서서 독립적으로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견디며 공부하며 잘 다듬어서 그들이 나를 쉽지 보지 못하도록 설령 우습게 보일 상황이 되더라도 나에 대한 자존감으로 거듭날 것이다.
빛은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거나 마치 공기처럼 모든 곳을 꽉 채우기도 한다. 해가 지고 모든 전등이 꺼지면 우리 집의 모든 공간 구분의 상징인 벽의 경계가 무너지고 그 무너진 공간은 깜깜한 어둠으로 뒤덮이고 나면 우리 집 꼬마들의 숨은 남은 공간들을 꽉 채운다. 그제야 비로소 현실 속 공간이 아닌 내 고유한 세계로 들어왔음을 감지하고 현실 속의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무언가를 또 적고 지우기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어떤 날에는 그런 내가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었지만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나 자신이 이미 알고 있으나 아직 표현되지 않은 일이나 표현되기는 했으나 특별한 방식으로 다시 말할 필요가 있다고 또 그럴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 조금씩 아주 서툰 이야기로 풀어내기에 충분한 의미가 있었다.
나에게 맞는 취미.
학창 시절 신학기 개인 신상 조사서에는 언제나 취미를 쓰는 칸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심각한 고민을 한 적도 없이 바로 ‘독서’라고 적었는데 그건 어릴 적 내가 책을 엄청나게 많이 읽었던 학생이라서가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취미라고 할 만한 즐거움을 주는 배움이나 소일거리가 없었던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공부는 잘했던 학생이었다. 그래서 만나는 선생님들로부터 관심을 받기는 했으나 1등을 해도 만족스러운 기쁨을 느끼지는 못했었다. 그건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나와 함께 성장한, 오히려 내가 크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빨리 자라났던 세상에 대한 열등감과 불신이 무겁게 눌러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나에게 독서는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고 잘 난 체하고 싶었던 허영심 표현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내 취미를 써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때와는 달리 조금은 심각하게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독서’라고, 혹은 ‘글쓰기’라고 빈칸을 채울지를. 왜냐하면, 지금의 나는 글쓰기 전 마음을 수련하는 의식과도 같이 독서를 할 때가 많다는 것, 그리고 학교를 벗어나 인정보다는 계산적인 거래가 더 유지되는 사회의 분위기와 잘 맞지 않는 내가 독서를 통해서 화자와 혹은 나 자신과 대화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고 따라서 이따금 글을 쓰기 위해 공부하는 학생처럼 독서를 하는 것인지, 그렇다면 독서를 취미라고 하기는 조금 맞지 않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독서, 즉 글이 좋아서 읽게 되었으니 나도 그 좋아하는 것을 취미로 삼아서 직접 써보자는 심정으로 글을 쓰기도 하는 것이니 ‘글쓰기’가 내 취미인지 분명한 판단이 안 서기 때문이다. 어쨌든 어른이 된 이후로, 그리고 직업을 가진 이후에는 취미를 적을 만한 기회가 없기에 둘 사이 시작의 원인이 무엇이든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지 그다지 중요한 결정은 아니라는 생각은 분명하다.
존 러스킨은 독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살아있는 자들과 말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이유는 상대방의 얼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서란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그 누구보다 지혜롭고 훌륭한 사람들과의 대화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독서가 가장 지혜로운 자들과 나누는 대화라고 해도 실제 대화와 일치할 수는 없다. 그것이 책과 친구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으로 소유하는 지혜의 깊이가 아니라 소통의 방법이다고 설명한다. 나는 문득 엉뚱하게도 왜 소크라테스가 처형당했는지가 떠올랐다. 그건 당대 집권층이 혁명가이자 지식인이었던 소크라테스는 ‘대화’로 젊은이들과 제자들에게 지혜를 전달하고 그들을 계몽하는데 이에 대한 위협과 두려움을 느꼈던 기득권 세력은 소크라테스를 불온한 사상을 가진 자로 몰아 당대 사회를 어지럽힌다는 정치적 모함으로 처형하는데 불운의 철학자이자 스승이자 신이었다. 사실 소크라테스는 직접 기술한 저서가 단 한 권도 없다. 다만 [파이돈], 제자였던 플라톤이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글로 집필해 놓은 것이 남아 있을 뿐이다. 반면,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후대에 상당히 많은 저서를 남겼다.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알파벳을 배우지 않는 것이 더 이롭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글자문화에서 오는 사고의 단절을 매우 심각하게 비판했고 호메로스의 시구절, 정치적 이슈, 단어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의문을 부여하고 원천적인 사고의 본질을 명확하게 이해하라고 요구했으며 최종 목표는 항상 가장 심오한 사회적 가치를 반영하는지 반영하지 못하는지 이해하는 것이라고 ‘대화’를 통해 가르쳤고 바로 질문과 대답의 방식이 그의 가르침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파이돈]에 따르면 책이 적극적이고 비판적인 이해과정을 단락시켜 ‘지혜에 대한 자만심’을 가진 제자를 만들어 낼 뿐이라고 기술해 놓은 것만 봐도 상당히 구어 교육이 그 중심에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대에 이르러 비로소 고대 그리스 교육이 구어에서 문자인 독서교육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인지심리학자인 메이런 울프의 [책 읽는 뇌]를 읽고 나서 느낀 바를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다. 난독증이 있는 아이 엄마의 입장을 훌쩍 떠나서 이 문제와는 완전히 별개로 구어와 문어의 경중을 가려내는 식이 아니라 어쩌면 둘 사이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의 틈을 끌어낼 수 있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로 의문을 가진다면 책을 읽는 행위, 즉 독서가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존재인가 하는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몇천 년 전에 살던 사람들도 지금의 우리만큼이나 영리하고 똑똑했다.
잠아 오거라
내 아기에게 오거라
어서 와서 내 아기를 재워 주렴
깜빡깜빡 아기 눈에 잠을 놓아 주렴
초롱초롱 아기 눈에 네 손을 얹어 주렴
옹알옹알 아기의 혀
그 옹알거림이 잠에 달아나지 않게 해 주렴
위 시를 읽으면 사랑스러운 아기를 재우고 있는 엄마와 막 잠이 들기 시작한 아기의 모습이 그려진다. 세 아들을 키운 아이의 엄마인 나도 아이들이 갓난아이였던 때로 돌아간다면 위의 자장가를 편안한 음운에 맞춰 아기에게 자장가로 불러주고 싶을 정도이다. 지금이라도 전혀 손색없는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엄마의 눈빛과 모습이 보일 듯하다. 하지만 위 글귀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인류 최초의 도시 문명을 세웠던 수메르인이 불렀던 자장가가 남아 있는 것이다. 여전히 그 시대에도 여성들이 아이를 돌보고 키웠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당시에는 여성, 계급과 출신에 따라서 쓰는 언어가 각각 별개로 존재했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당시 여성들이 쓰는 언어를 특히 ‘에메살’이라고 칭하여 배우고 익혔다고 한다. 어디 오늘날에도 이런 사회가 있다면 글자를 배우고 독서를 학습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 될지를 정말로 상상이 안 될 정도이다. 그러나 이미 6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도 현재의 우리와 같이 글자를 쓰고 배우고 익혔다는 사실이 또한 그 정서가 거의 변하지 않고 유지됐다는 사실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자는 사물을 보는 능력이 두 배는 뛰어나다. 메난데르
글자로 이루어진 글, 우리는 그 글을 읽게 됨으로써 글자가 주는 정보를 뛰어넘는 너무나도 아름답고도 무한히 많은 사고를 할 수 있게 된다. 독서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이며 무한한 가능성을 내재한 침묵의 저항수단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형식의 대화와는 달리 물리적인 시공간의 개념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독서라고 생각한다.
이른 새벽, 날이 새려면 한참이나 남았는데도 참매미가 울고 있었다. 그 울음이 그쳤다 이어졌다 하기를 반복하는 것이 왠지 이 여름이 막바지에 이르러 더위가 물러날 때가 다가오는 것에 이제는 그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매미의 자조적인 울음같이 들려서 그런지 왠지 울음 속에는 눈물이 섞인 듯 축축하게 느껴졌다. 새벽에 눈 뜬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감상이자 동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른 시간에 나는 여전히 읽다 만 책의 다음 장을 읽어내고 있었다. 새벽 시간의 독서는 그야말로 내 최고의 유희이자 지고한 기쁨이었다. 어떤 날 화장실이 급한 큰아이가 이런 모습의 엄마를 보고 아침상에서 물어오기도 했었다.
“엄마는 왜 사람들이 다 자는 그 시간에 책을 읽어요? 잠을 안 자도 온종일 졸리지 않아요?”
표정과 말의 억양에서 아이가 지금 잠이 부족해 보이는 엄마를 걱정하고 있다는 느낌이 전달되었기 때문에 곧바로 대답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생각으로 비슷한 생활을 하면서 살아간단다. 하지만 누군가 하지 않는 일, 특별히 그 일이 나쁜 일이 아니라면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산다는 것도 삶의 기쁨을 느끼게 해 주는 일이 될 수 있어. 그리고 엄마에게는 가장 고요한 시간에 오로지 책 넘기는 소리에 너희들 잠이 깰까 조마조마한 새벽에 읽는 독서의 맛이야말로 정말로 꿀맛이란다. 그리고 엄마는 다른 사람들이 늦은 시간까지 깨어 있을 때 일찍 잠을 자잖니. 네가 엄마를 걱정해 주는 것 같아 기분이 무척 좋단다. 고맙구나, 얘야.”
돌아와 생각해 보니,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여전히 작고 나약하고 초라한 사십 대의 여자, 아줌마에 불과했지만 나는 거의 매일매일 문학의 허구와 검증된 철학의 논리 저들을 만나고 있었다. 학창 시절의 헤르만 헤세부터 어른이 되었을 때 토마스 만, 그 밖의 또 다른 무수히 많은 천재, 그들이 모두 다 내 친근한 스승처럼 느껴졌고 그 무렵 나는 그 들의 생활에 들어가, 한편으로는 그들을 내 생활의 한 영역에 살도록 함으로써 이따금 타인들로부터 받는 무리한 관심과 혹은 멸시들로부터 나 자신을 평소대로 유지해 낼 수 있는 지혜를 기를 수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어디서든 내가 타인들과 비교하면 사교성이 부족하고 여러 가지 여건으로 동떨어져 살아간다는 생각으로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경험, 독서를 통해 간접적으로 해 볼 수 있던 체험들은 정말이지 내게는 기적 같은 일이기도 했다. 물론 한글이 한 글자도 없던 영어 원문을 거침없이 읽어 내려가면서도 여려 겹으로 쌓인 단어의 의미를, 전체의 문맥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염려가 되기도 했었지만, 그 염려는 오히려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잠재적인 외로움마저도 떨쳐낼 수 있게 해 준 일종의 극복 방책이었다고 생각한다. ‘독서를 배우면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러면 다시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던 루머고든의 말이 내게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한편으로는 삶이 독서를 바꾸기도 하지만 이렇듯 독서는 우리의 삶을 바꾼다. 그래서 나는 괴로움, 분노를 겪고 있는 사람에게 차분히 독서를 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건 아이와 어른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들어맞는 일종의 아스피린, 만병통치약과도 같다. 한 가지 경험적인 사례를 들어보자면 그렇다. 어느 밤, 큰아이와 작은 아이가 이부자리에서 서로의 자리를 누가 차지하고 있는지를 두고 조금은 심하게 다투던 날이었다. 그때 마침 막내를 옆에다 눕히고 작은 목소리로 ‘살모사가 생쥐를 납치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고 있었는데 일부러 큰애들이 다투는 소리보다 더 높여 큰 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하자 아이들의 주의는 나를 향해 쏠렸고 얼마 안 되어서 아이들은 자기들이 왜 다투고 있었는지조차도 잊어버린 채 내 이야기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싸움은 진정되었고 이부자리의 문제는 원만히 해결되었다. 아무런 사과의 절차나 화해의 순간은 필요하지도 않았을 만큼 그날 밤의 다툼은 아예 처음부터 일어나지도 않았던 일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듯 내 경험을 빌어 자신이 힘들거나 외로움을 느끼거나 혹은 분노의 감정이 잘 통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에는 무엇이든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매우 안정된 상태에서도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인데 어떻게 그런 상태에서 책을 읽으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이런 말을 하는 나를 잘난체 한다고 비난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읽는 행동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인간 최고의 관조 행위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위가 분산되는 상황에서 스스로 바로 세울 수 있는 일종의 저항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그건 처음부터 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꾸준한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완성될 수 있으며 나 또한 여전히 그 실천이 어렵다는 사실을. 그리고 오히려 마음이 평온한 상태에서는 책을 읽기보다는 조용한 길을 산책하거나 밖에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분주한 사람들을 바라보라고 권한다. 그러면 꼭 깨달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삶을 방어하는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을 만한 요소들에 자극받을 것이며 그것은 결국, 삶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끄는데 중요한 기회가 된다는 것을 스스로가 느끼게 될 것이다.
다시 난독증으로.
거의 최근까지만 해도 난독증은 ‘학습장애’라는 명칭을 붙여 일종의 발달장애로 인식해 왔다. 사실 난독인 당사자 혹은 그 가족이라면 듣기만 해도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장애라는 뜻에는 개인의 능력을 방해하는 신체적 또는 정신적인 손상으로 보통 사람들의 기준에 맞춘 표준과 상식적인 생활이 몹시 불편하다는 것을 가장 먼저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며칠 전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고는 마음속에 조금씩 새로운 기대가 차올랐던 적이 있었다. 바로, 난독증은 뇌나 신경 손상의 결과가 아니며 뇌, 나이, 안구의 기형에 의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난독증은 생각의 결과물이고 혼란 감에 대한 독특한 반응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편재된 뇌 반구 우세, 주로 우뇌를 사용하는 난독인의 뇌 특성상 난독인이 아닌 사람들이 기호의 형태 의미와 인식을 좌뇌 위주로 사용할 때 우뇌의 편재가 두드러진 난독인들은 우뇌를 개발하여 인식하는 훈련을 스스로 하게 된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난독인들 중에 공간지각력이 뛰어나도록 개발되거나 논리적 사고력의 우세한 발달로 천재적인 과학자, 건축가, 예술가들 있다는 이론으로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천재라고 이름을 남긴 그 사람들을 공부해 보기로 마음을 먹은 건 어쩌면 그들을 통해 작은 아이를 교정할 방법의 실마리를 알아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인물 중 나를 가장 놀라움에 빠지게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너무나도 잘 알려진 동화작가 안데르센이었다. 안데르센이 난독증을 앓았던 사람이었다니 믿기지 않았다. 과학자, 예술가로서 이미 알려진 사람들은 난독증의 발생 원인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냥 고개라도 끄덕이며 반응을 보일 수가 있겠지만 안데르센은 글과 문자, 읽기를 떠나서는 생각해 볼 수 없는 작가이지 않던가. 그날 새벽, 나는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날이 밝도록 잠이 들지 못했다. 내가 안데르센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그가 쓴 동화 몇 편, 그리고 그가 매우 가난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 사실에 잠들지 못한 것도 어쩌면 그렇게 놀랄 일은 못 되었다.